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
“어서 오십시오, 가주님!”
김필도와 리시아가 도착하자 헨은 고개를 숙였다.
“임무는 어떻게 됐죠?”
리시아는 앞에 있는 히든과 아슨을 보며 물었다.
“이자가 니드의 길드장 히르갑니다.”
먼저 아슨이 들고 있던 보자기를 풀어 리시아 앞에 놓았다.
“이자는 부길드장인 벨프습니다.”
이어 히든이 보자기를 풀어 김필도 이야크 앞에 놓고, 나머지 대원들도 보자기를 풀어 그들의 발치에 놓았다.
“아비라에는 니드 소속 어쌔신들은 없겠네요?”
“대륙 최강 어쌔신 조직은 윈드로 바뀌었습니다. 저 친구가 윈드의 수장입니다.”
히든은 왼편에 따로 떨어져 서 있는 도먼을 가리켰다.
“처음 뵙습니다. 윈드의 길드장 도먼입니다.”
도먼은 김필도와 리시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넌 어때?”
김필도는 도먼을 빤히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나를 비롯한 여기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청부가 들어오면 어떻게 할 거냐는 말이야.”
“청부를 수락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대공 전하.”
“그게 다야?”
“네?”
“너는 너를 죽여 달라고 청부를 넣은 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는 엄청 궁금해.”
“그자의 신상을 넘겨드리…….”
“도먼!”
김필도는 도먼의 말을 잘랐다.
“말씀하십시오.”
“앞으로 날 보러 올 땐 머리 좋은 부하를 한 명 데리고 와.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알겠습니다, 대공 전하.”
“그리고 내가 궁금한 건 신상이 아니라 어떻게 생긴 놈인지 얼굴이 궁금하다는 거야. 몸통은 절대 궁금하지 않아. 얼굴만 궁금해.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알겠습니다, 대공 전하. 청부자의 머리를 가지고 대공 전하께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이제야 말이 통하네.”
김필도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돌려 리시아를 보았다.
“마음에 들어요?”
시선이 마주치자 리시아가 물었다.
“아주 뛰어난 부하들이네요. 아주 좋아요.”
김필도는 빙그레 웃었다.
-나예요.
그때 머릿속으로 라헤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헤나와 다란은 여전히 허공으로 숨은 채 김필도를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죠?”
김필도는 라헤나가 숨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적이에요.
“적이라고요?”
“히든, 전투 준비해!”
김필도가 라헤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리시아가 히든을 향해 소리쳤다.
틱! 틱틱틱! 틱틱틱! 틱틱!
슈욱! 슈우욱! 슈우욱!
섬뜩한 소성과 함께 수백 대의 화살이 일행이 있는 곳으로 날아왔다.
“전투 기갑을 소환하라!”
히든은 리시아 앞을 막아서며 고함을 내질렀다.
“공격하라!”
“공격하라!”
전방과 좌우측에서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스아아악! 스아아악! 스아아아악!
일행의 뒤쪽과 좌우측에 밭고랑처럼 긴 고랑 수백 개가 생겨났다. 하지만 다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섀도 기능을 활성화시켰기 때문이었다.
“베리어(Barrier)!”
“베리어(Barrier)!”
드보르칸 후작과 올가 드보르칸이 펼친 거대한 마나 방패가 우산처럼 김필도 일행의 머리 위쪽에 펼쳐졌다.
턱! 턱턱턱! 턱턱턱!
수십 대의 화살이 베리어에 막혀 떨어졌다.
“누구지?”
헤를리온을 착용한 김필도는 뒤편의 베른을 보며 물었다.
“직접적으로 우리를 공격할 자들은 어둠의 상단밖에 없습니다.”
“그자도 왔을까?”
김필도는 아공간을 열어 헬칸을 꺼내며 물었다.
“헤이먼 말입니까?”
베른은 되물었다.
“10인 위원회 회원 중 한 명이라고 했잖아.”
“나와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대답은 리시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럼 오늘 아버지와 엄마가 돌아가신 이유가 사고인지 사고를 위장한 살해인지 알 수 있겠군요?”
김필도의 몸에서 스멀스멀 살기가 피어올랐다.
“아마도.”
“나쁘지 않겠네요.”
차앙! 창창! 창창창!
“크악!”
“아악!”
“으아악!”
처절한 비명이 주위에서 터져 나왔다.
휙!
김필도는 블랙칸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척!
바닥에 내려선 그는 왼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위아래가 뾰족한 형태의 정령 방패가 모습을 드러냈다.
“간다!”
파앗!
그의 신형이 전방으로 폭사돼 갔다. 세 가지 속성의 마법을 사용하게 되자 한 가지 속성을 이용하는 마법은 더 이상 주문이 필요 없었다. 마음을 먹는 순간 헤를리온 표면으로 마법진이 나타나고 신형은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저기 놈이 온다!”
김필도를 발견한 다르가 고함을 내질렀다.
“날 가리키기 전에 방어를 먼저 생각해야지.”
달려가던 김필도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보이지 않던 자들의 형체가 머릿속에 잡혔다. 마치 밤에 적외선 망원경으로 사물을 보는 것 같았다.
몸통도 보이고 무기도 보인다.
김필도는 왼손의 방패를 들어 올림과 동시에 헬칸을 휘둘렀다.
퍼억!
슈캉!
“크악!”
허공에 불쑥 머리가 나타나고 어둠 속에 동화돼 있던 동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러난 동체의 목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다.
스악!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검이 날아왔다.
김필도는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카앙!
헬칸으로 상대의 검을 젖히면서 방패를 휘둘렀다. 방패 아래쪽에 뾰쪽하게 튀어나온 부분이 다르의 얼굴로 파고들어 갔다.
“아악!”
다르의 얼굴로 파고들어 갔던 방패를 뽑아냄과 동시에 헬칸을 휘둘러 목을 잘랐다.
파앗!
다르의 목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그의 신형은 이미 왼편으로 10여 미터 쏘아져 가 다른 다르의 목을 잘라내고 있었다.
방패로 막고 헬칸으로 자르고, 헬칸으로 막고 방패로 찍었다. 그때마다 어둠의 상단 다르들은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며 쓰러졌다.
광속의 바람 라콰에 유연한 흐름 쿠라가 더해지고, 김필도의 움직임은 더욱 빨라졌다. 그가 지나가는 곳에는 다르의 시체들로 길이 만들어졌다.
차앙!
“크악!”
스악!
“아악!
퍼억!
“악!”
둔탁한 소성과 비명이 꼬리를 물었다. 엄청난 속도로 다르를 격살하는 사람은 김필도뿐만이 아니었다.
리시아 또한 종횡무진 억새풀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어둠의 상단 다르를 도륙했다. 바람의 정령 실레카의 힘을 사용하는 그녀는 땅과 허공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데스 와이어가 붉은색으로 변할 때마다 어둠의 상단 다르의 머리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저자가 사용하는 마법이 실전 마법인 것 같은데, 맞아?
빠르게 날아다니며 적 다르를 없애고 있는데 그녀의 귓전으로 실레카의 사념이 흘러들어왔다.
-루시안 공자를 말하는 거예요?
-응!
-저게 실전 마법이에요?
-몰랐어?
-루시안 공자가 익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긴 했어요.
-그런데 확신은 못했다는 거구나.
-네.
-실전 마법 맞는 것 같아.
-그럼 루시안 공자는 헬칸의 갑옷 헤를리온을 걸치고, 그의 검 헬칸을 들고, 실전 마법까지 익혔네요.
-그거 알아?
-어떤 거요?
-산 자는 헤를리온을 착용할 수 없다는 사실.
우뚝!
적 다르의 목을 잘라내던 리시아의 동작이 멈췄다.
“그게 무슨 소리죠?”
너무 놀라 그녀는 머릿속이 아닌 소리를 내어 질문을 했다.
-너무 오랜만이라 잊고 있었는데 문득 생각났어.
-그러니까 헤를리온을 착용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단 말이에요?
다시 머릿속으로 물었다.
-헤를리온 자체가 심장 역할을 하게 만들어져 있어서 살아 있는 사람은 착용이 불가능하다고 들었어.
-그럼 루시안 공자는?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한 번 죽었을 거야.
-그를 공격한 자는 마족이나 천족 중 한 명이겠군요. 지금 이곳에 들어와 있을 테고.
-아마도.
스아악!
느닷없는 적의 공격으로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리시아는 데스 와이어를 날리며 김필도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김필도는 50여 명의 다르를 앞에 두고 있었다.
그들은 헤이먼을 호위하는 최상급 다르들이었다. 물론 섀도 기능을 활성화시킨 상태라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김필도는 방패를 앞으로 내밀고, 헬칸은 사선으로 비껴들었다.
“난 궁금한 게 많아, 헤이먼.”
김필도는 전방을 향해 낮게 말했다.
눈을 뜨고 있을 땐 헤이먼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데 눈을 감자 다르와 확연하게 다른 기운을 가졌으면서도 훨씬 강한 자가 감지됐다. 드보르칸 후작과 비슷한 기운을 가진 자는 10인 위원회 위원의 한 명인 헤이먼밖에 없을 터였다.
“우리 어둠의 상단이 보유한 다르를 전부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만큼은 반드시 없애고 말겠다!”
헤이먼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좋은 마음 자세야. 분노는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지!”
김필도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맺혔다.
“문제는 분노는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라는 말은 너뿐만 아니라 내게도 해당된다는 거야.”
파앗!
김필도의 신형이 가공할 속도로 허공을 갈랐다.
그가 몸을 날리자 최상급 다르들도 일제히 무기와 하나가 돼 김필도를 향해 쏘아져 갔다.
“땅의 속성 노콴(Noqan)! 부상!”
그의 입에서 나직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그 앞에 있던 땅이 불쑥 솟구쳐 올랐다.
“헉!”
“억!”
김필도를 향해 달려가던 다르들의 입에서 놀란 외침이 흘러나왔다.
“혼돈의 바람 라콰 카이(Laqwa kai)!”
바로 그 순간 김필도의 신형은 솟구쳐 오른 흙더미를 통과하여 헬칸과 방패로 적을 도륙했다.
“하강!”
순식간에 다섯 명을 도륙한 김필도가 이번엔 바닥으로 쑥 꺼졌다. 그를 향해 달려들었던 여섯 명도 동시에 구덩이 안으로 빠지며 중심을 잃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들의 머리를 향해 헬칸과 정령의 방패가 무자비하게 떨어졌다.
“부상!”
다섯 명을 없앤 그는 곧바로 땅과 함께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물의 대지, 노콴 쿠라(Noqan kura)!”
우렁찬 외침과 함께 김필도의 신형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그 주위가 늪으로 변했다. 김필도를 향해 달려들던 다르들의 신형이 빠르게 빨려들어 갔다.
다르들은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그럴수록 빠지는 속도만 더 빨라질 뿐이었다. 한순간에 10명의 다르가 땅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화염의 대지, 세딕 노콴(Sedic noqan)!”
김필도의 손이 다시 바닥을 짚고, 수십 개의 마법진이 땅속으로 쏘아져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늪이었던 장소는 붉은 용암의 대지로 변했다. 땅속에서 솟구친 용암이 아니라 마법적으로 만들어진 용암의 대지였다.
용암의 늪 속에 빠진 자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다.
“죽음의 대지, 라콰 노콴(Laqwa noqan)!”
또다시 김필도의 입에서 나직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김필도의 몸에서 비릿한 냄새를 포함한 바람이 불어나왔다. 바람이 미치는 거리는 5미터가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자들은 전부 픽픽 쓰러졌다.
바람 속에 내포된 비릿한 냄새는 대지가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인 독이었다.
퍽!
김필도는 방패 아래쪽 끝을 땅바닥에 대고 헬칸은 옆으로 늘어뜨린 채 전면을 바라보았다.
남은 자는 25명.
여전히 섀도 기능을 이용하여 어둠 속에 숨어 있다.
김필도는 시선을 들었다.
언덕 위 고성에 흰색 로브를 걸친 자가 서 있었다. 그가 바로 10인 위원회의 한 명인 헤이먼일 터였다.
바로 그때 어둠 속에 동화돼 있던 다르 두 명이 김필도를 향해 쏘아져 왔다.
김필도는 방패와 헬칸을 동시에 들어 올렸다.
퍼억! 차앙!
다르의 검이 부딪치는 순간 방패와 헬칸을 강하게 쳐올렸다. 40킬로그램에 달했던 헬칸을 아무렇지 않게 휘둘렀던 김필도의 힘을 다르는 당해내지 못했다.
두 다르의 검은 힘없이 꺾였다.
검이라는 방어막이 사라지자 목 부분은 텅 비었고, 그곳을 향해 방패와 헬칸이 동시에 날아들었다. 밖에서부터 안쪽으로 휘둘러진 방패와 헬칸은 두 다르의 목을 한 방에 잘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