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
드보르칸 후작은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태양은 완전하게 산 너머로 모습을 감추고, 급하게 어둠이 밀려들었다.
“시작하라!”
그는 우렁차게 고함을 내지르며 아래를 향해 파이어 볼을 쏘았다.
7클래스 마법사가 쏘아낸 거대한 파이어 볼이 신호였다. 히부스 산 주위로 흩어졌던 다른 마법사들도 일제히 아래를 향해 파이어 볼을 쏘았고, 히부스 산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히부스 산에 불길이 오르자 몬슨 후작은 질겁했다.
드보르칸 후작의 약점이 있을 걸로 믿었던 히부스 산이 함정이었던 것이다.
“얼마나 들어가 있는가?”
몬슨 후작은 보고를 하러 온 백터스 백작을 보며 물었다.
“2만 명가량이 들어갔습니다.”
“으음!”
몬슨 후작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2만 명이면 전체 병력에 비하면 10분의 1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적의 병력은 산으로 들어간 아군 병사의 10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산으로 들어간 병사를 잃는다는 건 남은 병사들의 사기에 치명적이 될 수밖에 없다.
“더 밀어붙이게.”
몬슨 후작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네?”
백스터 백작은 깜짝 놀란 얼굴로 몬슨 후작을 보았다. 2만 명이 불에 타 죽게 생겼다. 그런데 총사령관인 몬슨 후작은 병력을 더 투입하라고 주문한 것이다.
“만일 지금 놈들을 잡지 못하면 이번 전쟁에서 패할 뿐 아니라, 전쟁을 수행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지네.”
“알겠습니다, 총사령관님!”
백스터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몬슨 후작의 말이 맞다. 승리까진 아니더라도 히부스 산에서 적을 몰아내기는 해야 한다. 백스터 백작은 뒤편에 대기 중인 전령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불을 끄면서 진격한다! 병사들은 불을 꺼라! 기사들은 길을 터라! 궁병의 목표는 마법사들이다!”
“히부스 산으로 진격하라!”
“히부스 산으로 진격하라!”
영지 연합군 진영의 좌우측에서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오고, 영지 연합군 기사와 병사들이 다시 히부스 산을 향해 밀려갔다. 그들의 선두에는 불을 끌 병사 5천 명이 늘어섰고, 그들 후미에는 1만 명의 기사가, 그리고 기사 뒤에는 1만 명의 궁병과 3만의 병사가 섰다.
척! 척척! 척척! 척척!
한편에 5만5천 명씩 총 11만 명의 병력이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거대한 해일이 밀려가는 것 같았다.
제10장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란 이름을 찾고 싶네
“역시 후퇴를 해야 하는 건가?”
김필도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는 히부스 산으로 들어간 병사들을 태워 죽이고 기갑 기사를 처리하면 적이 일단은 물러날 거라고 여겼다.
영지 연합군이 물러나면 벨라로 이동하여 전열을 가다듬은 다음 3단계 작전을 펼칠 생각이었다.
그런데 영지 연합군은 물러나지 않고 더 강한 기세로 히부스 산을 향해 밀려가고 있다.
이렇게 되면 목숨을 건 사투밖에 없고, 사투 끝에 남는 건 아군의 전멸이다.
아군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23만 명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다는 건 무리다.
“리시아 양!”
김필도는 리시아를 불렀다.
“말씀하세요.”
김필도 주변을 맴돌며 영지 연합군 기갑 기사를 도륙하던 리시아는 아래로 내려왔다.
“후퇴해야겠어요.”
“한번 밀리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거예요.”
“그렇다고 해도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어요. 표시 나지 않게 천천히 물러나세요.”
“알았어요!”
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베른을 불렀다.
그리고 잠시 후 김필도 일행은 히부스 산을 향해 물러났다. 표시나지 않게 퇴각한다고 하지만 전황을 주시하고 있던 백스터 백작과 몬슨 후작이 모를 리가 없었다.
“작전이 성공한 것 같습니다, 총 사령관님!”
백스터 백작은 환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런 것 같소, 백작. 드디어 이콰라 공작의 복수를…….”
“몬슨 후작, 나네.”
바로 그때 몬슨 후작의 품속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몬슨 후작은 황급히 통신 마법구를 꺼냈다.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황제였던 것이다.
“접니다, 폐하.”
몬슨 후작은 통신 마법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
“이콰라 공작과 그의 가족을 살해한 자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전투 중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당장 전투를 중지하게.”
“네?”
몬슨 후작은 깜짝 놀랐다.
지금 전투는 단순한 영지전이 아니라 헬싱턴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전투다. 황제 또한 그걸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전투를 중지하라니.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북쪽과 서쪽에서 적이 침략해 오고 있네.”
“이코스트 백작과 하다르만 백작이 다시 움직이고 있단 밀입니까?”
“그들뿐만이 아니네. 마족과 천족 수천 명이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네.”
“마, 마족과 천족이라고요?”
몬슨 후작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래서 전투를 중지하라고 한 거네. 드보르칸 후작이 있는 벨라는 일단 봉쇄하고,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도록 하게.”
“북로군벌은 누가 막습니까?”
“공작들이 막기로 했네.”
“알겠습니다, 폐하!”
통신을 끊은 몬슨 후작은 백스터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물었다.
“만일 우리가 퇴각할 경우 놈들이 어떻게 나올 것 같소?”
“우리를 쫓아올지 그걸 알고 싶은 겁니까?”
“그렇소.”
“우리를 쫓아 나올 경황은 없을 겁니다.”
“가서 부사령관을 불러오게.”
“알겠습니다, 총사령관님.”
백스터 백작은 뒤편에 서 있는 부관에게 지시를 내렸다. 잠시 후 전투기갑을 걸친 헤론 백작이 말을 몰아왔다.
“날 사령관으로 인정하는가?”
몬슨 후작은 헤론 백작을 보며 물었다.
“인정하지 않았다면 부하들을 데리고 떠났을 겁니다.”
“다시 부사령관으로 복직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총사령관님.”
“조금 전에 황제 폐하로부터 연락이 왔네.”
“어떤 소식이 왔습니까?”
“하다르만 백작과 이코스트 백작이 병력을 이끌고 헬싱턴으로 향했다고 하네.”
“협상이 실패로 돌아간 겁니까?”
“그런 모양이네. 문제는 북로군벌과 서로군벌의 병력이 아니라 그들 속에 있는 마족과 천족들이네.”
“마족과 천족도 개입하고 있는 겁니까?”
“그렇다고 하네.”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황제 폐하께서 우리 영지 연합군은 서로군벌을 맡아달라고 하였네. 그래서 별수 없이 지금부터 우린 철수 작전을 시작할 거네.”
“철수 작전이란 말입니까?”
헤론 백작은 의아한 얼굴로 몬슨 후작을 보았다.
내내 밀리다가 이제 막 승기를 잡았다. 그가 생각하기엔 지금은 철수할 때가 아니라 더 거칠게 공격해서 끝장을 낼 때였다.
“그러네. 그런데 문제는 루시안 아이작 그자가 가만있을 거냐 하는 거네.”
“누군가 남아서 그들을 막아야 한다는 말이군요.”
헤론 백작은 몬슨 후작이 자신을 복직시킨 이유를 그제야 알아차렸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영지 연합군이 철수할 동안에 뒤쫓아 올 자들을 막아줄 방패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일을 해줄 사람은 백작밖에 없네.”
“우리 헤론 영지 병력으론 그들을 막을 수 없습니다, 총사령관님.”
“우리에게 필요한 건 철수할 시간이네, 백작. 철수가 끝날 때까지만 놈들을 붙잡고 있으면 되네.”
“우리를 버리겠다는 말이군요.”
“헤론 영지 영지군을 버리는 게 아니라 헬싱턴을 구하기 위해서네. 우리가 구할 헬싱턴에는 헤론 영지도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해주겠는가?”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고맙네, 백작.”
고개를 끄덕인 몬슨 후작은 백스터 백작을 돌아보았다.
“철수합니까?”
“천천히 철수시키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총사령관님!”
고개를 숙인 백스터 백작은 전령이 있는 곳으로 말을 몰아갔다. 그로부터 30분 후, 영지 연합군은 천천히 철수했다. 하지만 김필도는 쫓으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영지 연합군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함부로 추격 명령을 내릴 수가 없었다.
영지 연합군 측의 철수는 2시간에 걸쳐 계속됐고, 헤론 영지 영지군을 제외한 나머지 병력은 히부스 산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지점까지 물러났다.
헤론 영지 영지군은 기사 2천, 병사 4만 명이었다.
“왜 저러는 거죠?”
리시아는 벌판을 바라보며 물었다.
사실 조금 전엔 아군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만일 영지 연합군이 좀 더 강하게 밀어붙였더라면 아군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을 것이다.
물론 드보르칸 기사단과 마법단은 벨라로 오겠지만 용병들은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1시간에서 2시간 정도만 밀어붙이면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는데, 물러나버린 것이다.
“드보르칸 후작이 돌아오면 알겠지요.”
김필도 또한 영지 연합군의 상황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다.
그때 적진으로 갔던 드보르칸 후작과 그의 딸 올가 드보르칸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떻소?”
“북로군벌과 서로군벌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다시 전쟁을 시작한 거요?”
“그렇습니다. 이미 접경 지역까지 들어와서…….”
“접니다, 대공 전하.”
“잠깐만 기다리시오.”
품속에서 샤일록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김필도는 드보르칸 후작의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통신 마법구를 꺼내 마나를 주입했다.
“영지 연합군이 그쪽으로 가는 것 같던데 괜찮습니까?”
샤일록이 물었다.
“한바탕 전투를 치렀어.”
“우리가 패하기 직전이었는데, 갑자기 물러가는 바람에 한숨 돌리는 중이야.”
“불행 중 다행이군요.”
“아는 거 있어?”
“북로군벌과 서로군벌이 헬싱턴을 향해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규모는?”
“북로군벌은 30만, 서로군벌은 40만 병력입니다.”
“전부 다 동원한 거네?”
“그렇습니다.”
“영지는 방어할 생각이 없나 보지?”
“점령지의 병력을 북로군벌과 서로군벌에 편입시켜서 방어를 맡긴 상탭니다.”
“그럼 그들 때문에 영지 연합군이 물러간 거라고 봐야 하는 건가?”
“아니면 그들과 함께 움직이는 천족과 마족 때문이던가요.”
“천족과 마족?”
“서로군벌에는 천족의 대천신군 1천5백여 명이 있고, 북로군벌에는 마계10군단 1천여 명이 있습니다.”
“세이아칸도 들어왔어?”
김필도는 심장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자가 서로군벌의 실질적인 지휘관입니다.”
“드디어 왔네. 그럼 북로군벌은?”
“마계10군단 단장 데메우스와 칼베리언이란 자가 지휘를 맡고 있습니다.”
“다 들어왔네.”
김필도 얼굴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웃는 얼굴과는 달리 그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식량은 어느 정도 확보했지?”
“제국에서 유통되는 식량의 30퍼센트는 현물로 구입했고, 내년에 생산될 식량은 50퍼센트가량 선금을 주고 계약을 마쳤습니다.”
“북로군벌과 서로군벌의 식량 상태를 확인하고 접촉을 시도해 봐.”
“그렇지 않아도 북로군벌과 서로군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
“아직 접촉 전입니다.”
“일단 만나 봐.”
“그들이 원하는 건 식량입니다, 전하.”
“가격만 맞으면 넘겨.”
“그들은 대공 전하의 적입니다. 더구나 세이아칸 그잔…….”
“장사꾼은 적과 아군을 구분하면 안 되는 거야, 샤일록. 장사꾼은 오직 돈만 좇으면 되는 거야. 그 외의 나머지 것은 잊어.”
“전하!”
“그리고 가급적이면 그들과 신뢰를 쌓아 놔.”
“신뢰라면?”
“단골로 만들라는 말이야.”
“그러니까 그들이 식량을 구입할 수 있는 경로를 제 한 곳으로 집중하게 하란 말입니까?”
“내가 그래서 자넬 좋아해.”
“알겠습니다, 대공 전하.”
“그리고 워프 마법이 걸린 스크롤을 구해서 라파로 와.”
“라파로 가실 생각입니까?”
“아비라에 들렀다가 갈 생각이야.”
“알겠습니다.”
“내가 라파로 간다는 소문도 내야 해.”
“그들을 끌어들일 참입니까?”
“환영식은 해줘야 하잖아.”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봐.”
“수고하십시오, 대공 전하.”
샤일록의 얼굴이 사라지자 김필도는 통신 마법구를 품속으로 집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