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169화 (169/225)

# 169

“아냐. 스승님 때문이야.”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카판 내릴 준비를 했다.

전에 대천신군이 문 대륙으로 떠날 때 일이 있어서 가지 못했다. 하지만 많은 것들이 궁금했다. 그래서 대천신군이 돌아오자마자 스승인 라이자칸을 붙들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때 스승님으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이름이 루시안이다. 검술은 백지에 가까웠던 자가 죽음을 각오하고 검술을 익혀나가는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어떤 사람인지 내내 궁금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그를 만난 것이다.

“아무튼 고마워요.”

하라미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물이 필요하다고 했지?”

준비를 마친 그녀는 주전자를 들고 호수로 향했다.

“어?”

주전자에 물을 받던 하라미는 깜짝 놀랐다. 호수 안쪽에 온몸이 투명한 물고기가 헤엄쳐 가고 있었다.

그녀는 뚫어지게 보았다.

“세상에…….”

놀랍게도 호수 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투명한 물고기는 ‘불사의 마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전설의 물고기인 드래곤 피시였다. 드래곤 피시의 효능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드래곤 피시의 피를 복용하면 검을 다루는 자는 오라 블레이드 경지에 오를 수 있고, 마법을 익히는 마법사는 5클래스 마법을 펼칠 수 있는 마력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더불어 죽은 자도 살려낸다는 최고의 포션이 되기도 한다. 드래곤 하트와 버금간다는 드래곤 피시가 호수 속에 있었다. 그런데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수십 마리가 떼를 지어 몰려다니고 있었다.

“식량!”

하라미는 주전자를 옆에 두고 모닥불이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잠시 후 그녀는 헬칸을 들고 호수 앞에 섰다.

그녀에게는 드래곤 피시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호흡을 고른 하라미는 헬칸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차앗!’

내심 기합을 내지르며 훌쩍 몸을 날렸다.

‘타앗!’

2미터를 날아간 그녀는 재차 기합을 지르며 헬칸을 힘차게 찍었다.

철벅!

강한 힘이 실린 헬칸이 수면으로 파고들었다. 헬칸과 수면이 부딪친 충격파가 물속으로 퍼져 나가고, 기절한 드래곤 피시가 허연 배를 드러내며 떠올랐다.

“야홋!”

그녀는 기쁨에 찬 환성을 내지르며 드래곤 피시를 밖으로 내던졌다. 한 번의 칼질로 잡은 드래곤 피시는 전부 열 마리였다.

“이런 멍청이!”

몸이 급속하게 얼어오자 그녀는 부랴부랴 밖으로 뛰어나갔다.

투두둑!

얼음으로 변한 천 조각들이 떨어져나갔다.

하지만 하라미는 그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쫓기듯 내달렸다.

밖으로 나온 하라미는 폴짝폴짝 뛰어 물기를 털어냈다. 그러고는 후다닥 모닥불 가로 달려갔다.

모닥불 앞에 서서도 쉬지 않고 물기를 닦아냈다. 그렇게 10분가량 흐르자 비로소 한기가 가셨다.

“그나저나…….”

하라미는 한심한 얼굴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가슴과 하체를 가렸던 옷이 절반 이상 떨어져나가고 없었다. 가슴은 그나마 좀 나은데 하체를 가린 옷은 차라리 벗는 게 나겠다 싶을 정도였다.

조금 전까지는 속옷이었는데 지금은 치마로 변해 있었다. 그것도 속옷보다 더 짧은 치마로.

“벗고 들어갈걸.”

그녀는 찌푸린 얼굴로 호수를 바라보았다.

왜 그 생각을 못했는지.

“바보 멍충이!”

그녀는 머리를 사정없이 쥐어박았다.

“아얏! 헹! 아파!”

얼마나 세게 쥐어박았는지 눈물이 핑 돌았다.

“어쩔 수 없지 뭐.”

이내 피식 미소를 지은 그녀는 다시 일어나려고 상체를 숙였다.

“어?”

좌식 테이블 위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에 상자 안쪽이 들어왔다. 가장 먼저 그녀의 눈을 붙든 것은 작은 구슬 세 개였다.

“먹을 게 있었으면서…….”

하라미는 입 안 가득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사실 그녀는 이틀 동안 굶은 상태였다.

배가 고프면 눈동자가 돌아 버릴 정도로 견디지 못하는 그녀에게 이틀 동안의 굶주림은 엄청난 시련이었다.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구슬이 빵으로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하나만 먹을까?”

하라미는 김필도를 바라보았다. 깊은 잠이 든 듯 그는 미동도 없다.

“이거 하나 먹어도 되죠?”

그녀는 속삭이듯 물었다.

“어떤 색의 빵을 먹고 싶냐고요? 하얀 빵을 먹고 싶어요. 하나 정도는 먹어도 된다고요. 알았어요. 고마워요.”

하라미는 혼자 묻고 답하더니 하얀색 구슬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미련 없이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하라미는 행복한 얼굴로 구슬을 깨물었다.

하지만 드래곤 하트가 씹힐 리가 없었다.

“좀, 따따하네. 난 따따한 빵을 조아해요. 에이!”

결국 씹히지 않자 한 번에 꿀꺽 삼켜 버렸다.

“이제 좀 살겠네.”

금방 삼킨 그것이 실버 드래곤 유드카가 남긴 맹약의 구슬이란 사실을 꿈에도 알지 못한 하라미는 배를 슬슬 쓰다듬고는 옆에 놓인 책을 들었다.

읽어보려는 것보다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첫 페이지를 펼쳤던 그녀는 얼른 원래 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김필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김필도를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호숫가로 갔다. 잡은 드래곤 피시를 보관할 장소가 필요했다.

헬칸으로 바닥에 구멍을 파고, 물을 채운 다음 던져 놓았던 드래곤 피시를 집어넣을 즈음, 배에서 신호가 왔다. 처음엔 시원한 음료를 마셨을 때와 비슷한 싸한 기분이 배에서 느껴졌다. 그때만 해도 하라미는 고개만 갸웃할 뿐이었다.

“오랜만에 음식이 들어가서 그런가? 아냐, 배가 고파서 쓰린 걸 거야.”

맹약의 구슬이 녹으면서 나타난 증상이란 사실을 알 리가 없는 하라미는 물구덩이 안에 넣어 두었던 드래곤 피시 한 마리를 꺼냈다. 그러고는 꼬리 부분에 칼자국을 냈다. 그곳으로 투명한 액체가 흘러나오자 재빨리 입을 가져다 대고 빨았다.

피는 의외로 따뜻했다. 그 느낌을 음미하며 그녀는 더 신나게 빨았다.

사건이 일어난 건 그때였다.

우르릉!

느닷없이 뱃속에서 천둥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직도 배가 덜 찼나?”

꽤 뛰어난 머리의 소유자였지만 자신의 몸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그녀는 뱃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배고픔과 연관 지었다.

우르릉! 스아악!

또다시 천둥치는 소리가 들려오며 맹약의 구슬이 냉기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헉!”

하라미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그제야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엄청난 힘이 감지됐다.

“어떻게…….”

그녀는 작은 구슬이 들어 있던 상자를 바라보았다.

“호, 혹시?”

문득 저 작은 구슬이 드래곤이 남긴다는 맹약의 구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상자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금색 구슬을 집어 들고 눈을 감았다.

“마, 맙소사!”

그녀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금색 구슬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예상대로 그것은 드래곤이 남긴 맹약의 구슬이었다.

“하지만 맹약의 구슬은…….”

비록 맹약의 구슬이 드래곤 하트로 만들어졌다지만 복용한다고 해도 바로 녹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맹약의 구슬이 녹을 수 있는 어떤 계기가 주어져야만 한다.

“드래곤 피시 때문이었어.”

하라미는 황당한 얼굴로 소리쳤다.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없다. 만일 드래곤 피시의 피를 복용하지 않았더라면 맹약의 구슬은 약간 녹다가 말았을 것이다. 처음에 느꼈던 약간 시원한 느낌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 상태에서 드래곤 피시의 피를 복용하자, 자극을 받은 맹약의 구슬이 녹기 시작한 것이다.

“그나저나 큰일 났네.”

하라미는 울 듯한 얼굴로 김필도를 바라보았다.

맹약의 구슬은 목숨을 걸 만큼 엄청난 보물이다. 그런 보물을 허락도 받지 않고 꿀꺽해 버린 것이었다.

스아악!

“에이, 나도 모르겠다. 오래 산다니까 평생 갚지 뭐.”

또다시 엄청난 기운이 쏟아져 나오자 하라미는 급하게 몸에 걸치고 있던 천을 벗었다.

뿜어내는 냉기로 보건대 실버 드래곤이 남긴 맹약의 구슬이 분명했다. 실버 드래곤의 맹약의 구슬이 녹으면 모든 것이 얼음으로 변하고 말 터인데, 하나밖에 없는 옷을 잃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 상태로 정좌를 했다.

몸속에서 일고 있는 기운은 자신이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냥 관조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호수 물보다 더 차가운 기운이 쏟아져 나와 사지로 흘러갔다. 꽁꽁 언 몸은 금세라도 얼음조각으로 부서져 내릴 것만 같았다.

하라미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입을 벌리거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뒹굴면, 마나가 폭주하여 모든 것을 잃고 만다.

참아내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냉기는 점점 강해지고 그녀의 몸 주위로 얼음이 얼기 시작했다. 얼음의 두께는 시간이 갈수록 두꺼워졌다.

“허공!”

이 말이 머릿속을 관통했다.

모든 감각은 사라지고, 살아 있다는 사실도 믿어지지 않는다. 아니, 죽은 건지 살아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부유하는 바람 같고, 수면에 닿자마자 녹아 버리는 눈 같기도 하다.

시간이 사라지고, 장소가 없어지고, 사물이 자취를 감춘다. 존재감 자체가 없는 완전하게 텅 빈 상태다.

‘이제 채운다!’

하라미는 내심 중얼거렸다.

그러자 몸 안으로 뭔가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것은 따스한 기운이었고, 생기였고, 거력이었다.

먼저 아랫배를 채우고, 가슴을 채우고, 머리를 채운다. 그리고 온몸 구석구석 빈 공간을 채운다.

‘나는 하라미다!’

파앗!

그녀를 감싸고 있던 얼음조각이 잘게 부서지며 비산했다.

“휴우!”

하라미의 입에서 깊은 숨이 흘러나왔다.

번쩍!

그녀의 눈이 떠지고, 금광과 은광이 뒤섞인 광채가 전방으로 쏘아져 나갔다.

“끙! 괴물이 됐네.”

하라미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전엔 완전한 금색 피부였는데 지금은 은색 광채가 은은하게 흐르고 있다. 은색과 금색이 뒤섞인 묘한 피부색이 돼 버린 것이다.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자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김필도가 이편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빵인 줄 알고…….”

하라미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맹약의 구슬을 빵으로 착각했다는 거야?”

“빵만 보면 이성을 잃는 스타일이라서…… 미안해요, 대신 평생 갚을게요.”

“말이나 못 하면.”

“용서해 주는 거죠?”

“꿀꺽한 정도가 아니라 이미 녹여 버렸는데 용서하고 말고가 어디 있냐? 옷이나 입어.”

“맞아, 옷.”

하라미는 벗어 두었던 옷을 걸쳤다.

“저건 뭐지?”

김필도는 구덩이 안에 있는 물고기를 가리켰다.

“드래곤 피시라고 부르는 물고기요.”

“엄청난 보물 같던데?”

“맞아요. 드래곤 하트에 버금가는 보물이에요. 맹약의 구슬을 전부 녹여 버린 매개체가 바로 저놈들이고요. 그런데 먹었어요?”

하라미는 물구덩이를 가리켰다. 구덩이 안에 있어야 할 드래곤 피시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응!”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먹었는데요?”

“싱싱한 녀석들을 보니까 회가 땡기더라고.”

“회?”

“머리부터 씹어 먹었다고.”

“아홉 마리를 전부?”

“응!”

“몸은 괜찮아요?”

“지금은 괜찮아.”

“그럼 당신도?”

하라미의 시선이 상자로 향했다. 상자 안에 있던 두 개의 구슬 중 금색 구슬이 보이지 않았다.

“놔두면 네가 전부 훔쳐갈 것 같아서 꿀꺽해 버렸지.”

“그럼 저것까지 드시지 왜 남겼는데요?”

“저건 주인이 따로 있어.”

“누군데요?”

“자식도 없고 모아놓은 돈도 없고, 쓸데없이 나이만 먹은 늙은 천족을 한 명 알거든.”

“천족에게 줄 거였어요?”

“응!”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검은 돌을 주워 모았다.

“뜨거운 불! 안락한 삶을 줄지어다! 파이어!”

그는 상자 안에서 마법 지팡이를 꺼내 쌓아 놓은 검은 돌무더기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