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살피며 걸었다.
한참을 걸었지만 쥐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쥐는 고사하고 작은 벌레조차 없었다.
그야말로 완전한 무(無)의 세상이었다.
“이러다 굶어…….”
“아악!”
바로 그때 저 위쪽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김필도는 고개를 들었다.
“크악!”
“아아악!”
묵직한 비명에 이어 째지는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여자 비명이었다.
“여자라면 하라미밖에 없는데. 쯧! 당한 모양이네.”
김필도는 고개를 거칠게 흔들며 걸었다.
“아아아아…….”
걸음을 옮기는 도중에도 비명은 계속 들려왔다. 아니 계속 들려오는 게 아니라 점점 가까워지는 듯했다.
김필도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덩치 물체 하나가 무서운 속도로 추락하고 있었다. 황금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추락하는 거대한 덩치는 다름 아닌 하라미였다.
첨벙!
커다란 소리와 함께 하라미가 수면으로 추락했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김필도는 하라미가 빠진 곳을 바라보며 합장을 했다. 그러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먹을 게 있어야 하는데…….”
김필도는 주위를 꼼꼼히 살피며 걸었다.
“그게 아니지?”
김필도는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정 먹을 게 없으면…….”
그는 급히 걸음을 옮겨 조금 전 하라미가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사, 살려…….”
수면 위로 황금색 머리가 불쑥 솟아 나왔다가 금세 사라졌다.
“얼레? 그것 명도 기네. 광염의 불 세딕!”
김필도는 황급히 자신의 몸에 불의 속성 마법을 걸었다. 그러고는 물을 향해 뛰어들었다.
그가 있는 곳에서 하라미가 있는 곳까진 20미터 정도였다.
물속으로 들어가자마자 물의 속성 마법을 펼쳐 이동했다. 곧 그는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하라미를 발견했다. 그녀를 안고 빠르게 헤엄을 쳤다.
밖으로 나온 그는 불을 피워 놓았던 곳 옆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걸치고 있던 옷이 얼음조각으로 부서져 내렸다.
“이러다 얘도 얼음조각으로 부서지면 큰일인데.”
김필도는 하라미의 코밑에 손을 대보고 목의 동맥도 확인했다. 숨도 쉬지 않고 맥도 뛰지 않았다.
“인공호흡으로 살릴 수 있으려나 몰라.”
김필도는 곧바로 인공호흡을 실시했다.
가슴을 압박하고, 입 안에 숨을 불어넣었다. 다행히 하라미의 몸은 얼어 있지 않았다.
“흐-흡! 쿨럭!”
5분 정도 인공호흡을 했을 때, 하라미는 깊은 숨을 내 쉬고는 기침과 함께 물을 토해냈다.
“괜한 짓 한 거 아냐?”
김필도는 입맛을 다셨다.
하라미는 그를 잡으러 온 천족의 수장이다. 그런 그녀를 살려 주는 게 잘하는 짓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싸웠던 것도 아닌데 뭐.”
김필도는 머리를 벅벅 긁고는 삼각대를 불 위로 세워놓고 주전자에 물을 받아와 받침대 위에 놓았다.
그리고 조금 전에 내려놓았던 책을 펼쳤다.
요른의 말처럼 마법은 정말 쉽게 설명돼 있었다. 마나 친화도만 있다면 어린아이라도 펼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김필도는 마법 지팡이를 들었다.
“세상을 밝히는 불꽃! 내 의지에 답하라! 파이어!”
나직한 외침이 김필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파앗!
그러자 마법 지팡이 끝에 횃불 절반 크기의 불덩어리가 나타났다.
“재밌네.”
김필도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픽!
미소를 짓는 순간 나타났던 불꽃이 사라졌다.
“오! 정신이 분산되니까 바로 꺼져 버리네.”
김필도는 흥미로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는 다시 불꽃 마법을 펼쳤다. 이번엔 불꽃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불꽃은 계속 유지됐다.
“정신 차린 거 알고 있으니까, 눈 떠도 돼.”
김필도는 불꽃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하라미는 움찔 떨었다.
김필도의 말처럼 그녀는 조금 전에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일어날 수가 없었다. 원래는 일어나려고 살짝 눈을 떴다. 그때 발견한 것은 우람하게 솟은 자신의 가슴이었다. 그런데 질겁하게도 가슴은 천장을 향해 맨살을 드러낸 체였다. 그것뿐이었다면 얼른 손으로 가리고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김필도가 눈치 채지 못하게 몸을 살폈는데, 아래쪽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인간에게 온몸을 활짝 개방한 채 누운 상태였다. 그것도 두 다리를 벌린 채.
부끄럽고 창피하여 일어날 수가 없었다.
“내가 천족으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벌레야. 설마 옷을 벗은 상태로 벌레 앞에 섰다고 수치심을 느끼는 건 아니겠지?”
“다, 당신은 벌레가 아니잖아.”
“헬만과 세이아칸 그놈은 날 벌레로 불렀어.”
“난 헬만도 세이아칸도 아냐.”
“나를 지성체로 인정한다는 말?”
“생각을 할 줄 아는 자니까.”
“옷 한 벌 얻으려고 마음에 없는 말도 할 줄 아네?”
김필도는 하라미를 빤히 바라보았다.
경황 중이라 자세히 보질 못했는데 지금 보니 하라미의 몸매는 대단했다. 전에 보았던 이카렌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아무튼 앉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그 상태로 있는 것도 내 입장에선 나쁘지 않으니까.”
김필도는 빙그레 웃더니 카판 내릴 준비를 했다.
“나쁜 인간.”
하라미는 붉어진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가만 보니 하체를 김필도 얼굴 쪽으로 향하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하라미는 헬칸을 발견하고는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헬칸을 바닥에 사정없이 꽂아 넣고는 헬칸을 감싸듯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헬칸을 이용해서 절묘하게 중요 부위와 가슴을 가린 것이었다. 물론 가슴은 일부만 가려졌을 뿐 대부분 드러난 상태였다.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났으니까 우리 다시 인사할까? 난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야.”
“난 대천신군 소속 천좌 제2군 하라미다.”
“이제 네가 말해 봐. 내가 널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미 날 구한 거 아닌가?”
“아냐. 원래는 널 구할 생각은 없었어.”
“그럼?”
“내가 그쪽으로 갔던 건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였어. 먹을 게 아무것도 없어서 투덜대고 있는데 하늘에서 네가 떨어진 거야.”
“그러니까…….,”
하라미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굶어 죽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거나, 먹을 게 나오면 괜찮겠지만 아무것도 없으면 넌…….”
김필도는 호수로 시선을 돌렸다.
“저곳으로 날 던지려고?”
“식량을 오래 저장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얼리는 거거든. 그건 그렇고 카판 한 잔 할래?”
김필도는 카판잔을 들어 하라미 앞으로 내밀었다. 하라미는 대답 대신 헬칸 손잡이로 손을 뻗었다.
“조금 전에 들어봤겠지만 헬칸의 무게는 40킬로그램이야. 한번 휘두르고 나면 넌 목이 잘릴 거야.”
하라미의 손이 우뚝 멈췄다.
그녀는 김필도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의 말대로다. 조금 전 들어본 검은 이전에 들었던 검보다 세 배나 더 무거웠다. 저런 엄청난 무기를 휘두른다는 건 무리다.
무기로서 가치가 전혀 없는 검이었다.
“우선 질문부터 할게. 누군가 그러더라고, 홀라당 벗고 있으면 거짓말을 못한다고. 먼저 네가 누군지 알고 싶어.”
“난 대천신군 소속…….”
“그런 신분 말고 진짜 네 신분을 묻는 거야.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내 물건을 찾아올 거야.”
김필도는 하라미의 몸을 가리고 있는 헬칸을 바라보았다.
“하라미 하민 이스마디온이다.”
“천계에서 아버지 직책은?”
“총리대신이다.”
“총리대신의 지위는?”
“천왕 바로 밑이다.”
“그러니까 국무총리 급이란 말이지?”
“국무총리?”
“그건 알 필요 없고. 그럼 세이아칸 그놈의 아버지 직책은 뭐지?”
“군을 담당하는 국방대신이다.”
“지금까진 좋아. 한 잔 할래?”
김필도는 카판잔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주면.”
마음이 좀 풀린 듯 하라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필도는 카판을 따라 하라미에게 내밀었다.
“고, 고마워.”
하라미는 헬칸 옆으로 손을 내밀어 카판잔을 받았다.
“천족이 휴도니아 대륙에 온 목적이 뭐야?”
“헤를리온 때문이야.”
“내가 헤를리온을 얻은 걸 어떻게 알았는데?”
“정말 헤를리온을 얻었다는 거냐?”
하라미는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응!”
김필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헤를리온을 얻겠다고 천족, 마족, 인간까지 전부 몰려와 있는데 부인해 봐야 믿어 줄 놈도 없다. 그럴 바엔 속 편하게 시인하는 게 더 나을 터였다.
“이거야.”
김필도는 오른손을 심장에 대고 헤를리온을 소환하여 보여주기까지 했다.
“정말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하라미는 꿈을 꾸는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헤를리온에 대한 전설이 사실이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신갑 헤를리온이 눈앞에 있다.
“그게 신갑이라는 걸 어떻게 믿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김필도가 신갑이라고 해서 그런 모양이다 하는 거지 진짜 신갑이라는 걸 증명할 방법은 없다.
“믿지 않으면 나도 어쩔 수 없어.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헤를리온을 착용하고, 헬칸을 들면 천족이 됐든 마족이 됐든 전부 내 손에 죽는다는 거야.”
“대륙 최강?”
“응!”
“풋!”
하라미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김필도가 너무나 쉽게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었다.
“그건 차차 알게 될 거야. 이제 휴도니아 대륙으로 넘어온 진짜 목적을 말해 봐.”
“진짜 목적은 조금 전에 이미…….”
하라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김필도는 헬칸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바닥에 단단하게 파고 들어가 있던 헬칸이 빨리듯 김필도의 손 안으로 들어왔다.
“어멋?”
하라미는 깜짝 놀라 양손으로 몸을 가렸다.
“너희들은 내게 헤를리온이 있다는 걸 확신하지도 않았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도니아 대륙으로 쳐들어왔단 말이야. 그건 곧 헤를리온은 명분이고 목적은 따로 있다는 말이 되는 거야.”
“검을 줘.”
하라미는 잔뜩 웅크린 채 말했다.
“먼저 대답을 해.”
“치사한 자식.”
하라미는 김필도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한동안 그렇게 노려보더니 몸을 가리고 있던 손을 풀어 버렸다.
“끙!”
김필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실 그가 이렇게 수치심까지 줘 가면서 뭔가를 알아내려고 한 것은 천족과 마족이 침략한 정확한 이유를 알고 싶어서였다. 단순히 헤를리온 때문이라고 하기엔 병력의 규모가 너무 컸다. 그래서 하라미를 다그쳤는데, 오히려 그녀는 더 대담하게 가리고 있던 손을 치워 버린 것이다.
“이미 가슴도 내주고 입맞춤도 당했는데, 잡아먹든지 볶아먹든지 알아서 해, 이 나쁜 자식아.”
“가슴을 누르고 입 안에 공기를 집어넣은 건 인공호흡이라고 하는 거야, 인마. 그 입맞춤 때문에 네가 살아난 거야.”
“아무튼! 난 네 거니까 죽이든 살리든 알아서 해.”
하라미는 김필도를 쏘아보았다.
“음마!”
김필도는 화들짝 놀랐다.
하라미의 입에서 튀어나온 ‘난 네 거’라는 말 때문이었다.
“방금 그건 무슨 소리야?”
“뭐?”
“방금 네 입으로 ‘난 네 거니까 죽이든 살리든 알아서 해’라고 했잖아.’
“말 그대로야.”
“뭐가 말 그대론데?”
“우리 천족 사회에서는 입술과 가슴을 허락하게 되면 평생 그 남자 그늘에서 살아야 하는 풍습이 있어.”
“그게 무슨 풍습이야, 인마. 신의 자식이면 좀 고상한 풍습을 가지고 있어야지. 그건 풍습이 아니고 악습이잖아.”
“풍습인지 악습인지 모르지만 천족 사람은 전부 지키고 살아.”
“만약 안 지키면 어떻게 되는데? 그러니까 여자가 남자가 싫다거나, 남자가 여자를 싫어하는 경우 말이야.”
“남자는 여자를 싫어해도 입을 맞추고 가슴을 만져?”
“간혹 그런 놈이 있기는 하지. 그럼 여자가 남자가 싫은 경우엔?”
“사내를 없애고 심장의 피를 이곳에 바르면 이 러브 서클이 사라지게 돼.”
하라미는 그녀의 가슴 사이에서 문신처럼 새겨져 있는 고리를 가리켰다. 반지 크기의 고리는 희미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러브 서클이라고?”
“희미하게 광채를 발한다는 건 사내가 있다는 뜻이고 결혼을 해서 사내와 잠자리를 갖게 되면 짙은 금색을 띠게 돼. 짙은 금색은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다는 뜻이야.”
“그러니까 그 러브 서클이 희미하게 광채를 발하고 있는 이상 넌 다른 사내에게 시집을 갈 수 없다는 뜻이네?”
“맞아.”
하라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넌 날 싫어했잖아.”
“그것도 맞아. 하지만 난 널 죽일 실력이 안 돼.”
“실력이 안 되니까 내 그늘에서 살겠다고?”
“천족의 풍습이라고 했잖아.”
“내 의사는 필요 없는 거야?”
“그럼 애초에 가슴을 만지지 말고 입을 맞추지 말았어야지.”
“그건 널 구하기 위해서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내가 싫으면 그 헬칸으로 내 목을 잘라.”
“와, 진짜 돌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