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
“나는 테이큰 프릭스네.”
사내는 자기 이름을 말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테이큰 프릭스라고 알아?”
김필도는 건물 안에 시선을 묶어 둔 채 물었다.
“블랙 소드 파 두목 이름이에요.”
“블랙 소드 파?”
김필도는 히죽 웃었다.
연안파, 칠성파, 무등산파 등 무슨무슨 파로 끝나는 단어는 아주 친숙하다. 빈말이 아니라 라파에서는 정말로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라파를 장악하고 있는 다섯 파벌 중 한 곳이에요.”
“다른 파가 네 개나 더 있단 말이야?”
“그래요.”
“설명해 봐.”
“다음!”
알마니의 입이 열리기 전에 건물 안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음에 듣자.”
김필도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기사 3명과 행정관으로 보이는 자 두 명이 앉아 있었다.
“이름.”
행정관으로 보이는 자 중 한 명이 물었다.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대공이다!”
“나는 알마니 모린드 펠라카에요.”
두 사람이 이름을 대자 관리와 기사들은 깜짝 놀랐다.
그들은 김필도가 도착하면 보고하라는 명령을 하루 전에 받았다. 하지만 김필도가 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공의 신분을 가진 자가 들어가기에는 라파는 너무 위험한 도시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김필도가 나타난 것이다.
“깜짝 놀란 걸 보니 나에 대해 명령이 내려온 모양이지?”
김필도는 사내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 아닙니다. 안으로 들어가려면 저곳으로 나가면 됩니다.”
이름을 물었던 사내가 안쪽으로 나 있는 문을 가리켰다.
“명령을 하달받은 모양이네.”
김필도는 피식 웃으며 사내가 가리킨 곳으로 걸어갔다. 기다리고 있던 알마니가 문을 열었다.
문밖은 울창한 수림이었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꽉 들어찬 나무 사이로 폭이 6미터가량 되는 직선 길이 나 있었다.
길 끝에 있는 성문까지의 거리는 2백 미터가량 되어 보였다.
“가자.”
김필도는 성문을 향해 걸어갔다.
3미터 높이에 달하는 성문의 위쪽에는 커다랗게 ‘라파’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마스터!”
성문 앞에 도착한 순간 안쪽에서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김필도는 시선을 들었다.
사내 1백여 명이 좌우로 늘어선 채 고개를 숙이고 있고, 그 사이를 테이큰 프릭스가 걸어가고 있었다.
“우리도 갈까?”
김필도는 성문을 통과해 들어갔다.
성문 안쪽에는 10여 명이 서 있었다.
테이큰보다 먼저 들어왔던 자들인데 덩치들에게 제지를 받은 모양이었다.
김필도는 걸음을 옮겼다.
테이큰이 아직 빠져나가지 않아서인 듯 사내들은 아직 고개를 숙인 채였다.
“자세가 틀렸어.”
김필도는 좌우를 보며 낮게 말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저건 상관에게 하는 인사가 아니라고.”
“전에 제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해야 한다는 거예요?”
뒤따르던 알마니가 물었다.
“기억해?”
“두 팔은 늘어뜨리고, 허리를 90도로 꺾어야 한다고 했잖아요.”
“또 뭐라고 했지?”
“가급적이면 큰형님이나 회장님이라고 부르라고도 했죠.”
“맞아. 그렇게 불러야 격이 살아.”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찌릿!
그때 갑자기 오른편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김필도는 고개를 돌렸다.
사내 중 한 명이 고개를 들고 이편을 쏘아보고 있었다. 190센티미터의 거구에 금발 사내는 블랙 소드 파 부두목인 카곤이었다.
“저 친구가 아직 안 빠져나갔는데 고개를 들어도 괜찮아?”
김필도는 앞서 가는 테이큰을 가리키며 물었다.
“감히!”
카곤은 싸늘한 눈으로 김필도를 쏘아보았다.
“내가 이 안으로 들어온 게 기분 나쁜 모양이지?”
“여긴 우리 블랙 소드 파 영역이다, 놈!”
카곤은 차갑게 소리쳤다.
“놈?”
김필도는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제4장 리처드 헤라칸 아이작
“지금 내게 놈이라고 한 거야?”
김필도는 카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젊은 놈이 귀까지 먼 모양이구나. 맞다, 촌놈! 놈이라고 했다.”
카곤은 김필도를 빤히 쏘아보며 대답했다.
그는 테이큰으로부터 김필도의 신분에 대해 듣고, 시험해 보라는 명령을 받았다. 어떻게 시비를 걸까 내심 고민하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김필도가 블랙 소드 파 대열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원래 행사를 하고 있는데 끼어드는 건 도전으로 간주한다. 비록 외출했던 두목이 돌아와 마중을 나온 상황이고, 행사장으로 길을 사용하는 특수한 경우이긴 하지만, 안으로 들어온다는 건 엄연한 영역 침범이고 도전 행위다. 더구나 발탄 제국의 대공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퍼져 있어, 다른 파의 밀정들이 주변에 은신해 있다.
그들은 블랙 소드 파에서 대공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블랙 소드 파의 명예를 위해서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나는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대공이다, 평민.”
“여긴 자유 도시 라파다, 놈!”
“알마니.”
“힘 있는 놈이 최고인 곳이 라파예요, 마스터.”
알마니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강자 존이라고?”
“네.”
“강한 놈이 장땡이라 이거지.”
김필도는 엉덩이 쪽에 걸쳐두었던 설향과 단도를 풀어 알마니에게 건넸다.
“한바탕 하려고요?”
“힘 있는 놈이 장땡이라며?”
“블랙 소드 파는 조직원의 수가 1천5백 명인데 그 중 기사 출신이 1천 명이에요. 그들 중 기갑 기사는 2백 명이고요.”
“언제 적 정보야?”
“제가 거기에 있을 때요.”
알마니가 말한 거기란 크로였다.
“지금은 더 늘어났을 가능성이 높겠지?”
“라파의 인구가 세 배 늘었으니까요.”
“그럼 블랙 소드 파 대원도 3배가량 늘어났다고 보면 되겠네?”
김필도는 방긋 웃으며 카곤을 향해 걸어갔다.
“그 돼지 새끼 뒤에 4천5백 명이나 있어요, 마스터!”
“킥!”
허공에서 나직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돼지 새끼라는 알마니의 말에 웃음을 터뜨린 사람은 허공에 숨어 있는 라헤나였다. 라헤나와 다란은 허공에 숨어 계속해서 김필도를 따라다니는 중이었다.
“지금 웃음이 나와요?”
알마니는 라헤나가 숨어 있는 허공을 보며 눈을 흘겼다.
-23만 명을 향해 홀로 달려가신 분이잖아요.
“마법도 펼칠 줄 아세요?”
라헤나의 사념이 머릿속으로 파고들자 알마니는 깜짝 놀랐다. 상대방의 머릿속으로 생각을 전달하는 텔레파시 마법은 최소한 6클래스 마스터가 돼야 펼칠 수 있는 고차원의 마법이었던 것이다.
-내가 펼칠 수 있는 몇 가지 마법 중 하나예요.
“인비지빌리티 마법처럼요?”
-그래요.
“부럽네요.”
-알마니도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잖아요.
“내가 이기면 어떻게 되지?”
그때 전면에서 김필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 사람은 시선을 돌렸다.
김필도는 카곤과 3미터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다른 대원이 자네에게 도전을 하게 될 거네.”
김필도의 질문에 대답을 한 사람은 블랙 소드 파 두목 테이큰이었다.
“4천5백 명이 도전을 한다는 거야?”
“4천5백 명이 아니고 6천 명이네.”
“6천 명을 다 박살내려면 시간깨나 걸리겠네.”
김필도는 몸을 풀듯이 머리를 돌렸다.
“……?”
테이큰은 일순 멍해졌다.
그가 조직원의 수가 6천 명이라고 한 것은, 싸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니 포기하라는 경고였다. 그런데 시간깨나 걸리겠다고 받아친 것이다. 그것도 아주 태연하게.
‘허당이 아니라는 소린가?’
테이큰의 눈빛이 깊어졌다.
‘두고 보면 알겠지.’
테이큰은 차분한 얼굴로 김필도와 카곤을 지켜보았다.
그때 카곤을 김필도를 향해 몸을 날리는 중이었다.
그 역시 김필도처럼 맨손이었다.
몸을 날리는 카곤의 얼굴엔 조소가 번져 있었다.
조직의 이인자가 되면서 검을 차고 다니긴 하지만 원래 그는 맨주먹으로 싸우는 박투가였다. 그의 눈에 비친 김필도는 두 자루의 검을 가지고 다니는 검사였다.
검사가 자신의 강점인 검을 내려놓고 맨손으로 나서고 있으니 우스울 수밖에 없었다.
“그 매끈한 얼굴을 박살내 주마.”
순식간에 김필도 앞에 선 카곤은 오른손 주먹을 찔러 넣었다.
슈악!
박투가 출신답게 카곤의 주먹은 날카로운 바람 소리를 내며 김필도의 얼굴로 쏘아져 갔다.
김필도는 고개를 옆으로 틀어 가볍게 피하며 카곤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휙!
카곤은 곧바로 왼 주먹을 쳐올렸다.
“어퍼컷이네.”
김필도는 빙그레 웃었다. 각이 예리한 걸 보면 녀석은 제법 주먹을 쓸 줄 아는 자였다.
“하지만…….”
김필도는 상체를 뒤로 젖혔다.
휘익!
날카로운 소성을 남기고 카곤의 주먹이 허공으로 쏘아져 갔다.
“기다렸다, 놈!”
김필도의 상체가 뒤로 넘어가자 기다렸다는 듯 카곤은 오른손 주먹을 내리찍었다. 김필도의 얼굴을 향해 쏘아져 가는 카곤의 주먹은 도끼를 연상케 했다.
“쿡!”
김필도의 입가에 방긋 미소가 맺혔다.
“웃어?”
카곤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웃을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웃는다는 건 비장의 수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얼른 김필도의 전신을 살폈다.
“곰팅이.”
카곤이 시선을 돌린 짧은 순간 일이 벌어졌다. 그의 주먹의 경로에 있던 김필도의 얼굴이 사라지고, 대신 불끈 틀어쥔 김필도의 주먹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크로스 카운터였다.
스악!
먼저 카곤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퍼억!
이어 김필도의 오른손 주먹이 카곤의 턱에서 둔탁한 소성을 남겼다.
“커억!”
카곤은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붕 뜨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는 눈을 감지 않았다. 박투가의 기본은 어떤 순간에서도 눈을 감지 않는 것이었고, 지금껏 그 기본을 지켜왔던 것이다. 문득 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스아악!
그리고 거무튀튀한 뭔가가 다시 얼굴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거무튀튀한 그것이 사람의 발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 안…….”
카곤은 양손을 급하게 들어 올렸다. 발뒤축의 목적지 또한 그의 얼굴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 몸이 그랬던 것처럼 양손 또한 그의 의지를 따르지 않았다.
다급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카곤의 얼굴로 김필도의 발뒤축이 박혀들었다.
퍼억!
“크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카곤의 신형이 등부터 땅으로 떨어졌다. 강한 충격이 왔지만 이미 정신 줄을 놔 버린 카곤은 느끼지 못했다. 이미 싸움은 끝난 상황이었다.
하지만 김필도의 공격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카곤의 얼굴을 찍었던 발을 한껏 오므렸다. 그러고는 그 상태로 카곤의 얼굴을 향해 무릎을 찍어 넣었다.
퍼억!
이번엔 비명도 없었다. 피만 사방으로 튀었다.
몸을 일으킨 김필도는 왼손으로 카곤의 멱살을 쥐고 약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오른손을 뒤로 뻗었다.
“카곤은 이미 저항 능력을 상실했다!”
김필도를 바라보던 테이큰이 소리쳤다.
“그건 니 생각이고. 죽기 전에는 저항할 능력이 남아 있는 거야.”
김필도는 오른손 주먹을 힘차게 꽂아 넣었다.
“커억!”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카곤은 정신을 차렸다.
“멈춰라!”
“멈춰라!”
주위에 있던 조직원들이 일제히 검을 뽑으며 소리쳤다.
“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들이!”
지켜보던 알마니가 아공간을 열어 가위를 꺼내 들었다. 양측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누구라도 한 명 움직이면 곧바로 칼부림이 시작될 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