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
“그게 가능해요?”
리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개를 돌렸다.
“뭐가요?”
“그 짧은 시간에 대륙에서 유통되는 식량의 30퍼센트를 사들이는 게 가능하냐고요?”
“전국에 카판숍이 퍼져 있잖아요.”
“그러니까 카판숍을 통해서?”
“그렇죠.”
“그런 방법이 있었네요. 그런데 소문을 내라는 건 무슨 말이죠?”
조금 전 소문을 퍼뜨리라고 하였던 말이 떠올라 물었다.
“문득 놈들이 휴도니아 대륙으로 급하게 넘어온 이유가 떠올랐거든요.”
“그들이 급하게 넘어온 이유?”
“정규군의 출병은 어떤 절차를 걸치죠?”
“통수권자의 결재가 있어야 해요.”
“통수권자의 결재를 받으려면 필요한 건 뭐죠?”
“반드시 출병해야 하는 명분이 있어야 해요.”
“좋아요. 그럼 결재를 받은 자가 세이아칸과 데메우스라고 해요. 그들이 출정 명령을 얻어낸 명분은 뭘까요?”
“글쎄요…….”
리시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이 휴도니아 대륙으로 올 만한 명분은 없었다.
“이거예요.”
김필도는 착용하고 있는 전투기갑을 가리켰다.
“헤를리온이라고요?”
“신마전쟁은 서로 상잔해서 종식된 게 아니고 헬칸이 이끄는 5천 명의 헬에 의해 끝난 건 알죠?”
“헬칸과 카라에 의해 리모스를 사수하던 1천 명의 결사대도 죽었다는 말까지 해줬잖아요.”
“그때 헬칸과 카라가 착용했던 전투기갑이 바로 헤를리온이에요.”
“그러니까 헤를리온 두 벌이 천족, 마족, 인간, 엘프, 드워프의 최고 전사로 구성된 결사대 1천 명을 없앤 원동력이란 말인가요?”
“그런 헤를리온을 대량으로 생산해내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들의 목표는 루시안 공자군요.”
“내가 아니고 헤를리온이죠.”
“그러니까 루시안 공자는 천족과 마족을 테라 쪽으로 끌고 가겠다는 거죠?”
“그럼 황제는 제국군을 동원해서 그들을 막을 수밖에 없죠.”
“천족과 마족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지금 들어온 자들로는 발탄 제국과 싸워서 승리할 수 없으니까…….”
“많이 죽게 될 거예요.”
“그렇게 되면 천계와 마계에 있는 자들 중 전쟁을 원하는 누군가는 인간들에게 죽은 동료의 복수를 해야 한다며 전쟁을 부추길 테고…….”
“전쟁은 점점 확대되겠죠.”
“어쩌면 휴도니아 전체가 전쟁터로 변할 수도 있겠군요.”
“이제 알았어요?”
“네.”
리시아는 김필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전 황제 자리엔 관심 없어요.”
“그럼 뭘 원하죠?”
“나는 심심할 때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을 뿐이에요.”
“장난감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것치고는 사건이 너무 크네요.”
“그래야 머릿속 깊이 각인돼서 잊지 않죠.”
김필도는 빙긋 웃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드보르칸 후작을 보았다.
드보르칸 후작은 지금 정신이 없었다.
김필도가 착용하고 있는 저 갑옷이 헤를리온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 전투기갑이 정말로 헬칸이 착용했던 그 헤를리온입니까?”
드보르칸 후작은 확인하듯 물었다.
“이 검의 주인도 헬칸이라면 기절하겠네?”
“정말입니까?”
“맞아. 이 녀석이 왜 마계 오테르 가문의 검이 됐는지는 모르지만 헬칸이 사용했던 카이가 맞아.”
“이거 아무래도 줄을 잘못 선 것 같습니다.”
드보르칸 후작은 부르르 떠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행동만 그럴 뿐 그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줄을 잘못 섰다면서 웃는 건 또 뭐야?”
“그러게 말입니다. 자꾸 웃음이 나옵니다.”
“좋기도 하겠다. 그건 그렇고, 전부 나오라고 해.”
김필도는 뒤편을 가리켰다.
“알겠습니다.”
드보르칸 후작은 뒤편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잠시 후 헨, 다르, 폭풍전사 라쿤, 드보르칸 기사단 소속 기갑 기사가 김필도 뒤편으로 늘어서고, 마법사들은 플라이 마법을 펼쳐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기사와 용병들이 맨 후미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 있습니다, 마스터!”
쿠다는 블랙칸의 고삐를 김필도에게 건넸다.
“고마워.”
김필도는 고삐를 잡고 블랙칸에 올랐다.
“전진해!”
김필도는 헤를리온을 해제하고는 헤론 영지군 진영을 향해 블랙칸을 몰아갔다. 헤론 백작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김필도 일행을 보았다.
많은 희생이 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투를 처음 시작했을 때와 별반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어쩔 수 없지.’
“준비하라!”
헤론 백작은 낮게 소리쳤다.
그러자 2천 명의 기사가 일제히 무기를 뽑은 채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전부 죽고 싶은 모양이지?”
“으음!”
나직한 목소리가 전방에서 들려오자 헤론 백작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병력은 아군이 월등히 많다. 하지만 인원수만 많은 뿐,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기갑 기사의 수는 절반도 되지 않는다. 더구나 저들은 23만 명이나 되는 영지 연합군을 향해 아무런 두려움 없이 달려든 자들이 아닌가.
“난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다!”
헤론 영지 연합군 20미터 건너편에 선 김필도는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헤론 영지 영주 미하이 엘라소 헤론 백작이오.”
“백작, 자넨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어. 첫 번째는 우리와 싸우다 전부 죽는 거고, 두 번째는 부하들을 이끌고 돌아가는 거야.”
“저는 드보르칸 후작의 병력이 벨라를 벗어나는 걸 봉쇄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계속 그곳에 있겠다는 거야?”
“어쩔 수 없습니다.”
“백작, 자네가 우릴 막아서다가 죽으면 헤론 영지 영지민은 누가 지켜주지?”
“그들은 총사령관이 지켜줄 겁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
헤론 백작은 이번엔 대답을 못했다.
“난세가 오고 있어. 제국이 안정됐을 땐 주위 영지들의 도움을 기대할 수 있겠지만 난세가 오면 달라져. 누구도 헤론 영지를 도와주지 않아. 자기 가족은 자기가 지키는 수밖에 없어.”
“그래도 난…….”
“5분 주겠다, 백작. 그 안에 말을 돌려서 헤론 영지로 돌아가든지, 영지 연합군을 쫓아가든지 해라. 5분 후까지 그곳에 있으면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이 전부 죽일 것이다.”
김필도는 차갑게 말하곤 블랙칸을 돌려 그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5분 후에 공격을 시작할 것이다!”
자리로 돌아온 김필도는 크게 소리치고는 헤를리온을 착용했다.
“라슨!”
헤론 백작은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말씀하십시오.”
“노 기사 한 명이 고개를 숙였다. 그는 헤론 기사단 단장인 라슨 남작이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우리가 승리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영지 연합군으로 돌아가잔 말이오?”
“영지 연합군으로 돌아가게 되면 몬슨 후작은 하극상의 죄목으로 영주님이 가진 모든 권한을 박탈할 겁니다. 몬슨 후작이 영주님으로부터 박탈할 권한 중에는 우리 헤론 기시단과 영지군에 대한 지휘권도 포함돼 있을 겁니다. 문제는 영주님의 지휘를 받지 못한 상태가 됐을 때 우리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겁니다.”
“진형의 선봉에 배치되겠지.”
“우리를 기다리는 건 전멸밖에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잔 말인가?”
“말머리를 돌린다면 영지 연합군 쪽이 아니라 헤론 영지로 가야 합니다.”
“헤론 영지로 돌아가면 배신자의 낙인이 찍힐 거네.”
“배신자로 낙인은 찍히겠지만 영지민을 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지 연합군으로 가면 영지민도 구하지 못하고 개죽음을 당하게 될 겁니다.”
“시간 다 됐다, 백작!”
그때 김필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철수하게!”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영주님!”
라슨 남작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잠시 후 헤론 영지군은 철수를 시작했다.
김필도는 블랙칸을 몰아 앞으로 나왔다. 그때까지도 헤론 백작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대공 전하께서는 뭘 원하십니까?”
헤론 백작은 물었다.
“그림자가 아닌 진짜 대공이 되고 싶네. 남작 놈에게 비웃음을 당하지 않는 대공이 되고 싶네. 공작 놈이 이놈 저놈 하지 않는 대공이 되고 싶네.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란 이름을 찾고 싶네.”
“그렇군요.”
헤론 백작은 김필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만나서 반가웠네.”
“저도 그렇습니다. 그럼.”
헤론 백작은 고개를 숙이고는 말을 돌렸다. 곧 그는 헤론 기사단 기사들과 함께 어둠 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베른!”
헤론 백작을 바라보던 김필도는 베른을 불렀다.
“네!”
베른은 이야크를 몰아 앞으로 나왔다.
“전에 내가 내린 명령 기억해?”
“니드 수장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하셨던 명령 말입니까?”
“응!”
“일이 너무 급박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헨은 아비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곳으로 바로 왔습니다.”
“나와 리시아 양은 10일 후에 아비라로 들어갈 거야.”
“그때까지 명령을 이행하겠습니다.”
“바로 출발해.”
“알겠습니다, 대공.”
베른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10분 후, 기갑 기사 진영에서 3백 명의 기갑 기사가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려 갔다.
“우리도 가지.”
김필도는 블랙칸을 몰아 벨라로 향했다.
그런 김필도 일행을 가만히 바라보는 자가 있었다.
커다란 바위 아래쪽에 숨어 어둠에 동화된 채 김필도 일행을 바라보던 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동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한참을 내달리던 사내는 김필도 일행이 더 이상 보이지 않자 그 자리에 멈췄다.
“워프!”
나직한 목소리에 이어 마법 스크롤을 찢는 소리가 흘러나오더니 환한 광채가 사내의 몸을 감쌌다. 이윽고 사내의 모습이 벌판에서 사라졌다.
마법 스크롤을 이용해서 이동 마법을 펼쳤던 사내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아비라의 저택 안이었다.
그는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곧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
“돌아왔습니다, 가주님!”
방으로 들어간 사내는 등을 돌리고 앉은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놈이 맞더냐?”
“제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행선지는 알아냈느냐?”
“이곳 아비라로 온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내가 제대로 온 셈이구나.”
“10일 후에 도착한답니다.”
“10일 후란 말이지…….”
사내는 낮게 중얼거리며 몸을 돌렸다. 눈동자에서 싸늘한 광채를 쏟아내는 이 사람은 김필도의 목을 자르기 위해 어둠의 상단 전 전력을 이끌고 나온, 7클래스 마스터 헤이먼 샤칸 미들헤임이었다.
“기다리고 있겠다, 놈!”
헤이먼은 주먹을 지그시 말아 쥐었다. 그러자 죽음의 살기로 변한 마나가 그의 몸 주변에서 아지랑이처럼 넘실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