# 145
서로군벌과 북로군벌이 헬싱턴의 접경 지역에 병력을 집결한 이유는 이콰라 공작 가문의 몰락 소식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이콰라 공작의 성이 있는 벨라에 김필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였다.
원래 이코스트 백작은 황실에서 주는 후작 작위를 받아들이고 천천히 볼삭 지역의 각 영지를 완전하게 병합한 다음 전열을 재정비하여 남하할 생각이었다.
더구나 접경 지역엔 귀족들이 파병한 병력이 주둔해 있어 그들을 돌파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고칸 성에서 북해까지 가는 길을 만들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며칠 전 칼베리언으로부터 영지를 지키는 병력을 제외한 나머지 병력을 라펠 평원에 집결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콰라 공작의 죽음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좋은 기회라는 사실도 알지만 솔직히 내키지 않았다. 영지 주위에 집결해 있는 자들 때문이다. 하지만 종을 자처한 이상 칼베리언을 따르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동안 만들었을 길을 따라서 문 대륙에서 건너온다는 마족을 마중 나가는 중이다. 물론 손님을 모셔 오라는 명령을 내린 사람은 칼베리언이다.
산을 내려와 30킬로미터가량 북진하니 바다가 나타났다. 북쪽 바다는 난생 처음이었다.
고칸 성에서 50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바다가 있다는 사실이 이코스트 백작은 놀랍기만 했다.
“바다 냄새가 이런 거였구먼.”
바람을 타고 짠 냄새가 풍겨 오자 이코스트 백작은 얼굴을 찌푸렸다. 잔잔한 수평선과는 달리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는 냄새는 아니었다.
“바다는 처음이십니까?”
옆에 서 있던 사내가 물었다. 그는 고칸 기사단 단장이자 이코스트 백작의 심복인 홀린 타이놀 자작이었다.
“고칸 성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까.”
“바다는 아주 멋진 곳입니다. 기분 좋을 땐 풍부한 먹을거리를 무한정 주지만 화가 나면 해일을 일으켜 모든 걸 쓸어버리는 고약을 부리기도 하죠.”
“그럼 지금은 기분 나쁜 상태인가 보군.”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바다에 도착하자마자 비가 오고 있지 않은가.”
이코스트 백작은 하늘을 가리켰다.
산을 내려올 때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제법 거센 기세로 몰아쳤다.
“비는 하늘에서 내립니다, 영주님.”
“아무튼 나는 비가 싫어.”
“옵니다, 영주님!”
그때 타이놀 자작이 바다를 가리켰다.
“떼로 몰려왔네.”
이코스트 백작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이쪽으로 오는 배는 전부 10척이었다.
“저 정도 규모면 이야크와 함께 태워도 1백 명은 탈 수 있습니다.”
“그럼 1천 명의 마족이 온다는 소리네?”
“그런 것 같습니다.”
“서로군벌 진영으로 들어온 천족이 천여 명가량이라고 했던가?”
“대천신군이라고 들었습니다. 수장은 세이아칸이란 자고요.”
“그럼 저들이 와야 균형이 어느 정도 맞겠구나.”
“그럴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이 대화를 하고 있는 사이에 전함이 도착했다. 전함의 형태는 특이했다. 보통 선수를 유선형으로 뾰족하게 만드는 인간의 배와는 달리 마족의 배는 전체적으로 직사각형 형태였다.
드르륵!
닻이 내려지고 사각형 형태의 선수가 아래로 내려졌다.
철벅! 철벅! 철벅! 철벅!
10척의 전함 선수가 아래로 내려지고 그곳을 통해 이야크를 탄 마족들이 걸어 나왔다. 이야크는 머리만 내놓고 나머지는 전부 물속에 잠겼다.
그 상태에서 이야크들은 백사장으로 나왔다.
“마계10군단은 도열하라!”
우렁찬 외침에 이어 마계10군단 대원은 2백 명씩 다섯 개 조로 나뉘어 늘어섰다. 마계10군단의 도열이 끝나자 데메우스는 그들의 선두로 나갔다.
곧 데메우스의 입이 열렸다.
“드디어 우린 첫 임무를 수행할 땅에 도착했다. 많은 이들이 우리에게 우려의 눈빛을 보내고 있다는 건 너희들도 잘 알 것이다. 우리는 그런 자들에게 분명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가 히데우스가 이끌던 마계10군단보다 더 뛰어나고, 더 강하고, 더 완벽하다는 사실을. 날 믿어라. 날 숭배해라. 그러면 저 바다를 건너 다시 돌아갈 땐 너희들은 마계 최강이 돼 있을 것이다.”
데메우스는 뒤편 바다를 가리켰다.
“알겠습니다, 군단장님!”
마계10군단 1천 대원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소리쳤다.
‘젠장!’
1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마족들을 바라보던 이코스트 백작은 내심 욕설을 흘렸다.
1천여 명에 불과할 뿐인데, 그들이 흘려대는 위압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빠질 걸 공연히 나왔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칼베리언이 보내서 왔느냐?”
그때 데메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습니다.”
언제까지 빗속에 서 있을 수는 없었다. 이코스트 백작은 마계10군단 대원들이 도열해 있는 곳으로 말을 몰아갔다.
“너는 누구냐?”
“발탄 제국 4대 군벌의 한 곳인 북로군벌의 수장이자, 칼베리언 님을 마스터로 모시고 있는 파르탄 이코스트 백작입니다.”
“군벌이라면 병력을 거느리고 있다는 말이냐?”
“30만 명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30만 명이라…….”
데메우스의 얼굴에 언뜻 놀람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마족에 비해 형편없이 약한 인간이라고 하지만 30만 명은 무시할 수 없는 숫자다. 그런 조직의 수장을 종으로 거느린 칼베리언의 능력은 높이 살 수밖에 없었다.
“휴도니아 대륙에 대한 이야기는 가면서 듣겠다.”
“모시겠습니다.”
이코스트 백작은 고개를 숙이고는 말을 돌렸다.
데메우스를 비롯한 마계10군단 대원들은 이코스트 백작을 따라 이야크를 몰아갔다.
데메우스가 고칸 성에 머물고 있는 칼베리언을 만난 건 다음 날이었다.
“좋은 아비를 둔 덕에 출세가 빠르구나.”
칼베리언은 데메우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전에 만났을 땐 중급 마족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키가 2미터 50센티미터고 은색 뿔을 가진 상급 마족으로 변했다. 직위가 그릇의 크기를 바꾼다고 하더니 전엔 마계10군단 조장의 그릇도 되지 않게 보였는데 지금은 제법 여유가 느껴진다.
“지금은 좋은 아비를 둔 것도 실력인 시대잖아.”
“너는 그렇겠지.”
“이곳의 상황을 알고 싶어.”
“내 종놈으로부터 듣지 않았느냐?”
“그건 벌레의 관점이고. 나는 마족의 관점을 듣고 싶어.”
“지금 이곳엔 천족도 넘어와 있다는 건 아느냐?”
“대천신군이 들어와 있다는 건 나도 들었어.”
“대천신군의 군장 세이아칸도 들어와 있다는 것도 아느냐?”
“그 정보는 처음 듣는 건데…….”
“그놈이 대천신군 1천5백 명과 함께 북해를 건너 휴도니아 대륙으로 들어왔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세이아칸 그놈은 지금 어디 있지?”
“우리와 함께 전쟁을 일으켰던 서로군벌의 배후다.”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에게 신갑 헤를리온이 있다고 확신을 하는 모양이지?”
“그건 나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알고 있는 건 있다.”
“그게 뭐냐?”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그놈에게 헬칸이 있다는 사실이다.”
“정말이냐?”
데메우스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직접 확인한 사항이다.”
칼베리언은 데메우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히데우스를 죽인 건 너라고 알고 있다.”
“마지막 숨통은 끊지 않았다.”
“바보 같은 짓을 했군.”
“사자는 명예롭게 죽을 권리가 있고, 모름지기 전사라면 그 권리를 지켜줘야 하는 거다.”
“히데우스를 위해 목을 치지 않았단 말이냐?”
“난 전사니까.”
“히데우스의 명예가 아니라 칼베리언 네 명예를 위해서겠지.”
“쿡쿡쿡! 헬칸이 부담스러운 모양이구나?”
칼베리언은 킬킬거렸다.
“부담은 나보다는 네가 더 느끼는 것 같은데?”
데메우스가 빙그레 웃었다.
새로 뽑은 마계10군단 대원들 속에는 강자들이 상당히 많이 포함돼 있었다. 물론 전 대원들에 비하면 부족했지만, 다른 군단과 비교했을 땐 결코 약한 수준이 아니었다. 강자들이 많이 들어오자 뿌듯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그래서 은밀하게 성향 조사를 했다.
조사 결과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대원의 30퍼센트 정도가 전 군단장인 히데우스를 광적으로 동경하여 마계10군단에 지원한 것으로 드러났다. 더욱 짜증스러운 사실은 히데우스를 동경하여 마계10군단에 들어온 자들 대부분이 강자라는 것이었다.
장차 문제의 소지가 있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대로 둘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퇴출시키는 순간 마계10군단의 전력이 형편없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히데우스의 검인 헬칸의 주인이 이곳 휴도니아 대륙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만 얻으면…….
“난 마계 최강 전사인 히데우스를 없앤 마족이다. 이 세상에 내가 두려워하는 건 없다.”
칼베리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는 거냐?”
데메우스는 덩달아 일어나며 물었다.
“그동안 취미 생활을 등한시했거든.”
“취미 생활?”
“내 취미는 잉여 마족과 잉여 몬스터를 없애는 거거든.”
“미친놈!”
데메우스는 피식 웃으며 칼베리언을 따라나섰다.
그로부터 2시간 후, 칼베리언이 이끄는 블러드 데빌단과 데메우스가 이끄는 마계10군단은 고칸 성을 나서 남쪽으로 이동했다.
마족들이 남쪽의 라펠 평원으로 향하는 그 순간 서로군벌의 본산인 펠콘 성에서도 길을 나서는 자들이 있었다. 금색 전투기갑을 걸친 그들은 다름 아닌 천계의 대천신군이었다. 대천신군의 선두에 서 있는 자는 군장 세이아칸이었다.
“그 벌레 놈이 벨라에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단 말이냐?”
세이아칸은 옆에서 말을 타고 가는 하다르만 후작을 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천좌.”
“다른 영주들이 어떻게 나올 거라고 보느냐?”
세이아칸은 이미 인간들이 건설한 발탄 제국에 대해 대부분 파악한 상태였다.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가만있지 않으면 어떻게 한다는 거냐?”
“벨라로 진격해 들어갈 겁니다.”
“그거 이상하구나.”
“뭐가 이상하단 말씀이십니까?”
“너와 이코스트란 놈이 볼삭 지역을 침략해 영주들을 굴복시켰을 땐 황제 놈은 너희들을 볼삭 지역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이콰라 공작령을 점령한 루시안 그놈도 승자로 인정해야 하는 거 아니냐?”
“승자로 인정을 받으려면 점령한 영지를 지킬 힘이 있어야 합니다.”
“너와 이코스트는 볼삭 영지를 지킬 힘이 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너와 이코스트가 보유한 병력이 70만이고, 제국 황실과 영주들이 보유한 병력이 2백30만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맞습니다.”
“70만 병력으로 2백30만 병력과 싸워 승리한단 말이냐?”
“그건…….”
“내가 너희 인간을 왜 몬스터 취급하는 줄 아느냐?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게 몬스터와 꼭 같기 때문이다.”
“……!”
하다르만 백작은 할 말이 없었다.
세이아칸의 말이 틀리지 않다. 법을 제정하고 법에 따라 통치하겠다며 말하지만, 법은 약자에게만 철저하게 적용될 뿐, 가진 자들에게는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온 말이 유전무죄, 무전유죄다.
하지만…….
‘너희 천족은?’
하다르만 백작이 세이아칸보가 강하거나 또는 비슷한 수준이었다면 그렇게 받아쳤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는 세이아칸의 말에 대꾸할 입장이 아니었다.
“인간과의 싸움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마족이라는 걸 명심해라.”
“알겠습니다.”
하다르만 백작은 고개를 푹 숙였다.
“헬만 네 팔이 잘리던 그때 상황을 다시 말해 보아라.”
“놈에게 먼저 당한 건 부하들이었습니다. 세이기온을 착용한 상태였고, 죽을 정도의 부상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포션만 복용하면 나을 그런 부상에 불과했는데 독에 당한 것처럼 부상 부위가 검게 변하더니 세이기온 전체로 퍼져 나갔고,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갑옷을 착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팔이 잘린 너는 말짱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랬단 말이지.”
세이아칸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천좌께선 그 이유를 아십니까?”
“혼돈의 기운이다.”
“잊힌 5대 신검 중 하나인 카이(Kai)란 말입니까?”
“모든 전투기갑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헬칸의 검인 카이다.”
세이아칸이 알고 있는 전투기갑을 깨트리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한 가지는 철족의 수장이었던 헬칸의 검 카이고, 다른 한 가지는 4대 원소 중 세 가지를 합쳐 만든 혼돈의 기운이다.
결국은 혼돈의 기운 하나로 귀결되지만 전자는 검을 통해 구현된다는 게 달랐다. 아울러 후자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세 가지 기운을 합칠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놈은 보물을 두 개나 가지고 있는 거군요.”
“그렇다고 인간에게 패한 네 죄가 감해지지는 않는다.”
세이아칸은 차가운 눈으로 헬만을 바라보았다.
“기필코 놈의 목을 잘라 천좌께 바치겠습니다.”
“그래야 한다, 헬만. 넌 지금껏 두 번을 실패했다. 세 번째도 실패하면 놈의 머리 대신 네 머리를 올려야 할 게다.”
“명심하겠습니다, 천좌.”
“서둘러라!”
“하다르만, 서둘러라!”
헬만은 하다르만 백작을 쏘아보며 소리쳤다.
“알겠습니다.”
하다르만 백작은 고개를 숙이고는 길 안내를 맡은 기사들이 있는 곳으로 말을 몰아갔다.
“타앗!”
“차앗!”
“이럇!”
잠시 후 뿌연 흙먼지를 피워 올리며 전투마와 이야크가 동쪽으로 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