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
김필도는 멍한 얼굴로 하라미를 보았다.
보통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피가 끓고 몸이 후끈 달아오른다. 하지만 하라미는 아니다. 그녀를 보면 절간의 부처가 떠오를 뿐 그 이상은 생각나지 않는다.
아니 3미터나 되는 거구 옆에서 걸어갈 걸 생각하면 몸이 부르르 떨린다. 185센티미터의 남자와 3미터의 여자. 이건 궁합을 볼 필요도 없이 최악이다.
“야! 하라미 좀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자.”
김필도는 입고 있던 옷과 허리춤의 단도를 뽑아 하라미 앞으로 던졌다.
“알아서 죽으라고?”
하라미는 단도를 집어 들었다.
“잘라서 몸 가리라고 준 거야.”
“그럼 그렇게 말을 해야지.”
하라미는 생긋 웃으며 김필도 옷을 자기 몸에 맞춰 보았다.
“하라미, 내 말 좀 들어 봐라. 보통 여잔 말이다. 사내가 벗어 준 드레스 셔츠를 원피스로 입을 수 있어. 하지만 넌 원피스는 고사하고 그걸 잘라 비키니로 입어도 부족하잖아. 너와 난 몸 구조상 이루어질 수 없어.”
“키가 몇 센티미터지?”
“185센티미터.”
“드문 일이긴 하지만 천족 제5계급과 제3계급, 제2계급은 결혼을 하기도 해. 제5계급의 키는 2미터밖에 안 돼.”
“그래도 나보다 15센티미터나 크지.”
“기껏 15센티미터밖에 안 되는데 뭐.”
“야! 넌 날 죽이러 왔잖아. 이건 반칙이라고.”
김필도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절대 이 꺽다리 누렁이와 자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피부만 살색이라면 어떻게 해 보겠는데 말이다.
누런 황금색. 절간의 불상을 연상시킨다.
“난 지극히 이성적이야.”
하라미는 단도로 드레스 셔츠를 자르더니 가슴과 하체를 가릴 만한 옷을 뚝딱 만들어냈다.
“이것 좀 묶어 주세요.”
“오 마이 갓!”
이제 존댓말을 쓰는 하라미를 보며 김필도의 얼굴이 해쓱하게 질렸다.
“이것 좀 묶어 달라니까 뭐 해요.”
김필도가 멍하니 서 있자 하라미는 김필도 앞으로 다가와 등을 댔다.
김필도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손은 등에 가 있었는데 보통 여자들이 브래지어 끈을 묶는 자리다. 그런데 하라미의 등은 농구 골대만큼 높았다.
하는 수 없이 커다란 돌 위로 올라가 끈을 묶어 주었다.
“고마워요.”
하라미는 생긋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김필도는 본래 그의 자리로 가 앉아 카판잔을 들어 올렸다.
“마법은 어떻게 된 거죠?”
하라미는 카판 내리는 용기에 남아 있는 카판을 자기 잔과 김필도 잔에 나눠 따르며 물었다.
“왜?”
“천족, 마족, 인간을 통틀어서 마법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은 당신이 유일하잖아요. 그리고…….”
푸앗!
그녀의 ‘당신’이란 말에 김필도는 카판을 쏟았다.
“다시 끓일까요?”
하라미는 빙긋 웃었다.
“아냐, 됐어.”
김필도는 고개를 흔들었다.
하라미는 하던 말을 계속했다.
“드워프와 엘프가 마나를 약간 사용하긴 했지만 그건 이곳 마나를 받아들여 자기 마나와 섞어서 사용하는 바람에 그렇게 된 거지, 당신과는 많이 달라요.”
“그걸 알아낸 거야?”
“내가 비록 덩치는 곰같이 커다랗지만 여긴 나름 잘 굴러가거든요.”
하라미는 제 머리를 톡톡 쳤다.
“그런 것 같네.”
김필도 또한 데푸시와 이프리스가 말해 주기 전까진 이유를 몰랐다. 그런데 하라미는 싸우는 모습만 보고도 그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대단한 관찰력이었다.
“말해 보세요.”
“나도 정확히는 몰라. 다만 내 마나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하고 있어.”
“당신 마나가 어떤데요?”
“……!”
김필도는 하라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는 계집에게 어떻게 말해 주느냐는 눈빛이네요?”
“휴우! 혼돈이야.”
김필도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혼돈? 그러니까 태초의 어머니인 그 혼돈이라고요?”
“혼돈이 태초의 어머니인 줄은 모르겠지만 혼돈은 맞아.”
“혼돈의 마나를 얻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는데, 내가 알고 있는 그건 아니겠죠?”
“네가 알고 있는 건 뭔데?”
“실전 마법이에요.”
“제법 많이 아네.”
“정말 실전 마법을 익힌 거예요?”
“실전 마법이 어떤 건지도 알아?”
“무기를 만드는 마법이란 것도 알아요.”
“그럼 잘 알고 있는 거네.”
“실전 마법을 익히고, 헤를리온과 헬칸의 주인이면 2세 헬칸이네요?”
“우연히 주웠을 뿐이야. 자, 이제 내가, 아니 우리가 당면한 문제점을 말할게.”
“말해 보세요.”
“조금 전에 말했던 것처럼 지금 이곳엔 먹을 게 아무것도 없어. 물론 내 아공간 안에는 음식이 넘쳐나게 많아. 얼마 전에 담은 김치도 있고. 그런데 아공간을 열 수가 없어.”
“이것들은 다 뭐죠?”
하라미는 카판을 가리켰다.
“맨 처음에 한 번은 열렸어.”
“그 아공간 당신이 직접 만든 거예요?”
“아니?”
“그럼?”
“스승님이 내게 선물해 준 거야.”
“그 스승님은 마법사?”
“드래곤이니까.”
“마법사가 만든 아공간이라서 그래요.”
“그게 무슨 소리지?”
“마나 속박 마법의 제약을 받지 않는 유일한 기운은 모든 기운이 뒤섞인 혼돈의 기운이에요. 만일 그 아공간을 당신이 만들었다면 문제없이 열렸을 거예요. 하지만 일반 마나를 가진 마법사가 만든 아공간은 열리지 않아요.”
“처음에 한번 열렸던 것은 내가 가진 혼돈의 마나 영향을 받아서 그랬던 건가?”
“그랬을 거예요. 그러다가 혼돈의 마나가 약해지면서 마나 속박 마법의 영향을 받게 된 거고요. 아공간의 입구가 저절로 닫혔을 거예요, 그렇죠?”
“진짜 머리가 좋은 모양이네?”
“맞아요, 가슴 큰 여자는 머리가 나쁘다는 건 속설에 불과해요.”
“천족도 그런 소릴 해?”
“마족도 그런 소릴 하는 걸요.”
“어딜 가나 그런 말은 있다는 거구나.”
“사는 건 거의 비슷하니까요.”
하라미는 주위에 널려 있는 검은 덩어리를 주워 불길 안으로 던져 넣었다. 곧 불꽃이 커지고 주위가 훈훈해졌다.
주위를 둘러보던 하라미는 벌떡 일어나더니 자리를 옮겼다.
잠시 후 자리로 돌아온 그녀의 품에는 이끼도 아니고 그렇다고 풀이라고 하기도 힘든 특이한 식물이 가득 안겨 있었다. 두께가 5센티미터가량인 그것은 매트리스와 비슷했다.
“화장실 간 거 아니었어?”
“난 등이 푹신해야 잘 자거든요.”
“자려고?”
“1주일 동안 거의 잠을 자지 못했어요. 이번엔 함께 가요.”
“알았어.”
김필도는 하라미를 따라나섰다.
하라미를 따라간 곳에는 특이한 풀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김필도와 하라미는 특이한 식물을 잔뜩 뜯어 돌아왔다. 그것들을 바닥에 깔아 잠자리를 만든 하라미는 그 위로 누웠다.
“아이고, 차라!”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잠에 빠져들었다.
김필도는 잠에 빠진 하라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조각처럼 예쁜 것만은 아니었다. 제법 귀여운 구석이 보였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1미터90센티미터까진 어떻게 커버를 한다고 하지만 3미터는…… 절대 안 돼!”
김필도는 몸을 부르르 떨고는 요른이 남긴 마법서를 집어 들었다.
제8장 고대의 역사
따가운 눈길에 김필도는 눈을 떴다. 잠에서 깨어난 하라미가 이편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꿈인 줄 알았지?”
김필도는 책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마지막 순간에 기분이 어때요?”
그녀는 대뜸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나는 헤를리온에 대해 제법 연구를 많이 했어요. 아마 천계에서 헤를리온에 대해 나보다 많이 알고 있는 이는 없을 거예요.”
“얼마나 알고 있는데?”
“헤를리온은 선택된 자이며 죽은 자여야만 착용할 수 있다는 사실요.”
“죽은 자가 착용할 수 있다는 말은 알겠는데 선택된 자라는 건 무슨 뜻이지?”
“만일 우리 둘이 헤를리온을 얻었어요. 그 헤를리온을 착용하고 싶은 사람은 당신이에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죠?”
“심장에 구멍을 뚫고 죽어야지.”
“만일 심장에 구멍을 뚫고 죽었는데 제가 헤를리온을 착용시켜 주지 않으면?”
“……그냥 죽는 거구나.”
김필도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죽은 자만 착용할 수 있다고 하였던 헤를리온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돼 있었다.
다른 이들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자신을 버릴 줄 모르는 자는 절대 헤를리온을 얻지 못한다.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에요.”
“난 운이 좋은 사람이네.”
“그때 기분이 어땠어요?”
“죽는 순간?”
“네.”
“궁금해?”
“아무나 경험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한편으로는 짜증도 나고, 한편으로는 시원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통쾌하기도 했어.”
“짜증은 모든 희망이 사라져서일 테고, 시원하다는 건 왜죠?”
“지긋지긋한 고난이 끝났잖아.”
“그럼 통쾌하다는 건?”
“그놈 얼굴에 씹고 있던 포션 병 조각을 뿜어 버렸거든. 병조각 몇 개는 눈으로 파고들어 갔어.”
“그놈이면 세이아칸?”
“응.”
“풋!”
하라미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마지막 순간에 그런 생각을 한 그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안 자요?”
“하라미 네가 깼으니까 이제 자야지.”
“이왕 잘 거면 나랑 함께 자지 그랬어요. 그럼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도 막아 주고 좋잖아요.”
“그러다가 사고 치면 꼼짝없이 코를 꿰게 되는데 그럴 순 없잖아.”
“자신을 못 믿어요?”
“나야 내 자신을 확실하게 믿지.”
“그럼 상관없잖아요.”
“하지만 이놈은 못 믿거든.”
김필도는 눈짓으로 제 하체를 가리켰다.
“킥!”
하라미는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김필도를 보며 말했다.
“여기가 따뜻할 거예요.”
“땡큐!”
김필도는 빙긋 웃으며 하라미가 일어난 자리로 가 누웠다. 하지만 이내 얼굴을 찌푸렸다.
“왜 그러죠?”
“전엔 키 가지고 위축된 일이 전혀 없었거든.”
“풋! 이거 어떻게 타는 거죠?”
하라미는 피식 웃으며 카판을 가리켰다.
“한 잔 타줘?”
“말로만요. 타는 건 내가 알아서 할게요.”
“알았어.”
김필도는 카판 내리는 법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첫 번째 설명이 끝나고 두 번째 설명을 하다가 그는 잠이 들었다.
“알았어요.”
하라미는 김필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왜 그랬을까?
그는 인간이고 자신은 천족이다. 몸 구조는 같지만 체구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엄연히 다른 종족이다.
그에게 천족의 풍습을 강요할 이유가 없다.
실력이 부족해 그를 죽이지 못하면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다. 그냥 지나가다가 개에게 물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이해를 못하는 그에게 천족의 풍습을 설명하고, 그 풍습을 지키기 싫으면 죽이라고까지 했다.
그가 좋아서?
하라미는 반문해 보았다.
만난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아서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럼 첫눈에 반해서?
그건 그럴 수도 있다. 키가 좀 작아서(?) 그렇지, 검은 머리에 푸른 눈동자는 늘 꿈속에서 그렸던 사내 모습이고, 미남이고, 실력도 뛰어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