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161화 (161/225)

# 161

제5장 항해를 시작하기 전에

“접니다, 소장님.”

“들어와!”

넬은 찻잔을 내려놓고, 출입문을 바라보았다.

문이 열리고 다부진 체격의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세스티 감옥 부소장 베틀러였다.

“조금 전에 프리우스 대공께서 일행 세 명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지금은 어디 있지?”

“감옥 동쪽에서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여기로 오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으음!”

넬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는 복잡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건 뭡니까?

-이 돈이면 새로운 곳에 가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네.

-떠나란 말입니까?

-캐서린은 죽었고, 나 또한 얼마 살지 못할 거네. 이곳에 있으면 자네들 또한 죽임을 당하게 될 거네.

-죽음은 두렵지 않습니다, 성주님. 아니 천둥의 성으로 올 때부터 이미 죽음은 각오했습니다.

-내가 죽고 나면 루시안은 철저하게 혼자가 될 거네. 난 루시안에게 아무것도 물려주지 않을 생각이네. 별일이 없다면 루시안은 이곳 천둥의 성에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게 될 거네. 하지만 루시안이 천둥의 성을 나오고 세상의 중심에 선다면 한 번만 관심을 가져 주게.

-성주님.

-부탁하겠네.

20년이 넘었다.

세상의 중심에 선다면 한 번만 관심을 가져달라고 하였던 그 말은 유언이 됐다. 하지만 그동안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에 대해서는 잊고 살았다. 아니 기억 속에 묻었다. 그런데 그가 이곳으로 오고 있단다.

“성주님은 유언을 남기신 거였어.”

똑똑똑!

그때 문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넬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고 세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왔구먼.”

안으로 들어온 자는 라이드, 솔트, 릭이었다.

“오지 않을 수 없었네.”

라이드는 넬 건너편으로 앉으며 말했다.

세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자 베틀러는 차를 준비했다.

“전 나가 있겠습니다, 소장님.”

“베틀러 자네도 앉게.”

“전…….”

베틀러는 주위의 눈치를 살폈다.

“프리우스 대공에 관한 거니까 베틀러 자네도 알 권리가 있네.”

“알겠습니다, 소장님.”

베틀러는 자리에 앉았다.

“오늘 라파에 들어왔고, 지금 이곳으로 오는 중이라고 하더구먼.”

베틀러가 자리에 앉자, 라이드가 입을 열었다.

“이곳으로 오는 중이 아니라 이미 들어왔네.”

“벌써 들어와 계신단 말인가?”

“그 보고를 하러 베틀러가 온 거였네.”

“그랬구먼.”

“어떻게 할 참인가?”

넬은 일행을 보며 물었다.

“그에 대한 걸 논하기 전에 할 말이 있네.”

“중요한 건가?”

“아이작 가문의 후손이 나타났네.”

“아이작 가문의 후손?”

넬은 깜짝 놀랐다.

“그러니까…….”

라이드는 조금 전 리처드를 만났을 때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렇네. 아울러 우리에게 공작 자리를 제안했네.”

“뭐라고 대답했는가?”

“생각해 보겠다고만 해 두었네.”

“어떻게 할 생각인가?”

“먼저 대공을 만나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하세.”

넬은 고개를 돌려 베틀러를 보았다.

“어디로 안내할까요?”

“환영의 방으로 안내하게.”

“알겠습니다, 소장님.”

베틀러는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한편.

세스티 감옥 안으로 들어간 김필도 일행은 벌판을 가로지른 후 지하로 나 있는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계단 아래쪽 끝은 백색의 공간과 이어져 있었다.

“익숙하지 않아요?”

알마니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마나의 움직임이 거의 느껴지지 않은 공간. 공중 정원의 창고가 있던 장소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마법 공간이라는 거지?”

김필도는 되물었다. 그 역시 알마니와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네.”

“라헤나 생각은 어때요?”

김필도는 라헤나를 돌아보았다.

“마법 공간 맞아요.”

라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마법 공간을 창조해 내려면 몇 서클이어야 하죠?”

“마법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최소 8클래스는 돼야 해요. 하지만 이런 마법 공간은 8클래스 마법사라고 해도 만들 수 없어요.”

“왜죠?”

“여기에 펼쳐진 마법은 인간의 마법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인간의 마법이 아니라고요?”

“네.”

“그럼?”

“정령 마법이에요.”

“정령 마법과 인간이 익힌 클래스 마법에는 차이가 있어요?”

“마나의 활용에서 차이가 나요.”

“어떻게요?”

“인간의 마법은 마나를 왜곡시켜 강한 힘을 만들어 내지만 정령 마법은 마나의 양을 조절해서 힘을 만들어 내요.”

“이를테면?”

“화염 마법을 펼칠 때는 땅, 대지, 바람의 마나는 그대로 두고 불의 기운만 비정상적으로 증폭시켜요.”

“인간의 마법도 그렇지 않나요?”

“겉으로 보기엔 같은 것 같지만 마법 지팡이 안에서는 엄청난 왜곡이 일어나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이 마법을 펼칠 때 마나 왜곡이 일어나는 장소는 마법 지팡이 안이라는 거군요.”

“맞아요.”

“그럼 이곳 마법 공간은 어떻게 된 거죠?”

“네 가지 마나의 양을 조절하면서 섞다 보면 어느 순간 전혀 다른 새로운 공간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 공간에 약간의 변형을 가하게 되면 이런 장소가 만들어져요.”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는 곳인데요?”

“수십 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미로 공간이에요.”

“미로 공간이라면 탈출을 막기 위한 방이군요.”

“그런 것 같아요. 아마 저 건너편에 있는 누군가는 우리를 볼 수 있을 거예요.”

라헤나는 백색의 공간 안쪽을 가리켰다.

“그럼 우릴 보는 누군가가 꺼내 주지 않으면 우린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겠군요.”

“어쩌면.”

“그런 거요?”

김필도는 전면을 향해 물었다.

“누가 있어요?”

라헤나는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아무런 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

“다섯 명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어요.”

김필도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어 성큼성큼 걸었다.

2분 정도 걸었을 때 일행 앞에 테이블과 의자가 나타났다. 두 테이블은 약 3미터 간격을 두고 놓여 있었다.

오래전에 만들어진 물건인 듯 고풍스러운 느낌이 묻어났다. 테이블 한편에는 의자 네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의자 또한 테이블과 마찬가지로 세월의 냄새가 풍겨 나왔다. 의자 앞쪽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에선 희뿌연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쪽은 다섯 개네요?”

라헤나는 건너편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그쪽 역시 같은 크기의 테이블이 놓여 있었는데 의자는 5개였다.

“다섯 명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고 했잖아요.”

김필도는 헬칸을 테이블 위에 놓고 의자에 앉았다. 잠시 건너편 테이블을 바라보던 그는 찻잔을 들었다.

두 개의 테이블과 서로 마주 보도록 놓인 의자. 토론이나 회의를 위한 배치였다.

찻잔을 내려놓는 순간, 다섯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군.”

김필도는 나타난 자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회색 머리의 건장한 체격의 중년인은 넬 아저씨라고 불렀고, 금발의 왜소한 중년인은 라이드 아저씨, 은발에 작은 키의 중년인은 솔트 아저씨, 갈색 머리에 주먹코 중년인은 릭 아저씨라고 불렀다.

이편을 가만히 쳐다보고 서 있는 네 명은 엄마 호위들이었다.

“훌륭하게 성장하셨군요!”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네 사람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넬이었다.

“넬 아저씨는 많이 늙으셨네요.”

“벌써 20년이 넘었으니까요.”

“그렇네요. 걷는 것도 제대로 못했던 내가 이런 걸 들고 다니게 됐으니까.”

김필도는 옆에 둔 헬칸을 슬쩍 들어 올렸다가 놓았다.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라파가 아니면 활동하는 게 쉽지가 않아서…….”

“소식이 없다는 건 잘 살고 있다는 뜻이잖아요. 그리고 아저씨들이라면 어딜 가도 잘살 거라고 믿었어요.”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고 계셨으면 좀 더 일찍 찾아오시지 그러셨습니까.”

이번엔 라이드가 말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아버진 그런 거는 말을 안 해 주고 쓸데없는 것만 잔뜩 말해 주었지 뭐예요.”

“우리가…… 이곳에 있는 걸 몰랐습니까?”

“전혀.”

“그럼 여긴 어떻게?”

“동생들 찾으러 왔어요.”

“동생이라고요?”

“전에 나와 함께 문 대륙으로 임무를 떠났던 녀석들 말이에요.”

“아! 차원수리공을 말하는 거군요.”

“금세 꺼내줄 줄 알았는데, 황제가 뜸을 너무 들이더라고요. 시절도 어수선하고 감옥에 있으면 무슨 일을 당해도 하소연할 수도 없잖아요.”

“그들을 데리러 온 겁니까?”

넬이 물었다.

“슬쩍 빼내 가려고 했는데, 여기 소장이 넬 아저씨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얼굴이나 볼까 하고 무작정 한가운데로 갔는데, 이곳으로 들어왔네요.”

“제가 도련님을 이쪽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랬군요. 아무튼 나도 그렇고 아저씨들도 잘 살고 있는 것 같아서 좋네요.”

“저희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넬은 잠시 뜸을 들였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세요.”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미래를 말하는 거예요?”

“황제는 이콰라 공작을 공격한 도련님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잖아요.”

“살아남을 자신은 있습니까?”

“이 녀석이 몇 킬로그램인 줄 아세요?”

김필도는 헬칸을 가리켰다.

“그건 왜?”

넬은 의아한 얼굴로 김필도를 보았다.

“헬칸이란 녀석인데 40킬로그램 나가요.”

“40킬로그램이라고요?”

넬은 깜짝 놀랐다. 아울러 다른 네 사람 또한 놀란 눈으로 헬칸을 보았다.

말이 좋아 40킬로그램이지, 그 정도면 마른 여자 몸무게와 맞먹는다. 그런 엄청난 무게를 휘두른다는 건 인간, 아니 마족이나 천족이라도 불가능할 터였다. 그런 검을 가지고 다니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문 대륙으로 갈 때만 해도 이놈을 들 힘조차 없었어요. 누군가 휘두른 검에 찔려 낭떠러지로 떨어지기까지 했고요. 그런데 지금은 이놈으로 마족을 잡고 천족을 잡아요.”

“자신 있다는 말이군요.”

“자신 있다는 게 아니에요, 넬 아저씨.”

“그럼?”

“어둠 속에 갇혀 백 년을 사는 것보다, 햇빛 속에서 이 녀석을 휘두르며 1년을 사는 게 훨씬 낫다는 거예요.”

김필도는 남은 차를 한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러고는 일어날 준비를 했다.

“한 분을 만나보시겠습니까?”

“날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나 보죠?”

“그렇습니다.”

넬은 뒤편으로 가더니 세 사람을 데리고 왔다.

“이분은…….”

“내가 하겠네. 나는 리처드 헤라칸 아이작이네.”

“네?”

김필도는 깜짝 놀랐다.

그가 놀란 건 넬 일행처럼 아이작이란 성 때문이 아니었다. 정작 놀란 이유는 헤라칸이란 성이었다. 보통 처가가 대다한 집안이거나, 대를 이를 아들이 없는 경우, 사위가 성을 잇게 되는데, 그때는 본래의 성 앞에 처가의 성을 놓게 된다.

그런데 리처드란 자는 리처드 헤라칸 아이작이라고 하였다. 그 말은 곧 처가가 헤라칸 공국이란 뜻이다.

“나는 발몬 하이저 아이작 그분 동생의 아들이네. 전부 죽은 걸로 알려졌지만 나만…….”

“헤라칸이란 성은 어떻게 된 겁니까?”

김필도는 물었다.

“아이작이란 성이 궁금했던 게 아니었는가?”

리처드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는 김필도가 다른 사람들처럼 아이작이란 성을 쓰고 있는 사실에 대해 궁금할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뜻밖에도 헤라칸이란 성에 대해 물어온 것이었다.

“궁금하긴 하지만 우선순위는 아니오.”

촌수로 따지면 리처드는 김필도 어머니의 사촌이다. 하지만 김필도의 말투는 변하지 않았다. 루시안 본인이 아니란 이유도 있지만 느닷없이 나타난 리처드란 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