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
“헤라칸 가문을 아는가?”
“약간의 인연이 있소.”
“그랬구먼. 내 부인이 헤라칸 가문의 마지막 후예였네.”
“그분은 돌아가신 거요?”
“그렇네.”
“유감이군요.”
김필도는 입맛을 다셨다.
대충 일이 정리되면 헤라칸 공국을 찾아가 아무탄에 대해 말을 해 주고 원한다면 도움도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헤라칸 가문은 이미 역사 속으로 떠난 후였다.
“내가 있으니까 상관없네.”
“그렇군요. 그런데 날 보려고 한 이유가 뭡니까?”
“나는 30년 전부터 배를 만들기 시작했다네. 그러다가 얼마 전에 완성돼 진수식을 했네.”
“지금은 선원을 모집 중인 모양이군요.”
“여기에 있는 네 사람이 첫 번째 선원일세.”
리처드는 넬 일행을 가리켰다.
그는 넬 일행이 김필도 때문에 망설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울러 넬 일행을 끌어들이면 김필도 또한 자동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나도 그 배에 타란 말입니까?”
“그랬으면 좋겠네.”
“내겐 아무것도 없는데?”
“아니네, 자넨 아주 많은 걸 가지고 있네.”
“내가 뭘 가지고 있단 말입니까?”
“드보르칸 후작과도 친분이 있을 뿐 아니라 마족과 천족마저도 겁을 내는 신기 헤를리온의 주인이기도 하네.”
“쿡!”
김필도는 피식 웃었다.
빈털터리를 끼워 주려고 하기에 웬일인가 했다. 그런데 그게 바로 헤를리온 때문이었다.
“자네가 가진 헤를리온을 연구해서 수를 늘릴 수 있다면 천족이나 마족을 상대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네. 물론 자네가 허락해야 하겠지만.”
“황제가 되고 싶은 겁니까?”
“자네가 허락한다면.”
“내 허락?”
뜻밖의 대답에 김필도는 의아했다. 그는 리처드가 고개를 끄덕일 줄 알았던 것이다.
그는 다시 질문을 했다.
“왜 내 허락이 필요한 거죠?”
“가이우스 가문에게 황제 자리를 빼앗기지 않았더라면 자네가 황제가 돼 있었을 테니까.”
“우리 엄마가 여왕이 됐을 거란 말이군요.”
“그랬을 거네.”
“원래 이런 경우엔 날 황제로 옹립한 후에, 자연스럽게 황권을 넘겨받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내 성이 아이작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했을 거네.”
“프리우스라는 성을 가진 녀석에게는 황제 자리를 주지 못하겠다는 거군요.”
“황제가 된다면 통치할 자신은 있는가?”
“제국을 통치하는 건 황제가 아니라 아랫사람이 하는 겁니다, 리처드 경. 황제는 능력 있는 일꾼을 뽑는 안목만 있으면 된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자신이 있다는 말이구먼.”
“맡겨 주면 못할 것도 없지요.”
“그럼 자네가 하게.”
“……?”
김필도는 멍한 얼굴로 리처드를 보았다.
그가 황제 이야기를 꺼낸 건 결코 황제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리처드란 사람이 만든 조직에 들어가는 게 마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리처드는 황제 자리를 넘기겠다고 말한 것이다.
“진담입니까?”
김필도는 물었다.
“발탄 제국 황실의 적통은 자네 아닌가.”
“재미있는 말이군요.”
김필도는 빙그레 웃었다.
리처드의 얼굴은 ‘니가 뛰어 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지.’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황제 자리를 맡겨도 수행하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진심이네.”
“그럼 이번엔 내가 제안을 해야겠구려. 내 배에 오르시겠소?”
김필도의 말투가 바뀌었다.
“……!”
일순 리처드는 할 말을 잃었다. 설마 김필도가 배를 운운할 줄은 전혀 생각지 못한 탓이었다. 게다가 말투까지 공대에서 반공대로 바뀌었다.
다른 이들 또한 다르지 않았다. 넬 일행은 황당한 얼굴로 김필도를 보았다.
“자네도 배를 만들었는가?”
이내 정신을 수습한 리처드가 물었다.
“아직 완성하진 못했소.”
“그런데 선원을 구한단 말인가?”
“내가 구하는 건 선원이 아니라 배를 함께 만들어갈 사람이오, 리처드 경.”
“배를 함께 만들어간다고?”
리처드는 둔기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강한 충격을 받았다. 완성된 배에 태우는 선원은 고용인이지만, 함께 배를 만들면 전부가 주인이 된다.
고용인과 주인은 위기의 순간이 닥쳤을 때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폭풍이 몰아쳐 배가 좌초될 위기에 처하게 되면 고용인들은 쉽게 배를 버리지만 주인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주인은 마지막 순간까지 배를 구하려고 노력을 하고, 심지어 배와 함께 죽기도 한다.
자신은 혼자 배를 만들고 고용인을 구하고 있는데 김필도는 전부가 주인인 배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자신과 김필도는 출발선부터가 달랐다.
“드보르칸 후작은 키를 맡아 만들고 있소이다.”
“그가 나아갈 방향을 정한단 말인가?”
“그리고 암흑상단의 다르는 돛대를 만들고 있소이다.”
“아, 암흑상단마저 끌어들였단 말인가?”
리처드는 경악했다.
대륙3상의 한 곳인 암흑상단. 신의 정원 소속인 그들은 신비에 쌓여 있을 뿐 실체를 아는 자도 드물다. 그런데 김필도는 그들마저 끌어들였다고 한다.
놀라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끌어들인 정도가 아니라 우린 이미 전쟁을 시작했소. 헬싱턴 영지 연합군을 물리쳤고, 어둠의 상단을 전멸시켰소.”
“헐!”
“맙소사!”
“허!”
리처드를 비롯한 넬 일행은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콰라 공작가가 당하고, 23만 명으로 이루어진 영지 연합군이 당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건 바로 암흑상단의 다르 덕분이었던 것이다.
“내가 여기로 온 건 배의 몸통을 담당할 자들을 구하기 위해서요.”
“그게 우리란 말인가?”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리처드는 멍한 얼굴을 한 채였다.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군요.”
“아니라고?”
“몸통은 내 동생들이 만들어 줄 거요.”
김필도는 넬을 보았다.
“죄수들을 데리고 오란 말씀이십니까?”
넬은 물었다.
“나머지는 대기시키고, 데푸시하고 이프리스는 이곳으로 데려다 주었으면 해서요.”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넬은 자리를 떴다.
넬이 돌아온 건 20분 후였다. 넬 뒤에는 데푸시와 이프리스가 서 있었다.
김필도를 발견한 둘은 성큼성큼 걸어 그 앞에 섰다.
“오셨습니까, 형님!”
“형님!”
데푸시와 이프리스는 김필도를 향해 직각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래, 그동안 고생 많았다. 그 쫀쫀한 양반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내가 직접 왔다.”
“그럼 여기서 나가는 거요?”
“그동안 애들 좀 모았냐?”
“쟤들 있는 데서 말해도 되오?”
데푸시는 리처드 일행을 턱으로 가리켰다.
“상관없어. 어차피 함께 나가지 않으면 한쪽만 나가게 될 테니까.”
김필도의 말에 리처드 일행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쓸 만한 녀석들은 1만 5천 명 정도였소.”
“그 정도면 충분해. 그리고 전투 준비해.”
“무슨 전투를 준비한단 말이오.”
“조금 후에 천족과 마족이 여기로 올 거야.”
“형님이 끌고 온 거요?”
천족과 마족이란 말에도 데푸시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감옥에 있으면서도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귀는 열고 산 모양이지?”
“형님이 이콰라 공작가를 작살낸 것도 알고 있소.”
“그럼 대충 돌아가는 건 알겠구나.”
“형님에 대한 것만 빼고 나머진 대부분 알고 있다 보면 되오.”
“나?”
“내가 알기론 형님은 문 대륙에서 돌아올 때 불알 두 쪽이 전부였소.”
“이것도 있었어, 인마.”
김필도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헬칸을 가리켰다.
“그놈으로 기갑 기사 수백 명에게 둘러싸인 이콰라 공작의 목을 자를 순 없잖소.”
“이야기하자면 기니까 그건 나중에 말해 주마.”
“알겠습니다, 형님. 그보다 형님 곁에 있는 분들을 소개시켜 주셔야죠.”
데푸시는 김필도 좌우측에 앉아 있는 알마니 일행을 바라보았다. 그가 세 사람을 소개시켜 달라고 한 것은 조금 전부터 긴장감을 유발시키고 있는 특이한 기운 때문이었다.
여간해서는 누군가를 보고 긴장하지 않는데, 세 사람을 보자마자 온몸의 털이 곤두선 것이었다. 그건 곧 세 사람이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강자라는 의미였다.
“이쪽은 디자이너 알마니야.”
김필도는 먼저 알마니를 소개했다.
“디자이너라면?”
“옷 만드는 디자이너 말이에요. 지금 대공 전하께서 입고 계신 옷도 내가 만든 거예요. 앞으로도 대공 전하의 옷은 내가 전담해서 만들 거예요.”
“옷만 만드는 게 아닌 것 같구먼.”
“간혹 불꽃 쇼도 해 주곤 해요.”
“혹시 세다크?”
“호호호! 머리가 이거네요.”
알마니는 엄지손가락을 세우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멸종한 줄 알았는데 놀랍군.”
“멸종이란 말은 사람이 아니라 짐승에게 쓰는 거예요, 난쟁이 양반.”
“짐승이 아니라 희귀종족에게는 전부 쓰는 거야. 그리고 앞으로 형님이라고 불러.”
“누가 형님인지는 붙어 봐야 알지.”
“한판 하잔 말이냐?”
데푸시는 알마니를 쏘아보았다.
“키도 내가 더 크고, 얼굴도 더 잘생겼잖아.”
“네가 뜨거운 맛을 아직 못 봤구나. 좋다, 그건 나중에 따로 계산하기로 하자.”
데푸시는 피식 웃으며 라헤나와 다란을 보았다.
“난 라헤나예요.”
먼저 라헤나가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다란이오.”
이어 다란이 자기 이름을 말했다.
“반갑소, 두 분. 난 데푸시고, 이놈은 이프리스요.”
라헤나와 다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에 다란은 저도 모르게 말을 올렸다.
“우리도 반가워요.”
라헤나는 빙그레 웃었다.
“인사 끝났으면 저 양반에게 정식으로 인사해.”
김필도는 앞에 앉은 리처드를 가리켰다.
“정식?”
데푸시는 김필도를 보았다. 정식이란 말에 많은 의미가 내포돼 있는 것 같아서였다.
“절차를 지켜서 소개하라는 뜻이야.”
“알았소.”
뭔가 중요한 이야기가 오가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데푸시는 리처드를 보며 똑바로 섰다.
“나는 하늘 아래 가장 위대한 대지의 지배자, 데푸시 콜다 낙마아스 헥토르다!”
“나는 하늘 아래 가장 위대한 숲의 절대자 이프리스 샬 시칼 루디아닌이다!”
데푸시와 이프리스는 차례로 리처드 일행을 향해 자신을 소개했다.
“콜다 족과 샬 족이란 말이오?”
리처드는 비명처럼 소리쳤다.
콜다 족은 20개 부족 1천만 명으로 이루어진 드워프 중 최강의 종족이고 샬 족은 30개 부족 7백만 명으로 이루어진 엘프 중 최강 종족이다.
미들 네임으로 부족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는 건 부족장의 아들이란 뜻이었다.
“잘 아는구나.”
“그래서…….”
사면을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차원수리공을 재수감한 황제의 처사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바로 저들 때문이었다. 여차하면 드워프와 엘프를 이용하려고 볼모로 잡아 놓고 있었던 것이다.
김필도 때문에 그렇게 됐다는 걸 알지 못한 리처드로서는 당연한 생각이었다.
“이들은 내가 만들어 갈 배의 몸통이 될 거요.”
김필도는 데푸시와 이프리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내게 그런 제안을 한 거였구먼.”
“내 배의 한 축을 담당하겠소?”
“……아하하하! 하하하! 하하하!”
리처드는 고개를 쳐들고 웃음을 터뜨렸다.
무려 30년 동안 준비를 해 왔다. 그런데 준비 기간이 2년도 되지 않은 자에게 완패를 당하고 만 것이다. 너무 어이가 없어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뚝!
웃음을 그친 리처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김필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동안 그 상태로 있던 리처드는 한편 무릎을 꿇었다.
“대공 전하의 배에 오르겠습니다.”
리처드는 단호하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좋소, 리처드 경. 그대를 우리가 만들어 갈 배의 1등 항해사로 임명하겠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대공 전하.”
리처드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소장님!”
그때 부소장 베틀러가 다급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천족이 안으로 들어왔답니다.”
“그래?”
“네.”
“가 보시겠습니까?”
넬은 김필도를 보며 물었다.
“마족은 어디쯤 있소?”
“마족은 10분 거리, 크로와 신의 정원의 대원은 15분, 그리고 마족 1백여 명은 20분 거리에 있습니다.”
“일단 나가 보자고.”
“따라 오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