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
화르륵!
마법 지팡이 끝에서 마나가 흘러나오고 그 마나는 곧 불길로 변해 검은 돌을 태웠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은 금세 주위를 훈훈하게 데웠다.
“마법을 배우는 거예요?”
하라미는 모닥불 가로 다가앉으며 물었다.
“누군가에게 전수해 달라고 했는데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드래곤이 남긴 마법이라면 아주 오래 걸릴 거예요.”
“헤를리온 덕분에 긴 수명을 얻었잖아. 수백 년이 걸리더라도 완성해야지.”
김필도는 다시 책을 들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고 올게요.”
하라미 옷을 만들 때 썼던 단도를 집어 들었다.
“풋!”
그녀를 바라보던 김필도는 피식 웃었다.
“왜요?”
“이쑤시개 같아서.”
“지금 나 놀리는 거죠?”
하라미는 김필도를 흘겨보았다.
“헬칸도 함께 가져가.”
“알았어요.”
하라미는 싱긋 웃으며 헬칸을 들었다.
“원래 이리 무거운 거였어요?”
“손잡이에 보면 특이한 기구 보이지?”
“네.”
“그걸 왼편으로 끝까지 돌려.”
하라미는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자 헬칸의 무게가 훨씬 가벼워졌다.
“일부러 무겁게 한 거예요?”
“덩치 큰 녀석들하고 싸워야 하니까.”
“그렇네요. 다녀올게요.”
하라미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몸을 돌렸다.
“헙!”
김필도는 다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적나라하게 노출된 하라미의 엉덩이를 보는 순간 피돌기가 빨라졌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었다.
“빌어먹을 티(T) 자.”
김필도는 고개를 거칠게 흔들었다.
그는 주전자에 물을 떠 와 삼발이의 선반에 올려놓고, 물이 끓는 동안에 카판 내릴 준비를 했다.
준비가 끝나자 주전자는 하얀 수증기를 뿜어냈다.
그는 주전자를 잡고 카판 가루 위쪽으로 조금씩 부었다. 카판 가루가 부풀어 오르며 특유의 향이 풍겨 나왔다.
머릿속을 맑게 해 주는 향이었다.
진한 액체가 용기에 차올랐다. 내려진 카판을 잔에 따르고 책을 들었다.
“가만.”
책을 보기엔 등이 너무 허전했다. 뭔가 기댈 게 있나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녀석이면 되겠네.”
1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커다란 물체를 보며 싱긋 웃었다. 뒤집어 놓으면 침대로 사용해도 될 것 같았다.
그 옆으로 다가간 그는 머리 부분을 잡은 채 질질 끌고 제자리로 왔다. 그러고는 힘을 줘 뒤집었다.
“침대 맞네.”
놀랍게도 주워온 물체는 모양이 침대와 아주 비슷했다. 먼지를 털어내고 카펫처럼 생긴 풀을 깔면 그럴싸한 침대가 만들어질 듯했다.
“와우!”
요로 사용했던 특이한 풀을 들어 올린 김필도의 얼굴에 활짝 미소가 맺혔다. 뜯어 올 때 파릇파릇했던 풀이 마르자 솜을 집어넣은 이불처럼 변해 있었다.
대충 먼지를 털어내고 침대 형태의 물체 위에 풀을 깔았다. 풀을 세 겹으로 깔고 나자 푹신한 침대가 완성됐다.
침대를 모닥불 옆으로 바짝 붙이고 헤드 부분에 좌식 테이블을 놓았다. 카판잔을 테이블 위에 놓고 침대로 올라가 헤드 부분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완벽하네.”
김필도는 마법서를 들었다.
요른의 마법에는 서클 개념이 없었다. 마나를 구현하고 펼치는 방법만 적혀 있었다. 그런데 마법서에 적힌 모든 마법이 너무 쉽게 펼쳐졌다.
“거참 이상하네. 머리가 나쁘진 않지만 그렇다고 천재는 아닌데.”
김필도는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만났을 때 요른은 그의 마법을 완성하려면 40년은 걸린다고 했다. 그런데 그가 남긴 글을 대하는 순간 머릿속에 새긴 것처럼 박혀들면서 암기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펼쳐지기도 했다.
천재, 아니 초천재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김필도가 자신이 천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마법서의 마지막 장에서였다.
-네가 이글을 보고 있다면 내가 남긴 맹약의 구슬을 녹인 후일 것이다.
요른의 글은 그렇게 시작됐다.
-사실 내 딸은 진작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게 내 딸을 찾아서 맹약의 구슬을 전해 주라고 했던 건 내가 혹시 내 마법을 먼저 익힐까 걱정이 돼서다.
나는 마법을 이 책자와 맹약의 구슬 두 곳에 남겼다.
이 마법서만 가지고 익히면 최소 40년이 걸리겠지만 내 맹약의 구슬을 복용한 후에 익히게 되면 금세 완성할 수 있을 게다.
물론 글 안에 숨겨진 수많은 행간은 평생 안고 가야 할 숙제겠지만.
아무튼 이건 네 녀석에게 주는 선물이다.
유용하게 사용하도록 해라.
“스승님!”
김필도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너무 많은 것을 받는다는 생각이 든다. 같은 종족도 아니고 다른 종족이 아닌가. 그런데 요른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내주었다.
그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는지.
-이제 우리 드래곤의 이야기를 해 주마.
신마전쟁 전 싸움에서 우리가 다두 드래곤에게 패했다는 건 너도 들었을 것이다. 그 패배로 우리는 용언 마법을 잃었다. 용언 마법을 잃은 드래곤은 더 이상 드래곤일 수가 없다. 인간에게 천족에게 마족에게 사냥당하는 덩치 큰 몬스터일 뿐이었다.
비록 사냥을 당하는 운명으로 수천 년을 살아왔지만 그건 견딜 수 있었다. 인간이, 마족이, 천족이 올 수 없는 높은 산으로 가면 그만이니까.
우리를 가장 치욕스럽게 했던 자들은 다름 아닌 드래고닉이었다.
“드래고닉?”
김필도는 고개를 갸웃했다.
-많은 이들이 대륙의 원 주인이 다섯 종족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일곱 개의 종족이 있었다. 다섯 종족에 의해 멸망의 길을 걸었던 철족과, 또 다른 종족인 드래고닉이다. 일곱 종족 중 가장 강한 종족은 천족도, 마족도, 철족도 아니다.
그들은 바로 드래고닉이다.
그들이 언제 대륙에 나타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 드래곤보다 더 오래 전에 나타났다는 말도 있고, 차원을 건너왔다는 말도 있고, 어둠의 땅인 헨에서 왔다는 말도 있었다.
사실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는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그들의 능력이었다.
그들은 수많은 키메라를 만들어 냈다.
현재 짐승이 아니라 몬스터라고 불리는 대부분을 그들이 창조했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다.
드래곤의 해츨링을 잡아다 다두 드래곤을 만들어 내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드래고닉과 우리와의 전쟁은 필연적이었다.
수많은 세월 동안 그들과 전쟁을 벌였다.
아니 그들이 창조한 최강의 키메라인 다두 드래곤과의 전쟁이었다.
“맙소사!”
설마 다두 드래곤이 종족이 아닌 키메라의 하나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더불어 다두 드래곤을 만들어 냈다는 드래고닉. 그들의 정체가 궁금했다.
-전쟁이 극에 달한 건 신마전쟁을 초래했던 정령전쟁 때였다. 역사는 인간이 정령 전사를 시기하여 일으킨 걸로 돼 있지만 그건 우리가 꾸민 것이다.
그 당시 우리 드래곤은 드래고닉의 근거지를 찾아냈고, 없애야만 했다. 그리고 우리 드래곤 종족은 용언으로 맹세를 했다.
전쟁에 패하면 모든 것을 버리겠노라고.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쏟아내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종족의 미래를 걸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드래고닉과 다두 드래곤은 강했다.
수백 년 동안 이어진 전쟁에서 결국 우린 패했다.
아니 패할 수밖에 없는 전쟁이었다.
우리 목표는 다두 드래곤이 아니라 드래고닉이었기 때문이었다.
드래고닉이 지닌 모든 지식을 파괴했고 지식을 보유하고 있는 드래고닉을 대부분 없앴다. 마지막 일격을 쏟아 붓고 있던 차에 다두 드래곤이 나타났다.
우린 패배를 기꺼이 인정했다.
전쟁에서는 패하고 미래를 잃었지만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왜냐면.
우리 숙적인 드래고닉을 멸망시켰으니까. 아니,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으니까.
드래고닉이 멸망하지 않았다는 건 신마전쟁 후에 알았다. 신마전쟁이 끝나고 차원의 벽을 세운 드반드쉬는 놀랍게도 드래고닉의 후예였다.
그렇다면 드래고닉은 멸종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그가 왜 차원의 벽을 세워 각 종족을 분리시켰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나는 그걸 알아보기 위해 리모스로 들어갔다. 하지만 알아내지 못했다.
다만 문 대륙에 있는 무엇인가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것만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튼 내가 네게 해 줄 이야기는 이게 전부다.
반드시 남겨야 하는 드래곤의 역사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치욕의 역사다.
어쩌면 네가 사는 그 시대에 드래고닉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널 믿는다.
실전 마법과 내가 남긴 마법을 익힌 너는 드래고닉을 박멸해 줄 것을.
학사 사시미 김필도!
건투를 빈다!
“물론입니다, 형님! 놈들이 나타나는 순간 제 손에 죽게 될 겁니다, 전부.”
김필도는 요른이 남긴 말이 적힌 부분을 찢어냈다.
그렇게 잠시 요른의 편지를 바라보다가 불속으로 던져 넣었다.
“거참! 내가 복용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하려고.”
“클클클! 욘석아. 죽은 내 딸은 영원히 찾지 못할 테니까 결국 네가 먹을 거잖아.”
“그런가요?”
“넌 죽었다가 깨어나도 내게 안 돼, 욘석아.”
“그런 모양이에요. 전 형님의 머리를 절대 따르지 못해요.”
김필도는 다시 첫 페이지로 돌아갔다.
그가 공부를 하는 방식은 단순하다. 이해가 될 때까지 읽고 또 읽는다. 앞쪽에 모르는 부분이 나와도 상관하지 않는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두고 넘어가면 언젠가는 그 부분에 대해 저절로 알게 된다.
마법을 습득하는 속도는 김필도가 생각해도 놀라울 정도였다. 주문을 떠올리면 마법을 펼친 뒤의 상황이 떠오르고, 마법 지팡이에 마나가 모여든다.
“바람! 죽음의 칼날! 내 의지를 실현하라! 윈드 블레이드!”
외침이 끝나자마자 마법 지팡이 끝에서 강한 바람이 쏘아져 나갔다.
서걱!
그리고 전방에 있던 바위가 싹둑 잘려나갔다.
“멋집니다, 형님!”
김필도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한 방에 바위를 잘라낸다는 건 곧 오라 블레이드와 비슷한 위력이란 뜻이다. 굉장한 힘을 얻은 듯했다.
“루시안!”
바로 그때 어둠을 뚫고 하라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필도는 고개를 들었다. 하라미가 있는 곳은 최소한 5백 미터 건너편이었다.
“루시안!”
또다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았어.”
김필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철각! 빛을 따라잡는다! 헤이스트!”
파앗!
김필도의 신형이 공간을 갈랐다. 바위를 뛰어넘고, 웅덩이를 건너뛰고 바람처럼 내달렸다.
하라미는 폭포 앞에 서 있었다. 시냇물처럼 벽면을 타고 흐르는 폭포라 물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목욕을 한 듯 그녀의 머리카락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냄새가 좋네.”
김필도는 하라미 귀밑에 코를 대고는 킁킁거렸다.
주식에 따라 체향이 다르게 난다고 하던데, 하라미에게서는 달콤하면서도 심신을 맑게 해 주는 냄새가 났다.
함께 하룻밤 자고 나면 삼림욕을 하고 난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목욕을 거의 못했거든.”
“그런데 왜?”
“저 안에 뭔가가 있어.”
하라미는 안쪽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커다란 동굴이 뚫려 있었다.
“뭐가 있는데?”
“시체.”
“진짜?”
“응!”
“가 보자.”
김필도는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안쪽은 푸른빛으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벽면에 박힌 광물이 내는 빛이었다. 그 빛은 어렵지 않게 사물을 구분할 정도는 되었다.
“여긴 정지된 공간이야.”
동굴 내부의 마나 흐름이 실전 마법을 배웠던 그곳과 흡사했다.
“정지된 공간이라는 건 무슨 뜻이죠?”
“아공간을 구현하는 기술로 만들어진 공간이라고.”
둘은 동굴을 따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