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
“그들에 대해 알아냈는가?”
“그렇습니다.”
베칼리오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보게.”
황제는 찻잔을 들며 베칼리오 후작의 말을 기다렸다. 다른 영주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궁금한 얼굴로 베칼리오 후작의 말을 기다렸다.
“천족은 대천신군 1천5백 명이 건너왔고, 마족은 마계10군단 1천 명이 건너왔습니다.”
“수장은 어떤 자들인가?”
“대천신군의 수장은 세이아칸이란 자인데 천계 원로인 국방대신의 아들이고 신분은 천좌입니다. 그리고 마계10군단의 단장인 데메우스란 자인데 마계4원로의 한 명인 프리메우스의 아들입니다. 신분은 상급 마족이고요.”
“둘의 신분으로 보면 천왕과 마왕이 휴도니아 대륙의 침략을 승인했다고 봐야겠구먼.”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그들과 루시안이 어떤 관계가 있단 말인가?”
“프리우스 대공이 문 대륙에 있던 시기에 그들 역시 문 대륙에 있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문 대륙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연관을 짓는 건 억측 아닌가?”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만나보고 생각을 바꿨습니다.”
“누구 말인가?”
“들여보내라!”
베칼리오 후작의 말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고 로브를 걸친 두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황제 일행은 의아한 얼굴로 안으로 들어온 자들을 보았다.
“응?”
황제는 깜짝 놀랐다.
눈동자가 한 명은 금색이고 한 명은 붉은색이었다. 그것은 천족과 마족의 표식이었다.
인간과 비슷한 키에 천족과 마족의 눈동자를 지닌 자는 황제가 알기론 혼혈밖에 없었다.
“처음 뵙습니다, 폐하. 전 모딕이고 이 친구는 디나인입니다.”
놀랍게도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문 대륙에서 김필도와 시아나를 쫓던 모딕과 디나인이었다.
“혼혈이더냐?”
황제는 물었다.
“처는 천족과 인간의 혼혈이고, 디나인은 마족과 혼혈입니다.”
“문 대륙 출신이란 말이구나.”
“그렇습니다.”
“그랬구나. 앉아라.”
관찰하듯 두 사람 바라보던 황제는 자리를 권했다.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들이 앉자 이번에도 역시 시종이 차를 가져와 놓았다.
“베칼리오 후작에게 많은 정보를 주었다고 들었다.”
황제는 입을 열었다.
“프리우스 대공의 행적을 쫓다가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일 뿐이었습니다.”
“대공의 행적을 왜 쫓았느냐?”
“그건 한 마리 몬스터 때문이었습니다.”
“몬스터?”
“하이 오드를 아십니까?”
“피를 복용하면 불사의 능력을 얻을 수 있다는 그 하이 오드를 말하는 게냐?”
“그렇습니다.”
“그거 재미있는 말이구나. 계속해 보아라.”
“디나인과 저는 문 대륙에 하이 오드가 있다고 믿고 녀석을 잡기 위해 덫을 놓았습니다. 그리고 기다렸지요.”
“잡았느냐?”
“잡을 뻔했습니다.”
“정말 하이 오드가 존재했단 말이냐?”
“저희들이 놓은 덫에 걸렸으니까요.”
“그럼 너희들은 불사의 능력을 지녔겠구나.”
“그건 아닙니다.”
“하이 오드의 전설이 거짓말이란 말이냐?”
“그것도 아닙니다.”
“하면?”
“저희들보다 한발 앞서 덫에 걸린 하이 오드를 구해준 자가 있었습니다.”
“그자가 대공이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대공이 하이 오드를 구해 준 바람에 놓치고 말았습니다.”
“하면 루시안은 왜 쫓아 다녔던 거냐?”
“비록 몬스터라고 불리고 있기는 하지만 하이 오드는 인간과 비슷하고 머리도 상당히 뛰어납니다.”
“구해 준 은혜에 보답할 거라고 생각했다는 거구나.”
“그렇습니다. 그때부터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대공을 쫓기 시작했습니다. 대공은…….”
모딕의 입에서 루시안이 문 대륙에서 겪었던 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황제 일행은 때로는 놀라고, 때로는 감탄사를 터뜨리며 모딕의 말을 들었다.
“정말로 리모스를 발견했단 말이오?”
말없이 듣고 있던 헬모트 공작이 물었다. 모딕의 이야기가 리모스에 이르렀을 때였다.
“우리도 들어갔습니다.”
“리모스는 어떤 곳이더냐?”
이번엔 황제가 물었다. 그의 얼굴엔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만티움으로 지어진 건물이 우뚝우뚝 솟아 있는 그곳은 리모스란 말의 의미처럼 신의 땅이었습니다.”
“그렇겠지.”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모스에서 대공은 이카렌이란 마족을 구하기 위해 데메우스 일행과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마족과 싸웠다고?”
“그렇습니다. 그의 손에 죽은 마족의 수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하지만 결국엔 힘이 떨어져 위험한 지경에 처했고, 이카렌은 그를 숨겨두고 데메우스 일행을 유인해 가게 됩니다. 낭떠러지의 선반처럼 튀어나온 곳에 숨어 있던 대공은 한참 후에 위로 올라왔는데, 낭떠러지 위엔 대천신군의 수장인 세이아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니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기보다는 우연히 그곳에 서 있었는데 대공이 올라온 거죠.”
“세이아칸이 가만있지 않았겠군.”
“그랬습니다. 이야크 평원에서 있었던 일로 기분이 상해 있었던 세이아칸은 대공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은 다음, 죽음을 확인하고는 낭떠러지 아래로 던져 버렸습니다.”
“루시안이 정말로 죽었단 말이냐?”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정확하게 확인할 순 없었지만, 세이아칸의 성격으로 볼 때 분명히 죽었을 겁니다. 게다가 대공이 던져진 낭떠러지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었습니다. 설사 세이아칸이 실수를 했다고 해도 살아날 수 없는 높이였습니다.”
“그러니까 네 말은 그곳에서 죽었던 루시안이 버젓이 살아 돌아다닌다는 거구나.”
“그렇습니다.”
“루시안이 어떻게 살아났는지 그 이유는 아느냐?”
“그가 죽임을 당하고 난 후엔 더 이상 쫓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리모스로 들어가는 입구인 골든 브리지가 부서지는 바람에 나올 수밖에 없었고요.”
“루시안이 낭떠러지로 던져지고 난 후의 상황은 모른다는 말이구나.”
“그렇습니다, 폐하.”
“좋다. 이젠 천족과 마족이 루시안을 쫓는 이유에 대해 말해 보거라.”
“지금부터는 모딕과 저의 추론입니다. 그래도 들으시겠습니까?”
“사실이 아니란 말이냐?”
“저희들은 대공이 살아 있다는 말을 반년 전에 들었습니다.”
“……말해 보거라.”
잠시 생각하던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휴도니아 대륙으로 먼저 들어온 자는 천족이고 뒤이어 마족이 들어왔다는 건 아십니까?”
“그랬느냐?”
“그랬습니다. 천족은 차원의 벽이 사라지기 전에 휴도니아 대륙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간 곳은 펠콘 성이었습니다. 즉 그곳에서 대공이 오기를 기다린 겁니다.”
“왜 루시안을 기다렸단 거냐?”
“그건 헤를리온과 관계가 있습니다.”
“헤를리온이면 혹시 신마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신갑 헤를리온을 말하는 거더냐?”
황제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뿐만 아니라 헬모트 공작을 비롯한 영주들도 깜짝 놀랐다.
헤를리온은 술자리에서 간혹 등장하는 전설의 무구일 뿐이다. 아울러 헤를리온의 이름 또한 모르는 자들이 더 많다. 그런데 그 헤를리온 때문에 천족이 휴도니아 대륙으로 건너왔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습니다, 폐하. 대천신군의 수장인 세이아칸은 자기가 죽인 대공이 다시 살아난 이유가 헤를리온 때문이라고 본 겁니다.”
“하지만 대공이 헤를리온을 얻었다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어야…….”
황제는 문득 말을 끊었다.
조금 전 모딕과 디나인이 쫓았다는 하이 오드가 떠오른 것이었다.
다시 황제는 입을 열었다.
“혹시 하이오드가…….”
“저희 둘은 리모스에서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어떤 사실을 말이냐?”
“다섯 종족을 문 대륙에서 쫓아낸 헬칸과 그의 아내 카라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황제는 황당한 얼굴로 디나인을 보았다.
그는 인간과 드워프 엘프가 문 대륙을 떠나 이곳 휴도니아 대륙으로 온 이유가 문 대륙의 기후 변화 때문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디나인의 이야기는 달랐다.
“인간과 드워프 엘프가 왜 휴도니아 대륙으로 도망쳐왔는지 모르십니까?”
“그건…….”
황제는 이번엔 헬모트 공작 일행을 바라보았다.
“저희들 또한 폐하와 다를 바 없습니다.”
헬모트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는 조작됐다는 말이군.”
황제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맞소. 황제가 알고 있는 역사는 상당 부분 왜곡돼 있소.”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금발에 은빛 눈동자를 가진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10인 위원회 위원장 아론이었다.
“웬 놈이냐?”
베칼리오 후작은 벌떡 일어나며 가슴에 손을 얹고, 전투 기갑을 소환했다. 그러고는 바로 검을 뽑았다.
“싸우러 온 게 아니니까 진정하게.”
아론은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러자 베칼리오 후작은 자기도 모르게 검집으로 검을 집어넣었다.
“이건?”
베칼리오 후작은 경악했다.
베칼리오는 최상급 전투 기갑을 걸친 상태고, 마나를 끌어올린 상태에서는 6클래스 마법까지 방어가 가능하다.
그런데 검을 집어넣으라는 젊은 사내의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흘러들어 왔고, 베칼리오는 그대로 따른 것이다.
놀랍게도 그것은 상대의 머릿속을 지배하여 부하로 만들어 버리는 도미네이션 마법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금발 사내를 보았다.
“나는 마법사네.”
아론은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그의 오른 소매 속에는 붉은색의 보석이 박힌 마법 지팡이가 고개를 빠끔 내밀고 있었다.
“마법진을 더 강화해야겠군.”
황제는 아론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황실 전역에는 워프 마법이나 텔레포트 마법 등 이동 마법을 펼치지 못하도록 마법진이 설치돼 있다. 그런데 아론은 마법진을 뚫고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그건 곧 아론이 황실에 설치된 마법진에 영향을 받지 않을 정도로 강자라는 의미였다.
“앞으로는 허락 없이 황실로 오는 일이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위원장이 여기엔 웬일이시오?”
“응?”
황제의 말에 헬모트 공작을 비롯한 영주들은 깜짝 놀랐다. 위원장이라는 직책도 생소했지만 황제는 공작들에게 반 하대를 해 왔다. 그랬던 그가 금발 사내를 향해 반 공대를 한 것이었다. 게다가 금발 사내도 반 공대 일색이다.
“먼저 내 소개를 하겠소. 난 10인 위원회 위원장인 아론 드반드쉬 카이제 이클라우스요.”
영주들의 의중을 알아차린 듯 아론은 빙그레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10인 위원회?”
“신의 정원?”
헬모트 공작을 비롯한 영주들의 입에서 놀람에 찬 외침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