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
일행은 베틀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일행은 지상 1층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장소에 도착했다. 그곳은 세스티 감옥을 감시하는 감시탑이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은 투명 마법이 펼쳐져 있어서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넬은 베틀러에게 차를 준비시키며 말했다.
일행은 아래가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지만 너무 어두워 천족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불 켤 수 있어요?”
김필도는 넬을 보며 물었다.
“불을 켜도 괜찮겠습니까?”
“저놈들이 인간을 피해 도망칠까 봐서 그러는 거예요?”
“그렇네요.”
넬은 피식 웃었다.
다른 종족이라면 몰라도 천족이나 마족은 주변 여건이 갑작스럽게 변한다고 해도 결코 인간을 피해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넬은 옆에 서 있는 베틀러에게 지시를 내렸다.
베틀러는 밖으로 나갔다.
베틀러가 나가고 5분가량 흘렀을 때였다.
감옥의 동서남북 네 곳에 있는 망루와 허공에 거대한 구체가 나타나더니 빛을 뿌려대기 시작했다.
처음엔 희미했던 구체가 점점 환해지더니 세스티 감옥 전역이 대낮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이 감옥 누가 만든 거죠?”
김필도는 천족을 살피며 물었다.
매직 아이 마법이 걸려 있는 듯, 천족들의 모습이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잘 보였다.
천족의 수는 5백 명가량이었다.
“원래 고대의 던전이었던 곳을 개발해 감옥으로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세스티 감옥만 그런 거예요?”
이번에 질문을 한 사람은 라헤나였다.
“아닙니다, 다섯 개 감옥이 전부 고대 던전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렇군요.”
라헤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지상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 여자가 수장인가 봐요?”
김필도는 다른 자들에 비해 머리가 1미터 정도 높은 천족을 가리켰다. 키가 3미터가량 되는 천족 여자는 검을 들어 올린 채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그녀는 천좌 제2군 하라미였다.
“최소한 천족 제3계급이네요.”
라헤나는 하라미를 살피며 말했다.
“맞아요.”
천족을 하나하나 살피던 그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맺혔다. 왼팔 소매가 덜렁거리는 자가 눈에 잡혔던 것이다.
그자는 다름 아닌 천좌 제10군 헬만이었다.
“또 만났구나, 헬만.”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김필도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일렁거렸다.
“저자를 아세요?”
김필도의 몸에서 흐르는 살기를 감지한 라헤나가 물었다.
“아주 인연이 깊은 놈이에요.”
김필도는 헬칸을 들고 일어났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알마니는 김필도를 돌아보며 물었다.
“빚을 받을 때가 됐어.”
김필도는 좌측의 창문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눈이 멀었어요?”
알마니는 버럭 소리쳤다.
“내 눈은 멀쩡해, 디자이너.”
“그런데 5백 명이나 되는 놈들을 향해 혼자 가겠다는 거예요?”
“디자이너.”
“네.”
“이 검의 주인은 말이야…….”
김필도는 헬칸을 들어 올렸다.
“다섯 종족에서 뽑은 결사대 1천 명을 없앴어. 그때 1천 명하고 저들을 비교하면, 저것들은…… 껌이야. 아주 쉬운 상대 말이야.”
김필도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혼자 가실 겁니까?”
리처드가 조심스레 물었다.
“항해를 시작할 때 가장 필요한 게 뭔지 아시오?”
“폭풍우를 뚫고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입니다.”
“맞소, 리처드. 선원들이 성공적인 항해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하오. 선원들에게 그 자신감을 심어 줘야 할 사람은 선장이오. 아무도 나서지 말도록!”
“여긴 30미터 높입니다, 도련님!”
넬은 김필도 옆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꽤 높네요.”
김필도는 빙긋 웃으며 아래로 몸을 날렸다.
척!
김필도는 무릎을 구부려 자세를 낮추며 착지했다.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아래로 향했다.
“대단하군.”
리처드는 혀를 내둘렀다.
지금 있는 곳에서 아래쪽까지의 거리는 30미터라고 하였다. 그런데 김필도는 계단을 내려가는 것처럼 가볍게 뛰어내린 것이다. 물론 마법을 펼치는 자들이나 오라를 다루는 자들은 어렵지 않게 뛰어내릴 수 있다.
하지만 이곳은 마법을 펼칠 수 없는 반마법 공간. 보통 사람은 저렇게 뛰어내린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나저나…….”
그는 김필도를 보았다.
몸을 일으킨 김필도는 헬칸을 어깨에 걸치고 천족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전투 기갑을 걸치지 않았다고 해도 상대는 천족이다. 한두 명도 아니고 5백 명이나 있는데 혼자 가도 괜찮은 건지.
“저 인간은 문 대륙에 있을 때보다 더 또라이가 됐네. 야!”
데푸시는 넬을 보았다.
“말씀하십시오.”
“내 검 아직 보관하고 있지?”
“네.”
“내 도끼는?”
이번엔 이프리스가 물었다.
“보관하고 있습니다.”
“뭐 해, 새꺄!”
데푸시는 버럭 소리쳤다.
“바로 가져오겠습니다.”
넬은 바로 베틀러에게 지시를 내렸다. 잠시 후 베틀러는 데푸시의 검과 이프리스의 도끼를 가지고 왔다.
“오랜만이네.”
데푸시는 검을 쥐더니 활짝 웃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빨리 가, 새꺄!”
이프리스는 도끼를 어깨에 걸치더니 계단이 있는 곳을 향해 내달렸다. 30미터를 뛰어내릴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프리스에 이어 데푸시 또한 출입문을 향해 달려갔다. 그때 김필도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천족 진형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제6장 통로
김필도를 가장 먼저 발견한 천족은 하라미였다.
“10군!”
그녀는 헬만을 불렀다.
“네, 2군!”
후미에서 주위를 살피던 헬만이 앞으로 나왔다.
“혹시 저자가 루시안이에요?”
하라미는 김필도를 가리켰다.
“그렇습니다.”
일순 헬만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재미있는 인간이구나.”
하라미는 선두로 걸어 나갔다.
“엄청나네.”
김필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키가 3미터면 거인이다. 그런데 전혀 커 보이지 않았다. 얼굴과 상체와 하체 비율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면 키를 느낄 수 없다는 말이 천족 여자에게 그대로 적용됐다.
금발, 금안, 금색 피부.
마치 보디페인팅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나는 천좌 제2군 하라미다.”
하라미는 김필도를 살피며 말했다.
“그거 뽕 넣은 거 아니지?”
김필도는 하라미의 가슴을 턱으로 가리켰다.
“뽕?”
“가슴이 비정상적인 것 같아서. 보통 가슴이 작은 애들은 커 보이게 하려고, 솜 같은 걸 집어넣는데 그걸 뽕이라고 해.”
“풋!”
하라미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곳에 있는 천족은 5백 명이다. 전부가 검을 뽑은 채 살기를 흘리고 있는데, 가슴에 뭐 집어넣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한 것이다. 그건 천족이나 마족도 할 수 없는 아주 엉뚱한 질문이었다.
세라핌을 살해하고, 헬만의 왼팔을 잘라 낸 자라고 하였으니 정신 나간 자는 아닐 터였다.
멀쩡한 자가 저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건 자신의 실력에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신 있나 보지?”
하라미는 물었다.
“나는 오테르 인장의 주인이자 헬칸의 주인인 루시안이야.”
김필도는 헬칸을 쥔 오른손을 내밀었다.
“오테르 가문?”
하라미는 깜짝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천계와 마계는 현재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지만, 수천 년 전에는 많이 싸웠다. 그때 천계를 가장 괴롭혔던 자들 중 파라온이 있었다.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파라온은 마계 전사를 이끌고 천계까지 쳐들어와 천왕의 머리를 잘랐다. 그 전과로 인해 그는 마족 최강 전사인 마신에 등극했다.
그 파라온이 바로 오테르 가문의 가주였던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그 오테르 가문의 후계자라고 하였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손가락에 낀 반지가 바로 오테르의 인장이야.”
“히데우스가 네게 그걸 물려주었다는 말을 믿으란 말이냐?”
하라미는 여전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마족이나 천족이 인간에게 가문의 가주 자리를 넘겨주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건 기르던 개에게 재산을 상속하는 것보다 더 일어나기 힘들다.
비록 지금은 몰락했다고 하지만 오테르 가문은 마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명가다. 그런 가문의 가주 자리를 하찮은 인간에게 넘겨주다니. 그녀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았다.
“믿어지지 않은 모양이지?”
“너 같으면 기르던 개보다 못한 자에게 가문을 넘길 수 있겠느냐?”
“지금 그 말 날 모욕 주려고 한 말은 아니겠지?”
“천족과 마족이 인간을 평가하는 게 그렇다는 거지 널 빗대어 한 말은 아니다.”
“그런 말은 미리 해 주면 좋은데.”
“정말로 히데우스가 오테르 인장의 주인으로 널 선택한 모양이구나?”
하라미는 김필도에 대한 평가를 달리 했다.
그 당시 히데우스 입장이라면 단순히 헬칸을 넘겨주는 건 가능하다. 자신의 검이 사장되는 걸 바라는 검사는 없을 테니까. 물론 마족에게 물려주면 좋겠지만 마지막 순간에 마족이 옆에 없다면 불가능하다. 더불어 그가 지목한 이카렌이 마계10군단을 효과적으로 장악하기 위해서는 헬칸은 없는 게 더 낫다.
인간에게 헬칸을 물려주는 건 최선의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테르의 인장을 물려주는 건 심사숙고해야 한다. 오테르의 인장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오테르 가문의 긍지다. 수천 년 동안 쌓아온 긍지를 한낱 인간에게 넘길 마족은 없을 것이다.
일반 가문도 그럴 텐데, 하물며 마계 최고 가문의 한 곳인 오테르 가문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넘겨주었다는 건 마족의 긍지를 물려 줄 정도로 대단하다는 뜻이 된다.
“나도 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어. 이놈과 오테르 인장을 물려받았는데 오테르 가문에 누가 되면 안 되잖아.”
김필도는 나무 막대를 돌리는 것처럼 헬칸을 움직이며 말했다.
“마족의 검술을 배운 모양이지?”
“정면 대결이라면 세이아칸이나 칼베리언의 머리도 내 걸로 만들 수 있어.”
척!
김필도는 헬칸을 수평으로 눕혀 하라미를 겨냥했다.
“파라온!”
이어 김필도의 입에서 나직한 외침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오테르의 인장에서 검은 운무가 흘러나와 마신의 팔찌로 들어갔다. 이윽고 마신의 팔찌와 오테르의 인장이 공명하더니 거대한 덩치의 마족이 모습을 드러냈다.
놀랍게도 마법이 속박된 이곳에서 마신 파라온의 소환이 가능했다.
“최, 최상급 마족?”
검은색 크레디온을 걸친 3미터 키의 마족 모습에 하라미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녀를 더 놀라게 한 것은 전투 기갑을 걸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그녀는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걱정 마, 하라미. 이 녀석은 내 등만 맡을 거니까.”
김필도는 고스트 킹을 보았다.
-저 맛있는 것들을 놔두고 등만 맡으란 말이냐?
고스트 킹은 천족들을 노려보았다. 현재 천족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지만, 천족과 수많은 전투를 치렀던 그는 본능적으로 적의를 뿜어냈다.
“응!”
-권능의 주인, 나도 기회를 주라.
“저 자식들은 전투 기갑도 안 걸쳤는데?”
김필도는 천족을 가리켰다.
-입을 시간은 충분히 주면 되지 않는가.
“여긴 전투 기갑을 착용할 수 없는 마법이 펼쳐진 장소야.”
-그럼 나는 어떻게 된 건가?
“이까짓 마법이 마신을 속박한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안 그래?”
-하긴 그렇다. 아무튼 권능의 주인 등은 내가 맡겠다. 가급적이면 심심하지 않게 해 주라.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은 인간에게만 통용되는 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김필도가 띄워 주자 고스트 킹은 기분이 좋은 듯한 소리를 뱉어 내며 김필도 뒤로 갔다.
“뜸은 다 들인 것 같은데 이제 시작하는 게 어때?”
김필도는 수평으로 눕혔던 헬칸을 비스듬히 늘어뜨렸다.
“우리도 기다렸다, 놈! 1조는 나서라!”
하라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뒤편에 있던 헬만이 버럭 소리쳤다.
그러자 천족 50여 명이 전면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