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
서로군벌 병력과 대천신군 1천5백 명이 동쪽으로 진군하고 북로군벌 병력과 마계10군단 1천 명과 블러드 데빌단 3백여 명이 남쪽으로 진격을 시작한 그 시각. 그들과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남쪽으로 길을 재촉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콰라 공작령에 예속돼 있던 25개 영지 연합군이었다.
25개 영지 연합군의 병력은, 볼삭과 접경 지역으로 나가 있는 전력을 제외한 나머지로 기사 3만 명, 병사 20만 명, 총 23만 명이었다.
그들을 이끌고 있는 자는 헤티스 영지의 영주 몬슨 후작이었다.
“얼마나 남았는가?”
몬슨 후작은 옆을 바라보았다.
전투기갑을 걸친 채 말을 몰고 있는 자는 부사령관인 헤론 영지의 헤론 백작이었다.
“지금 속도로 가면 하루면 도착할 겁니다.”
헤론 백작의 대답은 퉁명스러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헤란 백작은 영지 연합군의 벨라 진격을 결사반대하였고, 다수결에 밀려 벨라로 향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아직도 기분이 풀리지 않은 게요?”
“기분 문제가 아니라 생존 문젭니다.”
“어떤 생존 말이요?”
“북로군벌과 서로군벌을 합치면 70만 명입니다. 우린 지금 벨라로 쳐들어갈 게 아니라 그들을 감시해야 할 땝니다.”
“그들에게는 황제의 칙사가 갔다는 사실을 잊은 겐가?”
“하다르만 백작과 이코스트 백작이 후작 작위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는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특별한 자들이 아니라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보통 사람들이오.”
“받아들일 수밖에 없단 말입니까?”
“나는 확신하오.”
“그랬으면 좋겠군요.”
헤론 백작은 전면을 바라보았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바로 그때였다.
전방을 정찰하러 나갔던 기사들이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기사는 곧바로 몬슨 후작 앞으로 달려갔다.
“무슨 일인가?”
몬슨 후작이 물었다.
“적입니다.”
“적?”
“10킬로미터 전방 히부스 산에 드보르칸 기사단과 마법단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정말인가?”
몬슨 후작의 얼굴이 황당하게 변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그는 드보르칸 후작이 성문을 굳게 닫고 대항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수십 킬로미터를 나와 진영을 구축한 채 전투 준비를 하고 있다니.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그러고 적장은 드보르칸 후작이 아닙니다.”
“하면?”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대공입니다.”
“끄응!”
몬슨 후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대공.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자가 있다는 사실조차도 몰랐다. 그런데 최근 들어, 대화에 등장하는 횟수가 부쩍 늘어난 인사다. 얼굴조차 보지 못해 어떤 사람인지 알 수는 없지만 자꾸만 거슬렸다.
“어떤 자인지 아는가?”
몬슨 후작은 고개를 돌려 헤론 백작을 보며 물었다. 김필도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에 대해 아는 건 두 가집니다.”
“말해 보시오.”
“문 대륙에서 일어난 일인데, 차원 수리공으로 갔던 기사들은 그보다는 펠톤 헬모트 자작을 더 따랐던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사소한 일로 인해 다툼이 생겼고, 대공은 자기를 향해 무기를 뽑는 놈은 죽이겠다고 엄포를 놓았답니다.”
“기사들이 그의 말을 듣지 않았겠군.”
“그렇습니다. 기사들 중 한 명이 ‘네가 어쩔 건데?’하는 얼굴로 검을 뽑은 모양입니다. 대공이 액션을 취하면 실수라고 둘러댈 생각이었답니다.”
“그런데?”
“검을 뽑은 자는 몰튼이란 기산데, 대공의 이야크 창에 죽었답니다.”
“정말로 죽여버렸단 말인가?”
“죽이고 나서 실수였다고 했답니다.”
“같은 방법은 되돌려주었구먼.”
“그렇습니다. 그리고 만남의 광장에서는 헬모트 공작가의 기사와 싸움이 있었는데, 헬모트 공작의 호위 기사 여섯 명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답니다.”
“헬모트 공작 앞에서 그들을 죽였단 말인가?”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헬모트 공작을 향해 ‘자네’라고 했답니다.”
“헐!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이구먼.”
헬모트 공작이 누군가. 발탄 제국에서 황제 다음으로 강한 권력을 지닌 자다. 아무리 대공이라고 해도 ‘자네’라고 부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 벨라로 쳐들어갈 생각을 한 사람도 그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공의 머리에서 나온 작전이란 말인가?”
“벨라 기습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작전이 아니니까요.”
“맞네. 아주 무모하고 바보 멍청이 같은 짓이었네.”
“하지만 그분은 성공했습니다.”
“우리가 없다면 성공했다고 할 수 있겠지.”
“문제는 그가 우리 정도는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겁니다, 후작.”
“그게 무슨 소린가?”
“조금 전 정찰 기사의 보고를 받지 않았습니까?”
“우릴 겁냈더라면 10킬로미터 전방에 진영을 구축할 리가 없다는 말인가?”
“우릴 떠보려고 나와 있진 않을 거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자네?”
몬슨 후작은 고개를 돌려 헤론 백작을 보았다.
문득 헤론 백작이 조금 전부터 대공을 ‘그분’이라 칭하고 있다는 사실이 스쳐 갔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분과 같은 작전을 구사할 수 없거든요.”
“존경하다는 말인가.”
“존경한다기보다는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는 게 맞을 겁니다.”
“신선한 느낌?”
“가진 거라고는 몸뚱이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 대륙 최고 권력을 지닌 공작을 향해 ‘자네’라고 칭해 모욕을 주고 다른 공작은 목을 따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호기심이란 말이군.”
“그럴지도요.”
투구 속 헤론 백작의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어렸다.
둥! 둥! 둥! 둥! 둥!
3만의 기사가 탄 말의 말발굽 소리와 20만 병사의 발자국 소리를 누르고 북소리가 들려왔다.
몬슨 후작은 고개를 들었다.
멀리 야트막한 산이 눈에 들어왔다. 아비라와 벨라 사이에 있는 히부스 산이었다. 드보르칸 기사단과 마법단은 산속에 숨어 있는 듯 이곳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몬슨 후작은 앞으로 나아가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기사와 병사들은 발을 맞추며 천천히 히부스 산을 향해 다가갔다.
“백작!”
몬슨 후작은 헤론 백작을 불렀다.
“말씀하십시오.”
“바로 밀어버리시오.”
2천여 명밖에 되지 않는 자들인데 진영을 구축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해일처럼 밀어붙여 단번에 끝장을 내야 할 터였다.
“알겠습니다.”
둥둥둥! 둥둥둥! 둥둥둥!
“적이다!”
“적이 나온다!”
북소리가 급박해지더니 히부스 산으로부터 기사와 마법사들이 걸어 나와 정렬하기 시작했다.
“으음!”
헤론 백작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산에서 걸어 나온 자의 수는 1천4백여 명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 20미터 상공에 떠 있는 마법사 5백 명이 주는 위압감은 엄청났다.
그들은 일반 마법사와 달랐다. 보통 마법사는 로브를 입고 마법 지팡이를 드는데, 허공에 떠 있는 5백 명은 갑옷을 걸치고 허리에 검을 차고 있다.
그런 마법사들의 모습이 로브를 걸친 것보다 더 강한 인상을 풍겼다. 그 인상이 얼마나 강한지 과연 저들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헤론 백작은 얼른 고개를 돌려 아군을 보았다.
아군의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었다. 그제야 비로소 마음이 진정됐다.
그는 다시 전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적진을 천천히 훑던 그의 시선이 적진 선두에서 멈췄다.
“프리우스 대공!”
헤론 백작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검은 전투기갑을 착용하고, 검은색 이야크를 타고 있는 그의 모습은 위쪽의 마법사들만큼이나 위압적이었다.
제9장 전쟁
“후작!”
김필도는 뒤편 허공에 떠 있는 드보르칸 후작을 불렀다.
“샤우트 마법은 이미 발동 중입니다. 말씀하시면 됩니다.”
“고맙소.”
김필도는 블랙칸을 몰아 앞으로 나아갔다.
그가 움직이자 뒤편 허공에 있던 마법사들이 일제히 앞으로 이동했다.
1백 미터를 나아간 김필도는 블랙칸을 멈췄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나는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대공이다!”
샤우트 마법이 걸린 그의 목소리는 영지 연합군 진영으로 파고들어 갔다.
“나에게 대공 자리를 내린 분은 발탄 제국 황제 폐하시고, 대공의 신분은 분명 공작보다 높다. 그런데 이콰라란 놈은 제 아들놈에게 나를 가리키며 독기를 품은 개나 골이 잔뜩 난 소와는 말을 섞지 말라고 하였다. 외조부께서 황제를 지냈던 나는 졸지에 독기를 품은 개가, 골이 난 소가 된 것이다. 너희들이 나와 같은 입장이었다면 참을 수 있겠느냐?”
영지 연합군 진영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김필도는 말을 이었다.
“나는 이콰라 그놈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아니 이콰라 그놈뿐만이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 작은 부탁도 하지 않았다. 돈을 달라고 한 적도 없고, 영지를 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놈들은 ‘가진 것도 없는 대공이 건방지다며’, ‘그림자 대공이 싸가지가 없다는’, ‘대공이 감히 공작을 똑바로 쳐다본다는’ 등의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들어 날 모욕 주고, 죽인다고 협박하고, 내 앞에서 검을 뽑았다. 너희들이 내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공작 놈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릴 수 있는 자나, 공작 놈의 호위 기사 앞에 목을 길게 늘일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이 앞으로 나와라. 그럼 그자에게 기꺼이 내 머리를 잘라주겠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영지 연합군 진영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김필도의 말이 맞기도 했지만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당신은 이콰라 공작을 비롯한 그의 가족을 살해했소. 동맹 영지의 수장으로서 그의 복수를 해주지 않을 수 없소이다.”
다만 영지 연합군의 수장인 몬슨 후작만 입을 열었다.
가만두면 김필도의 언변에 휘말릴 소지가 있다고 판단하여 한 말이었다.
“이콰라 그놈을 살해한 게 아니라 우린 이콰라 공작가와 전쟁을 치렀고, 승리했다, 몬슨 후작.”
“선전포고도 없는 기습 공격은 전쟁 행위로 간주되는 게 제국령이오, 대공. 게다가 도시를 불태우는 행위는 약탈로 간주되오!”
“하면 볼삭 영지는 어떻게 설명할 테냐? 볼삭 영지는 기습 공격을 당했고, 자리를 비웠던 드보르칸 영주를 제외한 나머지 영주는 대부분 가족과 함께 처형됐다. 너희들의 기준에 의하면 그건 전쟁 행위가 아니라 약탈에 해당한다. 그런데 너희들은 전쟁이 아닌 약탈을 감행한 하다르만 백작과 이코스트 백작을 승자로 인정했을 뿐 아니라 후작 작위까지 하사했다. 그 부분에 대해 설명을 듣고 싶다, 후작.”
“그들을 승자로 인정한 건 내가 아니라 황제 폐하요.”
“너희들과는 상관없단 말이냐?”
“그렇소.”
“좋다. 그럼 나도 말하겠다. 내가 벨라를 점령한 건 이콰라 공작과 나의 개인적인 원한 때문이다. 너희들과는 상관없으니까 물러가라!”
“물러가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거요?”
“전부 죽어!”
김필도는 블랙칸 오른편 안장에 끼워두었던 이야크 창을 들어 몬슨 후작을 겨냥했다.
“감히!”
몬슨 후작의 눈초리가 사정없이 치켜 올라갔다.
“드보르칸 후작!”
김필도는 위쪽에 있는 드보르칸 후작을 불렀다.
“알겠습니다, 대공 전하.”
고개를 끄덕인 드보르칸 후작은 아공간을 열고 천에 싼 물건 두 개를 꺼냈다. 그러고는 몬슨 후작 일행 앞으로 던졌다.
턱! 턱!
떨어지자마자 천이 풀리며 내용물의 정체가 드러났다.
“헉!”
“음!”
“으음!”
영주들은 물론이고 앞쪽에 있던 이들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두 물체는 다름 아닌 이콰라 공작과 그의 두 아들의 머리였다.
“난 한 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몬슨 후작. 그리고 자비의 시간은 끝났다.”
김필도는 멈췄던 블랙칸을 다시 몰아갔다.
블랙칸은 천천히 나아갔다.
“폭풍의 전사 라쿤은 수신호위를 따라라!”
쿠다는 뒤편을 바라보며 고함을 내질렀다.
“헨과 다르는 전투기갑을 착용하라!”
이어 리시아의 외침이 터져 나오고 그녀 뒤편에 있던 8백여 명이 일제히 가슴에 손을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