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
제1장 궁금한 게 아주 많아
모골이 송연하다. 온몸이 따끔따끔하며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최고의 긴장 상태를 나타내는 증상이었다.
보통 이와 같은 증상은 누군가를 없애기 직전에 나타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임무 수행 중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증상이 나타난다는 것은?
“내가 표적이 됐다는 말이네.”
벨프스 중얼거렸다.
그가 있는 곳은 좌우측에 건물 외벽이 성벽처럼 이어져 있는 길 중앙이다. 살인자를 잡았다는 부하의 보고를 받고 가는 중이었다.
길의 폭은 6미터.
그는 천천히 좌우를 살폈다. 짙은 어둠만 보일 뿐 위협이 될 만한 건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벨프스는 저 어둠 속 어딘가에 어쌔신이 숨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벨프스다!”
벨프스는 낮게 소리쳤다.
벨프스란 이름에는 대륙 5대 어쌔신 중의 한 명인 ‘은밀한 죽음 벨프스’란 의미와, 제국 최강 어쌔신 길드인 니드(Need)의 부길드장이란 의미가 함께 내포돼 있다.
즉 너희들이 함부로 건드릴 사람이 아니니까 물러가라는 경고가 담긴 외침이었다.
벨프스는 잠시 동안 기다렸다.
그러나 곤두선 솜털이나 온몸의 따끔거림, 그리고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은 여전히 그대로다.
“우리 니드의 어쌔신들을 없앤 자들이 너희들이었더냐?”
이제야 놈들의 정체를 알 듯하다.
니드의 어쌔신들이 의문의 죽임을 당한 건 5일 전부터다. 첫날 2백 명이 죽임을 당했고, 둘째 날은 3백 명, 셋째 날은 5백 명이 죽임을 당했다.
무려 3일 만에 1천 명의 어쌔신이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비상이 떨어진 건 당연했다.
니드는 그들이 지닌 역량을 총동원하여 치밀하게 조사했다. 가장 의심스러운 자들은 니드 다음으로 많은 어쌔신을 보유하고 있는 윈드(Wind)였다.
하지만 윈드에서는 어떤 혐의점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던 와중에 그제와 어제 다시 3백 명씩 죽임을 당했다. 이제 남은 어쌔신의 수는 4백여 명.
어이없게도 제국 최강 어쌔신 길드가 단 5일 만에 멸망 직전까지 가고 만 것이다.
“맞다.”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크로스 보우를 든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벨프스는 눈을 가늘게 모았다.
“넌?”
벨프스는 깜짝 놀랐다.
놀랍게도 검은 옷을 걸친 사내는 윈드의 길드장 도먼이었다. 도먼 또한 제국 5대 어쌔신의 한 명으로 닉네임은 ‘죽음의 속삭임’이었다.
“오랜만이구나, 벨프스.”
도먼은 싱긋 웃었다.
“우린 너희들도 조사했다. 아니 설사 너희들이 우릴 공격했다고 해도 5일 안에 그런 엄청난 일을 해내는 건 불가능하다!”
벨프스는 믿을 수가 없었다.
윈드의 전력은 니드의 절반에 불과했다. 그런 자들이 니드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간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우린 참여하지 않았어.”
“그럼?”
“우리가 파악하고 있던 명단만 그들에게 넘겨줬을 뿐이다.”
“그들?”
“저승으로 가면 저절로 알게 될 거다.”
벨프스는 크로스 보우의 방아쇠를 당겼다.
휙!
쿼럴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벨프스는 오른편으로 몸을 날렸다.
제국 5대 어쌔신 중의 한 명에 꼽힌 실력은 유감없이 발휘됐다. 벨프스는 10미터 앞에서 날아온 쿼럴을 간발의 차이로 피했다. 그는 급하게 은신술을 펼쳐 허공으로 녹아들어 갔다. 그러고는 건물 처마 밑으로 몸을 날렸다.
척!
그는 처마 기둥을 붙잡음과 동시에 모든 기척을 죽였다.
푸욱!
“컥!”
살갗을 뚫고 들어가는 섬뜩한 소성과 함께 벨프스의 입이 쩍 벌어졌다.
벨프스는 경악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등에서 파고든 날카로운 검 끝이 가슴을 뚫고 나와 있었다.
바로 뒤편을 보았다. 전투 기갑을 걸친 사내가 이편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냐?”
벨프스는 물었다.
“헨의 수장 히든.”
사내는 차갑게 말했다.
“헨?”
“암흑 상단 최강 다르를 헨이라고 불러.”
“대륙3상이란 말이냐?”
“너희들을 없애기 위해 동원된 다르가 3백 명이야. 그들은 전부 최상급이고.”
“왜?”
“너희들은 암흑상단 상단주의 청부를 받지 말았어야 했어.”
“우린 암흑상단 상단주를 노린 적 없다!”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대공을 노렸잖아.”
“그럼?”
“그분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여자 분이 바로 암흑상단의 상단주야.”
히든은 손목을 비틀어 검을 뽑아내고는 잡고 있던 벨프스를 놓았다.
“커억!”
벨프스는 비명과 함께 아래로 추락했다.
휙!
히든은 몸을 날려 벨프스 옆으로 내려섰다.
“이제 길드장 히르가만 남았소.”
도먼은 히든 곁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그는 지금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히든을 비롯한 10명이 윈드 사무실을 찾아온 건 8일 전이었다. 그들은 들어오자마자 암흑 상단 소속 다르라고 소개하고는 특별한 제안을 해 왔다.
그 특별한 제안이란 다름 아닌 니드의 공격이었다.
처음엔 너무 황당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른 조직도 아니고 대륙 최강 어쌔신 길드가 아닌가. 게다가 니드가 보유한 어쌔신의 수만 해도 2천여 명이다.
그런 엄청난 조직과 전쟁을 벌일 수는 없었다.
그때 히든이란 자가 말을 덧붙였다.
‘당신들은 니드에 대한 정보만 건네주면 되오. 없애는 건 우리가 하겠소. 그리고 당신네들이 드러나는 일은 없을 거요.’
그 제안은 구미가 당겼다.
설령 암흑 상단이 승리하지 못한다고 해도 니드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난 10년 동안 수집했던 모든 정보를 기꺼이 내준 이유였다.
기적의 목격자가 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놀랍게도 니드 소속 어쌔신들은 하룻밤에 수백 명씩 죽어나갔다. 왜 대륙3상이라고 부르는지, 암흑상단의 다르를 보며 확연하게 깨달았다.
대륙3상은 어쌔신들이 넘을 수 없는 벽이었던 것이다.
“우리 암흑 상단과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대공 전하를 건드린 자는, 누가 됐든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되오.”
단호함이 깃든 히든의 말에 도먼은 흠칫 몸을 떨었다. ‘누가 됐든’이란 말 속에는 윈드도 포함되기 때문이었다.
“우리 윈드는 결코 암흑 상단과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대공에 대한 청부는 받지 않을 테니까 걱정 마시오.”
“믿겠소.”
히든은 검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가볍게 휘둘렀다.
스악!
그의 검이 허공을 가르고 벨프스의 머리가 떨어져 나갔다.
‘대단하군.’
도먼은 내심 신음을 내뱉었다.
벨프스의 시체는 바닥에 누운 상태다. 그런데 목을 잘라냈음에도 불구하고, 히든의 검 끝에는 흙이 묻어 있지 않다. 일정 경지에 오른 자가 아니고는 흉내도 낼 수 없는 기술이었다.
그때 히든은 벨프스의 머리를 천으로 싸고 있었다.
“가지고 가실 거요?”
도먼은 물었다.
“이걸 보고 싶어 하시는 분이 계셔서 말이오. 이제 히르가를 잡으러 갑시다.”
벨프스의 머리를 싼 히든이 말했다.
“갈 필요 없네.”
어둠 속에서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걸어 나왔다. 커다란 눈에 각진 얼굴을 한 이 사내는 다르의 수장인 아슨이었다. 그는 다르 조장 다섯 명과 함께 작전에 참여했던 것이다.
아슨의 손에는 보자기 하나가 들려 있었다.
“끝난 건가?”
“이놈이 히르가네.”
아슨은 보자기를 들어 올렸다.
“선수를 쳤군.”
히든은 피식 웃었다.
“우리도 밥값은 해야 할 거 아닌가.”
“내가 보기엔 밥값을 넘어선 것 같구먼.”
히든은 빙긋 웃었다.
“5일 동안 이놈만 노리고 있었는데 실수하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그렇군. 아무튼 수고했네.”
히든은 걸음을 옮겼다.
도먼은 멍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히르가 역시 제국5대 어쌔신 중 한 명이다. 암흑 상단 다르들에게 제국5대 어쌔신 중 두 명이 죽임을 당하고 만 것이다. 그것도 거의 같은 시간대에.
“함께 가겠소?”
어둠 속에서 히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디로 가시오?”
도먼은 퍼뜩 정신을 차리며 물었다.
“이놈들의 머리를 보고 싶다고 하셨던 분이 대공 전하시오.”
“아, 알았소.”
도먼은 히든과 아슨을 쫓아 몸을 날렸다.
히든과 아슨이 향하는 곳은 아비라 남쪽이었다.
아비라 남쪽으로 향하는 것은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아비라 곳곳에서 검은 옷을 걸친 자들이 나와 남쪽으로 향했다. 그들의 손에도 히든과 아슨처럼 보자기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그런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는 자가 있었다.
암흑 상단의 다르처럼 검은 옷을 걸치고 있는 그는 어둠의 상단 총집사 몰토였다.
암흑 상단 다르를 잠시 바라보던 몰토는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려 갔다. 십여 분 후 몰토가 도착한 곳은 헤이먼이 머물고 있는 저택이었다.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헤이먼은 차를 마시고 있었다.
“놈들이 드디어 아비라 밖으로 나갔습니다.”
“니드 소속 어쌔신들이 2천 명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몰트의 보고를 들은 헤이먼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가 암흑 상단 소속 헨이 아비라로 들어온 것을 알게 된 것은 며칠 전이었다. 전날 수백 명의 시체가 발견되자 아비라는 발칵 뒤집혔다.
헤이먼 또한 다르지 않았다. 갑작스런 사건에 깜짝 놀라 조사를 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결과가 나온 것은 하루 후였다.
죽은 자들은 어쌔신 길드인 니드의 조직원들이었고, 공격한 자들은 암흑 상단의 최강 전사인 헨이었다.
헨의 활약은 놀라울 정도였다.
3백 명에 불과한 자들에게 수백 명의 어쌔신들이 매일 밤 죽어나갔다.
전날까지 확인한 자들은 1천6백 명이었다.
그런데 오늘 밖으로 나갔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다.
“그렇습니다.”
“2천 명을 다 없앴단 말이냐?”
“확인하진 못했지만 그런 것 같습니다.”
“그게 가능하다고 보느냐?”
“조력자가 있으면 가능합니다.”
“조력자?”
“헨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면?”
“어쌔신계의 이인자인 윈드가 놈들 편에 선 걸로 확인됐습니다.”
“그럼 니드가 그렇게 힘없이 무너진 것은 윈드의 도움 이 절대적이었단 말이구나.”
“윈드 놈들은 니드 조직원을 대부분 파악하고 있었고, 헨은 그 정보를 바탕으로 움직인 겁니다.”
“그랬군. 가자!”
헤이먼은 벌떡 일어났다.
헨이 아비라 밖으로 나갔다는 건 그의 목표물인 김필도와 리시아가 근처에 와 있다는 걸 뜻한다.
건물 밖으로 나온 헤이먼은 몰토의 손을 잡고 플라이 마법을 펼쳤다. 두 사람의 신형은 곧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로부터 20분 후, 헤이먼은 아비라 남쪽 성문에서 1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언덕에 도착했다.
고대의 성 잔해가 흩어져 있는 그곳에서는 아래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벌판을 가득 채운 억새풀은 바람에 서걱서걱 춤을 춰댔다.
아비라를 나선 헨은 언덕에서 3백 미터 남쪽 억새풀 사이에 늘어서 있었다.
“옵니다.”
전면을 응시하고 있는데, 몰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헤이먼은 눈을 모았다.
헨을 향해 다가오는 자들이 시야에 잡혔다.
이야크를 타고 있는 자들은 모두 8명이었다. 김필도와 리시아는 맨 앞에 섰고, 그 뒤에는 드보르칸 후작과 올가, 베른, 알마니가 그리고 맨 후미에는 쿠다와 아베다가 따르고 있었다. 8명 중 헤이먼이 아는 자는 김필도, 리시아, 베른 세 명이었다.
“놈!”
헤이먼은 김필도를 보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주먹을 불끈 틀어쥔 그는 다시 몰토를 바라보았다.
“1백 미터 떨어져 있습니다.”
“시작해라!”
“알겠습니다.”
몰토는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갔다. 섀도 기능을 활성화시킨 듯 몰토의 모습의 허공으로 녹아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