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
사실 황제는 카이우스 가문의 후예다.
카이우스 가문은 1백 년 전 신의 정원 내에서 벌어지는 권력 암투에서 패해 몰락했다. 그 가문의 후예를 찾아낸 사람은 헤이먼이었다. 그들은 카이우스란 성을 가이우스로 바꾸고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다. 신의 정원에서는 은밀하게 그들을 지원했다.
가이우스 가문은 받은 지원을 빠르게 자기네들 것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번영이 신의 정원 작품이란 사실을 모른다.
그랬던 자들이 지금은 천족이나 마족과 동등한 위치에 서 있다. 신의 정원의 힘으로 저런 황제를 만들었다는 생각에 뿌듯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그 일은 위원장께서 맡아주시오.”
“알았소.”
“서둘러야 하오.”
“걱정 마시오. 최단기간 내에 끝내도록 하겠소.”
“고맙소, 위원장. 잘해 봅시다.”
황제는 손을 내밀었다.
“물론이오.”
아론은 황제의 손을 잡았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맺혔다.
“그런데 그들은 괜찮겠소?”
손을 놓은 아론이 찻잔을 들며 물었다.
“누구 말이오?”
황제는 되물었다.
“두 공작을 비롯한 후작들 말이오.”
헬모트 공작은 예의상 해 본 말에 불과했는데, 너무 매몰차게 잘라버린 것 같았다.
“그들을 헤를리온 연구에서 배재시킨 것 말이오?”
“그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얻어내려면 참가시키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말이오.”
“귀족이 할 일이 있고, 황제가 해야 할 일이 있는 거요, 위원장. 그걸 구분하지 않으면 제국은 굴러가지 않소. 그리고 공작들 또한 그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소.”
“좋소. 그건 황제가 알아서 하시오.”
아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 거요?”
“천계와 마계를 가로막고 있는 차원의 벽을 없앤 후 다시 연락하겠소.”
아론은 곧바로 워프 마법을 펼쳐 자리를 떴다.
“좋군.”
혼자 남은 황제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페르카 자네도 몰랐는가?”
황제는 어딘가에 대고 낮게 물었다.
“대륙의 역사 말입니까?”
“그렇네.”
“전혀 몰랐습니다.”
방향을 알 수 없는 곳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랬군.”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할까요?”
“라파 말인가?”
“네.”
“들어가는 자들은 막지 말게.”
“나오지 못하게만 하란 말입니까?”
“그렇네.”
“알겠습니다, 마스터.”
“수고하게.”
황제는 찻잔을 다시 들어 올렸다.
황제는 찻잔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50대에 접어들면서 변화가 없다. 웃는 모습도 그대로고 주름도 그대로다.
“완벽한 노르카가 됐다는 뜻이지.”
황제의 얼굴에 싱긋 미소가 맺혔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우리 노르카도 나머지 세 정령 전사들과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지. 하지만 물, 불, 바람의 정령 전사들보다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단 한 번도 전면에 나서지 못했어.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승자는 누구인지…….”
그랬다.
땅의 정령왕 노칼리스가 탄생시킨 정령 전사 노르카는 다른 세 정령 전사에 비해 약했다. 그러다 보니 전쟁엔 참여하지 못하고, 보급을 담당했다. 전쟁 상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시키는 대로 했다.
휴도니아 대륙으로 넘어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노르카는 쉬지 않고 일했다. 인간, 드워프, 엘프보다 먼저 대륙 각처로 퍼져나가 땅을 일구고 씨를 뿌렸다. 그렇게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자 척박했던 휴도니아 대륙은 점차 옥토로 변해 갔다.
휴도니아 대륙이 안정되자, 프라넬 대평원에 있던 세 종족은 이주 계획을 세웠다. 그들이 세운 계획안에는 정령 전사를 없애기 위한 행칼이란 감옥도 포함돼 있었다.
일부 정령 전사들이 문 대륙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지만 노르카는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런데 인간과 엘프와 드워프들은 노르카까지도 제거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행칼을 탈출한 우리는 땅의 정령왕 노칼리스의 이름에 맹세를 했다. 이 땅에서 인간, 엘프, 드워프를 없애고 말겠다고. 이제 그 기회가 왔다.”
황제는 두 주먹을 불끈 틀어쥐었다.
그러고는 확고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 * *
라파에 감옥이 처음 생긴 건 건국 초기였다.
초대 황제였던 에이몬 황제는 그가 황제가 되는 걸 반대한 자들의 처리에 고심했다.
수십만 명이나 되는 자들을 전부 죽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힘을 기르면 다시 쳐들어올 게 분명한데 추방할 수도 없었다.
시야가 미치는 곳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장소가 필요했다. 그래서 선택된 곳이 바로 라파 산맥과 왈라크 산맥 중간 지점의 라마카 분지에 있는 고대 도시였다.
라마카 분지는 동서 60킬로미터, 남북 40킬로미터지만 동쪽, 서쪽, 남쪽 끝은 천여 미터 높이에 달하는 절벽으로 막혀 있다. 유일한 통로는 북쪽의 라파 산맥인데 그곳은 숲과 늪으로 이루어져 있어 길을 통하지 않고는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감옥으로 만들기엔 최고의 장소였다.
게다가 라마카 분지에는 팬타그램 형상으로 다섯 개의 던전이 있어 따로 감옥을 건설할 필요가 없었다.
에이몬 황제는 다섯 개의 던전 중 북쪽에 있는 던전에 바스티란 이름을 붙이고 죄수들을 수감했다. 감옥은 금세 채워졌다.
공간이 부족하자 두 번째 던전을 개발했다.
서쪽에 있던 던전은 에스티 감옥이라고 명명했다.
에스티 감옥에 수감한 자들은 주로 기사들이었다.
바스티 감옥과 에스티 감옥으로 상당히 효과를 본 황실은 동쪽에 있는 던전을 개발하여 세 번째 감옥을 만들었다. 그 감옥이 바로 흉악범들을 수감한 세스티 감옥이다. 이름 또한 라마카 분지 대신 라파라고 지었다.
그리고 전쟁 포로를 수감하기 위해 남쪽의 두 던전을 개발하여 네스티와 히스티라 이름 지었다.
라파에 사람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다섯 개 감옥이 완성된 후였다.
흉악범들 중에는 조직을 거느렸던 자들이 상당히 있었고, 그 조직원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그들을 상대로 하는 숙박업소와 술집이 생겨났다.
숙박업소와 술집은 다른 사람을 라파로 불러들였다. 그들은 바스티 감옥과 에스티 감옥에 수감된 자들의 가족과 부하들이었다.
라파의 규모는 점점 커졌다.
그렇게 발전해 가던 라파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된 것은 발몬 하이저 아이작 황제가 승하한 후였다.
정식 후계자가 아닌 자가 황제가 되면, 숙청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
가이우스 황제는 발몬 하이저 아이작을 따랐던 자들을 이런저런 죄목을 붙여 라파의 감옥에 투옥했다.
그러자 그들을 따랐던 자들도 대거 라파로 들어갔다. 그 사건으로 인해 50만 명에 달했던 라파 인구는 150만 명으로 무려 세 배나 늘어났다.
갑작스런 인구 증가는 라파를 무법천지로 만들었다. 하루에도 수십 건씩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하지만 황실에서는 개입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부추기기도 했다.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 라파에서 살아가는 자들은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죄수들과 관계를 맺고 있어, 제국에 해가 됐으면 됐지 도움이 되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런 자들의 수가 줄어든다는 건 황실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오히려 황실은 혼란을 더욱 부추기기 위해 라파를 자유 도시로 만들었다. 자유 도시란 제국의 법률을 지킬 필요가 없는 도시를 말한다. 라파에서 지켜야 할 건 나갈 때 당국에 신고하여 허락을 받는 것 단 한 가지였다.
그 외는 모든 것이 자유였다.
자유 도시 라파.
김필도와 알마니가 라파에 도착한 것은 세 개의 달이 한꺼번에 뜨기 시작하는 혼돈의 계절 초입이었다.
그는 지금껏 함께 여행을 했던 리시아, 베른, 쿠다 아베다를 드보르칸 후작과 함께 천둥의 성으로 보내고 알마니만 데리고 이곳으로 온 것이다.
“라파는 처음이야?”
김필도는 ‘라파로 가는 길’이라고 쓰인 이정표가 서 있는 숲을 바라보며 물었다.
“크로 대원일 때 몇 번 온 적이 있어요.”
“어때?”
“길은 저기가 유일해요.”
알마니는 숲 사이에 나 있는 널따란 길을 가리켰다. 길은 마차 두 대가 오갈 정도로 넓었다.
“저 길이 아니면 들어가거나 나올 수 없다는 거야?”
“들어가는 건 모르겠는데 나오는 건 저 길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해요.”
“그래?”
김필도는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건……?”
길로 들어선 그는 깜짝 놀란 얼굴로 알마니를 보았다.
“알아차리셨어요?”
알마니는 물었다.
“마법이 펼쳐진 것 같은데, 맞아?”
“네.”
알마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마법인데?”
“환영 마법이래요.”
“이 길에 환영 마법이 펼쳐져 있다는 말이야?”
“그럴 거예요.”
“탈출 방지용?”
“라파로 들어가는 건 자유지만 나올 땐 반드시 허락을 받아야 해요.”
“허락받지 않은 자들에게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네?”
김필도는 몸을 돌렸다.
“……?”
문득 그의 얼굴이 멍해졌다.
조금 전 걸어왔던 길은 사라지고, 울창한 소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찬 숲이 펼쳐져 있었다.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갈 확률이 1퍼센트 정도래요.”
기다렸다는 듯이 알마니가 대답했다.
“저게 전부가 아니겠지?”
김필도는 사라진 길을 가리키며 물었다. 길이 사라진 것 말고도 또 다른 장치가 돼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 이상은 저도 잘 몰라요.”
“그렇겠지.”
김필도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사라졌던 길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안으로 걸어가는 방향일 때는 나타나고, 나가는 방향일 때는 사라지는 마법의 길이었다.
“이 길의 길이는 얼마나 되지?”
“10킬로미터란 사람도 있고, 20킬로미터라는 사람도 있어요.”
“거리 또한 유동적이란 말이네.”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환영 마법은 눈이 아닌 뇌를 속이는 마법이다. 그렇다면 주위 환경뿐 아니라 거리까지도 속였을 게 분명하다.
“그럴 거예요.”
“그럼 라파 주위가 전부 마법 공간일지도 모르겠네.”
“아마도요.”
“재미있는 곳이네.”
김필도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이 라파로 들어가는 입구에 도착한 것은 5시간 후였다. 그곳에는 출입 관리소란 간판이 걸려 있었는데 그 앞에는 길게 줄이 늘어서 있었다.
“원래 들어가는 사람이 이렇게 많아?”
줄 뒤편으로 서며 김필도는 물었다.
“인구가 150만이나 되는 거대 도시잖아요.”
“대부분 장사꾼들이란 말이지?”
김필도는 늘어서 있는 자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커다란 봇짐을 지고 있는 자들도 있고, 마차를 끌고 온 자들도 있었다.
문득 김필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친밀한 느낌이 드는 자들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장사꾼들 사이에 섞여 있지만 몸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어쩔 수가 없었다. 아마도 녀석들의 소매를 걷어보면 문신이 빼곡하게 새겨진 팔이 나올 것이다.
그 중 한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사내는 키가 170센티미터쯤 되어 보이는 단신이었다. 하지만 석상이 서 있는 것처럼 다부진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허리춤에는 먹물처럼 검은 검 한 자루가 장식처럼 꽂혀 있었는데, 다부진 체격과 상당히 어울렸다.
“안녕하쇼.”
김필도는 가볍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나보고 하는 말인가?”
중년 사내는 김필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와 비슷한 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오.”
김필도는 엉덩이 쪽에 걸쳐 두었던 설향을 앞으로 돌렸다.
“멋진 검이구먼.”
“난 루시안이오.”
김필도는 자신을 소개했다.
“루시안?”
사내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그는 다시 김필도를 보았다.
“맞소.”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자네가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대공이란 말인가?”
“자네?”
김필도의 눈초리가 치켜 올라갔다. 대공인 줄 알면서 반 하대를 하는 중년 사내의 말투 때문이었다.
김필도는 설명을 요구하는 얼굴로 알마니를 보았다.
“라파는 자유 도시잖아요.”
“자유 도시란 의미가…….”
“밖에서 사용하는 신분은 라파로 들어가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네.”
대답은 중년 사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럼 라파에서 쓸모 있는 게 뭐지?”
김필도는 사내를 바라보며 물었다.
“돈과 검이네.”
“진짜 마음에 드는 곳이네.”
김필도는 헤벌쭉 웃었다.
“라파로 들어가는 이유를 알고 싶은데, 말해 줄 수 있겠는가?”
“며칠 지나지 않으면 알게 될 거야.”
“다음!”
바로 그때 안쪽에서 나직한 외침이 들려왔다. 중년 사내의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