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156화 (156/225)

# 156

제3장 자유도시 라파

“그렇소, 신의 정원의 통수권자요.”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소, 위원장.”

황제는 아론을 쏘아보며 차갑게 말했다. 황실에 들어와서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아론의 모습에 기분이 상한 것이었다.

“천족과 마족이 침략해 온 상황이오. 과거의 앙금은 잠시 묻어둡시다.”

아론은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사실 그가 황실로 온 이유는, 리시아의 배신과 헤이먼의 죽음 때문이다. 헤이먼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센 왕국으로 파견 보냈던 암흑 상단 다르가 돌아왔다.

그런데 돌아온 자들은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다센 왕국의 반란군과 전투에서 희생된 자들이 거의 없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절반밖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암흑 상단을 찾아 눈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암흑 상단에서 아론을 반겨준 건 노인과 여자 그리고 아이들뿐이었다. 리시아를 비롯한 암흑 상단의 최강 조직인 헨은 떠나고 없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사실은 리시아와 대공이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야 비로소 헤이먼이 대공을 없애려고 했던 이유를 알았다. 헤이먼이 노렸던 사람은 대공이 아니라 리시아였던 것이다.

어둠의 상단 미래를 위해 리시아를 없애려 했다는 걸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암흑 상단을 둘러보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헤이먼 일행에 대한 보고서가 올라와 있었다.

보고서에는 헤이먼을 비롯한 어둠의 상단 다르가, 리사아가 이끄는 암흑상단 다르에게 전멸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건 곧 대공과 리사아가 손을 잡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둠의 상단 멸망과 헤이먼의 죽음 그리고 암흑 상단의 배신은 신의 정원에 큰 타격이었다.

아니 최대 위기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황제와 손을 잡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가 이곳을 찾은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앉으시오.”

잠시 아론을 바라보던 황제는 자리를 권했다.

아론의 말이 틀리지 않다. 지금은 반목할 때가 아니라 협조할 때였다.

“고맙소.”

아론은 싱긋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10인 위원회에서 조작한 거요?”

시종이 아론의 찻잔에 차를 따라주고 물러가자 황제는 본론을 꺼냈다. 문 대륙 역사에 대한 질문이었다.

“조작한 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내용이기에 언급하지 않았을 뿐이외다.”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지 안 될지는 각자의 몫이오.”

“역사를 숨기기로 결정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초대 위원장이오. 나하곤 상관없이 결정된 일이오.”

“내가 기분 나쁜 건 위원장은 알고 나를 비롯한 영주들은 모르고 있었다는 거요.”

“만일 내가 우리의 고대사에 대해 말을 했다면 받아들일 수 있었겠소?”

“……!”

황제는 할 말이 없었다.

아론의 말이 틀리지 않다. 설령 아론이 역사가 왜곡됐다는 말을 했더라도 순수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혹시 다른 의도가 있지 않나 의심을 했을 것이다.

“게다가 고대사를 안다고 해도 제국을 통치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소.”

“좋소. 그 부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소. 그보다 10인 위원회에서 왜곡한 역사를 들어봅시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친구들 말이 맞소.”

아론은 모딕과 디나인을 가리켰다.

“나는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소.”

“좋소, 말해주겠소.”

아론은 입술을 축이듯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문 대륙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철족에 대해 알아야 하오.”

아론은 다섯 종족에게 무기를 만들어 공급했던 철족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실전 마법과 헤를리온에 대한 이야기를 비교적 자세하게 해 주었다.

“그러니까 헤를리온은 누군가가 만들어 낸 전설이 아니고 실존하는 전투 기갑이었단 말이군.”

“그렇소. 더불어 죽은 자만 착용할 수 있다고 하였소.”

“대신 착용한 자는 불사의 능력을 얻고?”

“헬칸이 죽었으니까 그건 거짓으로 밝혀졌소.”

“하지만 본래 수명보다는 오래 산다는 뜻이겠지.”

“아무튼 그렇게 된 거요.”

“그렇다면 하이 오드의 피를 복용하면 불사의 신체를 얻는다고 하였던 전설도 헤를리온 때문에 나왔다고 할 수 있겠구먼.”

“그럴 거요. 헬칸의 아내 카라 역시 헤를리온을 착용하고 있었으니까.”

“하면 천족과 마족이 루시안을 노리는 게 헤를리온 때문이라고 보면 되겠군.”

“절반만 맞혔소.”

“다른 이유도 있단 말이오?”

“헤를리온을 착용한 헬칸과 카라에게 다섯 종족의 결사대 1천 명이 죽었고, 그 당시 다섯 종족의 최강 검사 10명도 죽었소. 그게 뭘 말하는지 모르겠소?”

“루시안이 나와 손을 잡는 걸 우려한다는 뜻이군.”

“맞소. 천왕과 마왕이 걱정하는 건 인간이 자신들을 우습게볼 정도로 강해지는 거요.”

“그럼 주도권은 아직 우리에게 있는 셈이구려.”

황제는 헬모트 공작 일행을 보았다.

영주들의 도움이 가장 필요한 시기이기 때문이었다.

“헤를리온도 중요하지만 서로군벌과 북로군벌도 등한시할 수 없습니다, 폐하.”

황제와 시선이 마주치자 헬모트 공작이 말했다.

“물론이오, 공작. 그래서 하는 말인데, 공작과 힐리아드 후작, 트란도르 후작 세 사람이 북로군벌을 맡아 주어야겠네.”

“알겠습니다, 폐하!”

헬모트 공작을 비롯한 세 사람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노르탄 공작과 크로디아 후작은 델리카슨 백작과 함께 서로군벌을 치도록 하시오.”

“델리카슨 백작과는 이야기가 됐습니까?”

노르탄 공작은 물었다. 델리카슨 백작은 4대군벌 중 한 곳인 남쪽 라팔 성의 성주였다.

“그뿐만 아니라 디바스칸 백작과도 이야기가 됐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그렇네. 이제 10위원회 위원장까지 왔으니까 휴도니아 대륙에 사는 종족 중 인간은 하나가 됐네.”

“드워프와 엘프만 우리 편이 되면 좋은데…….”

헬모트 공작은 입맛을 다셨다.

“그건 우리 욕심이네, 공작. 그리고 설사 하나가 된다고 해도 같은 종족이 아니면 동맹은 오래갈 수가 없네.”

“그건 폐하의 말이 옳습니다. 그건 그렇고 헤를리온은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헬모트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천족과 마족의 약점을 그러쥘 수 있는 물건인데 그냥 둘 순 없지 않겠는가?”

“회수하겠단 말입니까?”

“10인 위원회 위원장과 상의해 처리하도록 하겠네. 그리고 진행 상황에 대해서는 경들에게 바로 통보하겠네.”

“아닙니다, 폐하. 굳이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정말 그래도 되겠는가?”

황제는 헬모트 공작을 빤히 바라보았다.

“무, 물론입니다, 폐하.”

헬모트 공작은 고개를 숙였다. 테이블에 눈을 맞추고 있는 헬모트 공작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럴 필요 없다고 했던 건 예의상 해 본 말에 불과했다. 그런데 황제는 기다렸다는 듯 되물어 왔다.

이미 뱉고 말았는데 번복할 수도 없었다.

‘젠장!’

헬모트 공작은 내심 욕설을 내뱉었다.

“날 이해해 주어서 고맙네, 공작. 단장은 듣게.”

황제는 베칼리오 후작을 보았다.

“하명하십시오, 폐하.”

“크로를 이끌고 라파로 가게.”

“대공은 어떻게 처리합니까?”

“제압해서 오는 게 힘들면 헤를리온만 회수해 오게.”

“알겠습니다, 폐하.”

베칼리오는 고개를 숙였다.

헤를리온만 회수해 오라는 말은 죽여도 상관없다는 말이었던 것이다.

“신의 정원에서는 어떻게 하겠소?”

황제는 아론을 돌아보았다.

“나도 정원사들을 파견하겠소.”

“그럼 제국군과 신의 정원 간 최초의 합동 작전이 되겠구려.”

“베칼리오 후작과 상의해서 잘하라는 지시를 내려놓겠소.”

“지시를 누가 내릴 건지 그걸 먼저 결정해야 하오, 위원장.”

“베칼리오 후작을 지휘관으로 삼고 싶은 거요?”

“크로는 라파를 손바닥처럼 훤히 꿰뚫고 있소.”

“좋소. 그렇게 합시다.”

아론은 흔쾌히 수락했다.

“그리고 헤를리온을 얻게 되면…….”

“황제께 양보하겠소.”

“정말이오?”

황제는 아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대신 헤를리온을 분해할 때 우리도 그 자리에 있고 싶소.”

“함께 연구하잔 말이구려.”

“그 정도 대가는 받아야 하지 않겠소.”

“약속하겠소.”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베칼리오를 돌아보았다.

“하명하십시오, 폐하!”

“신의 정원과 최대한 협력해서 일을 처리하도록 하시오. 당장 출발하시오.”

“알겠습니다, 폐하.”

베칼리오 후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우리도 그만 일어납시다.”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헬모트 공작을 비롯한 여섯 영주는 황제를 향해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자리를 옮겨서 차 한 잔 하시겠소?”

영주들이 밖으로 나가자 황제는 아론을 보며 물었다.

“차보다는 술을 한잔하고 싶은데 어떻소?”

“그렇게 합시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종에게 술을 준비해 놓으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사람은 3층 휴게실에서 술잔을 앞에 두고 앉았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시중을 들던 시종이 밖으로 나가자 아론이 입을 열었다.

“뭘 말이오?”

“확전이 됐을 경우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이외다.”

“그들은 우리보다 신체 조건이 약간 뛰어난 종족일 뿐이오. 그리 크게 걱정할 자들은 아니오.”

“하지만 제국에 많은 변화를 몰고 올 거요. 특히 황제 자리에 말이오.”

“그건 위원장도 마찬가지 아니오?”

황제는 아론을 빤히 바라보았다.

사실 황제는 아론이 이곳에 나타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머리 잘 간수하라고 협박을 했던 자다. 그랬던 자가 이곳에 나타났다는 건 심경의 변화가 생길 만한 큰 사건이 일어났다는 말이 된다.

‘혹시……!’

문득 얼마 전 신의 정원에서 들어온 보고서의 내용이 떠올랐다. 그 보고서에는 10인 위원회 이인자라고 할 수 있는 헤이먼 샤칸 미들헤임이 어둠의 상단 휘하 다르를 데리고 가문을 나섰다고 돼 있었다.

어둠의 상단 다르가 출병한 이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아론이 이곳으로 온 이유가 그들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부정하진 않겠소, 황제. 우리 신의 정원 또한 많은 변화가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고 있소.”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 싶은 말이 뭐요?”

황제는 물었다.

“발탄 제국이 건국되기 전에는 다섯 종족 간의 교류가 있었다는 걸 아시오?”

“정말이오?”

황제는 깜짝 놀랐다.

그런 일이 있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랬소. 인간, 드워프, 엘프, 천족, 마족은 문 대륙의 모처에서 지속적으로 만났소. 친목도모를 빙자한 상대방 탐색이 목적이었소. 사실 천족과 마족은 인간, 드워프, 엘프가 한 대륙에 있는 상황을 못마땅해했소.”

“세 종족이 연합해서 천계나 마계로 쳐들어올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게로군.”

“그렇소.”

“그런데 교류가 왜 끊어진 거요?”

“차원의 벽이 존재하는 한 서로를 침략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거요.”

“침략이 불가능한데 굳이 탐색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거군.”

“문 대륙과 휴도니아 대륙을 막고 있는 차원의 벽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을 거요.”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는 말이구려.”

“그게 아니라면 대천신군과 마계10군단이 침략해 오지도 않았겠지요.”

“하면 우리의 대응 방안은 뭐요?”

“몰라서 묻는 거요, 아니면 시험하려고 묻는 거요?”

“몰라서 묻는 것도 아니고 시험하려고 묻는 것도 아니오. 난 다만 위원장의 의견을 듣고 싶을 뿐이오.”

“드워프와 엘프를 끌어들여야 하오.”

“끄응!”

황제는 얼굴을 찌푸렸다.

“왜 그러시오?”

“데푸시와 이프리스가 아직 감옥에 있소.”

“그들은 차원 수리공으로 문 대륙에 다녀오지 않았소?”

사면을 시켜준다고 약속해 놓고 왜 아직 감옥에 잡아 두었느냐는 질문이었다.

“그 두 놈이 루시안을 형님이라고 부르고 있어서 어쩔 수가 없었소.”

“루시안과 친분을 맺었단 말이오?”

“공작의 자식들과 친분을 쌓으라고 함께 문 대륙으로 보낸 거였는데…….”

“루시안 그놈에게 안겨준 꼴이 됐다는 거구려.”

“그렇게 됐소. 하지만 그들을 죽이진 않았으니까 두 종족과 대화를 해 볼 수는 있을 거요. 아무튼 엘프와 드워프는 내가 맡을 테니까 마족과 천족과의 대화는 위원장이 맡도록 하시오.”

“알겠소이다.”

“그리고 문 대륙과 마계, 천계와 가로막혀 있는 차원의 벽을 제거해야겠소.”

“차원의 벽을 없애는 방법을 알아낸 거요?”

아론은 깜짝 놀랐다.

차원의 벽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는 제국 전체를 통틀어 한 명밖에 없고, 그 한 명이 바로 그이기 때문이었다.

“위원장은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황제는 떠보듯 슬쩍 말을 흐렸다.

“오직 10인 위원회 위원장 혼자만이 알고 있어야 하는 비밀이었소.”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족이나 천족도 몰랐단 말이오?”

“초대 회주이신 드반드쉬께서 천족과 마족에게는 알려주지 않았다고 하오.”

“그랬구려.”

“그런데 장벽을 없애려는 이유가 뭐요?”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해서요.”

“경각심?”

“우리도 마음만 먹으면 천계와 마계로 침공해 들어갈 수 있다는 경각심 말이오.”

“좋은 방법이군요.”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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