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164화 (164/225)

# 164

하라미는 얼굴을 찌푸렸다.

파라온이라고 불리는 최상급 마족에 대한 건 물론이고 헤를리온에 대한 정보가 더 필요했다. 조금만 더 대화를 나누면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헬만이 성급하게 나선 것이다. 그렇다고 팔을 잃고 복수의 날만 기다린 그를 나무랄 수도 없었다.

그녀는 한 걸음 물러났다.

“팔을 잘라도 되고, 다리를 잘라도 상관없다! 생명에 지장만 없으면 된다!”

“알겠습니다!”

파앗! 파앗!

천족들은 우렁차게 소리치며 김필도를 향해 쏘아져 갔다.

파앗!

순식간에 김필도 앞에 선 천족 한 명이 대검을 횡으로 쓸었다. 천족 사내의 검은 진득한 살기를 뿌리며 김필도의 목을 향해 나아갔다.

김필도는 헬칸을 들어 올려 왼편으로 휘둘렀다.

차앙!

“헉!”

공격을 했던 천족 사내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일검에 끝장을 낼 수가 없기에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방금 일격엔 전 힘의 80퍼센트 정도가 실렸다.

그런데 그의 검이 허망하게 오른편으로 밀려 버린 것이었다. 아니 밀린 건 문제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천족 사내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검이 밀리며 노출된 허점이었다.

“싸울 때 상대를 얕보는 건 자살 행위야.”

천족 사내의 검을 왼편으로 밀어 쳤던 김필도는 이번엔 헬칸을 오른편으로 휘둘렀다.

스악!

“아악!”

헬칸에 목이 잘린 천족의 머리가 둥실 떠올랐다.

그러고는 곧바로 왼편을 향해 날아오는 천족의 검을 막았다.

차앙!

스르릉!

스악!

헬칸으로 막고 흘리고 휘두르는, 알리토로부터 배운 마족의 검술이 김필도의 손에서 펼쳐졌다.

“크악!”

두 번째 머리가 떠오를 때 김필도는 세 번째 천족의 목을 향해 헬칸을 휘두르고 있었다.

스악!

낚시를 할 때와는 다른 느낌이지만 강한 느낌이 손끝을 타고, 팔 근육을 통해 뇌로 전해져 왔다. 아드레날린이 잔뜩 분비된 모양이다.

심장이 폭발할 것처럼 뛰고 온몸의 근육이 맹렬하게 반응한다.

김필도는 검을 강하게 당기며 상체를 숙였다.

천족의 머리가 떠오르고 강한 힘을 머금은 금색 검 하나가 머리카락을 자를 것처럼 스쳐 지나간다.

어느새 왼편 엉덩이 근처로 향한 왼손은 설향 손잡이를 그러쥔다. 상체를 약간 들어 올리면서 레프트 훅을 치는 것처럼 왼손을 강하게 뻗어 낸다.

도집을 떠난 설향의 날이 새파란 광채를 뿜어내고, 곧 천족 허리 안쪽으로 사라진다. 다시 모습을 드러낸 설향 도면에서 붉은 피가 점점이 떨어져 내린다.

차앙!

자리를 옮기며 천족의 검을 막아내고, 설향을 원래 위치로 던져 넣었다.

털썩!

그때 조금 전에 허리가 잘린 자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필도는 천족의 급소를 향해 오른발을 내질렀다.

퍼억!

강한 힘을 머금은 발끝이 천족의 급소에 박혀들었다.

그곳은 천족 또한 치명적인 급소인 모양이었다. 천족의 검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김필도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천족의 머리를 향해 헬칸을 찍었다.

퍼억!

머리가 쪼개지며 뇌수가 좌우로 튀었다.

차앙! 스르륵!

스악!

헬칸은 완벽한 방패였다.

천족의 검은 김필도의 몸에 조그마한 상처도 내지 못했다. 막고 흘리고 자르고, 이동하고. 또다시 막고 흘리고 잘랐다.

비명이 있고, 잘린 머리가 있고, 붉은 피가 남았다.

김필도는 말없이 천족을 없애며 전진했다.

처음 김필도를 향해 달려들었던 천족 50명이 죽임을 당하고 지금은 두 번째 조였다. 하지만 그들 역시 1조와 다르지 않았다. 김필도의 검술을 뚫지 못하고 계속 죽어 나갔다.

“원래 저렇게 강했냐?”

전장에 도착한 데푸시는 김필도를 가리켰다.

“그땐 우리에게 다 보여 주지 않은 모양이다. 아니면 보여 줄 기회가 없었든지. 그나저나 징하게 강하다.”

이프리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나 속박 마법이 광범위하게 펼쳐진 곳이라 전투 기갑을 착용할 수 없다고 해도 상대는 거의 2미터에 가까운 대검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자들이다.

그런데 그런 엄청난 자들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싸움이 아니라 도살에 더 가까웠다.

“몸 상태는 어때?”

데푸시는 이프리스를 보았다. 김필도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 잔뜩 흥분한 듯 그의 숨결은 거칠어져 있었다.

“50퍼센트 정도 동화된 것 같아.”

“그럼 도끼에 오라 블레이드를 씌우는 건 가능하겠네.”

“너는 어때?”

“나도 그래.”

데푸시는 빙그레 웃었다.

그와 이프리스는 이곳에 갇힌 순간부터 탈출할 방법을 모색했다. 하지만 이곳에 광범위하게 펼쳐진 마나 속박 마법을 풀 방법은 없었다. 인간의 마법이라면 진작 풀었을 테지만 이곳에 펼쳐진 마법은 클래스 마법과는 완전히 달랐다. 놀랍게도 실전 마법과 함께 사라졌다고 하였던 정령 마법이었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다가 정령 마법을 푸는 방법을 드디어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상생이었다.

즉 힘으로 누르는 게 아니라 녹아들어 가 동화되는 것이었다. 그날부터 이곳의 기운과 하나가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리고 문 대륙에서 돌아와 다시 수감될 즈음하여 조금씩 이곳 대기와 동화될 수 있었다.

이곳 기운과 동화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힘을 얻었다.

“크악!”

“아악!”

“으아악!”

차앙! 서걱!

창창창!

“아악!”

“이젠 저 인간을 넘어설 줄 알았는데.”

이프리스는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사실 이곳 기운에 이렇게까지 빨리 동화될 수 있었던 것은 문 대륙에서의 패배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인간에게 패했다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어 밤낮으로 매달렸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성과를 얻어 이제는 이길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설령 김필도보다 강하다고 해도 형님 자리를 빼앗을 생각은 없었다. 다만 더 강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는 문 대륙에서 모든 것을 보여 준 게 아니었다.

“새로운 길을 찾았으니까 머잖아 따라잡을 수 있을 거야.”

“그렇겠지. 가자!”

이프리스의 신형이 전방으로 내달렸다.

이어 데푸시가 바닥을 차며 몸을 날렸다.

둘의 신형은 가공할 속도로 쏘아져 갔다.

“난 콜다 제일 용사 데푸시다!”

“난 샬 최강 용사 이프리스다!”

데푸시와 이프리스는 우렁차게 고함을 내지르며 천족진영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저들을 막아요!”

고함을 내지르는 하라미의 얼굴엔 곤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김필도가 그렇게 강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헬만의 팔이 잘리고, 천족 10여 명이 당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방심해서 그렇게 된 걸로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 겪어 보니 아니었다.

모든 면에서 인간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던 천족은 그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젠 드워프와 엘프마저 달려들고 있다.

“아아악!”

“으아악!”

“강자 아닌 자가 없네.”

하라미의 얼굴이 침중하게 굳었다.

방금 전장으로 들어온 드워프와 엘프도 보통 실력자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달려들었던 부하들이 짚단처럼 쓰러진다.

“10군!”

하라미는 헬만을 불렀다.

“말씀하십시오.”

“3번 전술을 사용하세요.”

“지금부터 3번 전술을 사용한다!”

헬만의 명령이 떨어지자 천족들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3번 전술이란, 3명이 한 조를 이뤄, 공격 한 명 수비 두 명, 또는 공격 두 명, 수비 한 명으로 상황에 따라 변형하면서 사용하는 전술이다. 소수이면서 개개인의 검술이 강한 자들을 상대할 때 쓰는 공격 방법이었다.

3명이 한 조를 이룬 천족들은 먼저 수비에 두 명을 할당하고 공격은 한 명이 담당했다.

그렇게 되자 일방적으로 밀리던 천족 진영이 안정을 찾아갔다. 물론 희생자가 나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 전처럼 떼거리로 죽진 않았다.

오히려 조금씩 밀어붙이는 기분마저 들었다.

“더욱 밀어붙여라! 틈을 주지 마라!”

부하들이 밀고 나가자 헬만은 흥분하여 고함을 내질렀다.

“오늘은 반드시 죽이겠다, 놈!”

헬만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의 눈동자는 햇빛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고양이 눈처럼 일자였다. 그가 극한으로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

그는 김필도가 있는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크악!”

“아악!”

“놈이 비틀거린다, 밀어붙여라!”

부하들이 있는 곳에서 차가운 외침이 들려왔다.

김필도가 비틀거린다는 말을 듣고 나자 마음이 더욱 급해졌다. 그는 검을 불끈 틀어쥔 채 바닥을 찼다.

스으윽!

“억!”

허공을 날아가던 헬만은 깜짝 놀랐다.

속박됐던 마나가 느닷없이 활성화되면서 온몸에 힘이 돌아온 것이었다.

“마법이 풀렸단 말인…….”

하지만 바닥에 내려서면서 그의 생각은 멈췄다.

방금까지 활성화돼 있던 마나가 다시 강하게 속박돼 버린 것이었다.

“왜?”

그는 멍해졌다.

왜 속박됐던 마나가 활성화되고 다시 속박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뭔가 있다.”

한순간에 일어난 변화.

그것은 중요한 발견이었다. 헬만은 조금 전 상황을 곰곰이 되짚었다.

“혹시?”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헬만은 그 자리에서 점프를 했다. 그러자 다시 마나가 활성화됐다. 그리고 바닥에 내려서는 순간 마나는 원래의 젤리처럼 변했다.

이번엔 한쪽 발만 들어보았다.

마나 속박 마법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거였어.”

헬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펼쳐진 마법의 매개체는 다름 아닌 대지였다.

대지와 이어진 모든 물체는, 즉 건물, 타워, 심지어 무기 같은 걸로 땅을 짚고 서도 마나 속박 마법의 영향을 받게 된다. 마나 속박 마법에서 벗어나려면 날개가 있어야 하는데 이곳에는 날개를 가진 종족은 없다.

헬만은 부하들을 살폈다.

부하들은 한결같이 한쪽 발 또는 두 발을 바닥에 붙이고 공격을 하고 있다. 몸을 띄워 공격한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키가 작은 인간을 상대하다 보니 몸을 띄울 필요가 없어서다.

“그렇다면 이 장소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거네.”

헬만은 고개를 돌려 하라미를 보았다.

이곳의 비밀을 알아냈으니 상급자인 그녀에게 보고를 해야만 한다. 하지만 헬만은 그럴 생각이 없다.

그건 바로 이곳으로 오기 전 세이아칸과 나눈 대화 때문이었다.

-그 벌레 놈을 잡을 별동대의 지휘관으로 제2군 하라미를 임명할 참이다.

-지휘관 임명은 천좌의 고유 권한입니다.

-맞다, 내 권한이다. 더불어 헬만 네게 보고할 이유도 없다.

-보고라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천좌.

-네가 해 줄 일이 있다.

-목숨을 걸겠습니다, 천좌.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이다. 네가 해 줄 일은 하라미의 제거다.

-네?

-라이자칸이 우리 대천신군을 배신하고 떠났다.

-그럼 그것 때문에…….

라이자칸은 하라미의 검술 스승이었다.

물론 대천신군 소속의 많은 대원들이 라이자칸으로부터 검술을 배웠다. 하지만 비기까지 물려받은 사람은 하라미가 유일했다.

-그것 때문에 하라미를 제거하려는 건 아니다.

헬만 또한 그게 전부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라이자칸아 배신자가 됐다고 하여 하라미까지 배신자가 되란 법은 없으니까.

세이아칸이 하라미를 제거하려고 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총무대신이 이번 전쟁을 결사반대하고 있다.

바로 하라미의 아버지인 총무대신 때문이었다.

-50명을 따로 뽑아두었다. 그녀가 죽으면 지휘는 네가 해라.

-알겠습니다, 천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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