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
1백여 미터를 걸었을까. 갑자기 동굴이 확 넓어지며 광장이 나타났다. 광장에는 각양각색의 옷을 걸친 자들 시체가 널려 있었다.
“그런 거예요?”
“응!”
“그런데 복장이 고대 스타일이에요.”
“고대 스타일은 어떤 건데?”
“천 두 개로 몸을 가렸어요.”
“천 두 개로 가능해?
“작은 천과 큰 천이었는데 생김새는 직사각형이었어요.”
“작은 건 속옷?”
김필도는 하라미의 하체를 보았다.
“맞아요. 허리에 감고 아래로 돌려서 장신구로 고정하는 거예요. 겉옷 또한 취향대로 감아서 브로치 같은 장신구로 고정했고요.”
“저들이 입은 것도 그런 거야?”
“그럴 거예요. 그런데 전부가 신분이 높은 자들인가 봐요.”
“왜?”
“천을 두 개 사용한 자들은 지배 계급밖에 없었거든요.”
“나머진 어떻게 하고 살았는데?”
“벗고 살았어요.”
툭!
실수로 하라미가 시체 한 구를 건드렸다.
푸스스!
그러자 시체는 한순간에 가루로 흩어졌다.
“엄청나게 오래된 시체들이네.”
정지된 공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라 상태를 넘어 가루로 흩어진다는 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세월동안 이곳에 방치됐다는 뜻이다.
문득 시체들의 정체가 궁금했다.
김필도는 좀 더 자세하게 살피며 나아갔다.
하지만 광장에서는 시체의 정제를 밝혀 줄 어떤 단서도 찾지 못했다.
광장을 살피고 난 김필도와 하라미는 광장에서 안쪽으로 나 있는 동굴로 들어갔다.
“헐!”
동굴로 들어선 김필도는 혀를 찼다.
동굴 좌우측 벽면은 유리처럼 투명한 벽이 세워져 있었다. 그 안쪽에는 갖가지 생명체가 마네킹처럼 서 있었는데, 그것들은 다름 아닌 대륙에 존재하는 몬스터들이었다.
“맙소사!”
얼굴을 찌푸리며 걷던 하라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짜증 섞인 얼굴로 전면을 노려보았다.
그녀 앞 진열장에는 액체가 가득 든 커다란 유리병이 놓여 있었다. 상당히 잘 만들어진 듯 벽 너머임에도 불구하고 유리병 속이 그대로 보였다. 그 유리병에 담겨 있는 나체는 다름 아닌 드워프였다.
드워프뿐만이 아니었다.
수십 개의 유리병 안에는 천족, 마족, 엘프 등 모든 종족이 총망라돼 들어 있었다. 한 객체가 아니라 노인, 성인, 어린아이, 남자 여자 등, 성별도 다양했다.
심지어 천족과 마족은 각 계급별로 들어 있었다. 김필도가 멈춰 선 곳은 3미터 키의 천족 앞이었다.
“제1계급부터 제3계급까지 신장이 3미터예요.”
옆으로 다가온 하라미가 설명을 해 주었다.
“본 적 있어?”
“어떤 걸 말하는 거죠?”
“사내 알몸.”
“내가 몇 살인 줄 알아요?”
“몇 살인데?”
“1202살.”
“1천 년 이상 살았는데 사내 알몸을 본 적이 없다면 말이 안 된다는 거야?”
“거짓말이란 거죠. 그리고 난 거짓말을 못해요.”
“진짜?”
김필도는 천족의 생식기를 살폈다.
생식기의 크기는 키와 비례하지 않는다고 하였던 누군가의 말이 맞았다. 천족이나 마족의 생식기는 사람보다 더 왜소했다.
‘별것도 아닌 것들이 거들먹거리기는.’
벌레 운운하던 세이아칸의 얼굴이 떠올랐다.
“좆만 한 새끼가.”
자기가 말해 놓고도 아주 적절한 단어를 골랐다는 듯 김필도는 흡족하게 웃었다.
“무슨 말이죠?”
“남자들끼리 하는 말이야.”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는 건 김필도도 어쩔 수 없었다.
“남자들?”
“사내자식들은 때론 별것 아닌 걸로 자존심을 세우기도 하거든.”
“이를테면?”
“누가 오줌을 멀리 싸는지, 누구 고추가 더 큰지 하는 것들.”
“유치하게.”
“원래 사내들이 그래.”
“방금 욕한 대상이 누구였는데요?”
“날 벌레로 취급했던 세이아칸이야.”
“갑자기 힘이 솟는 모양이죠?”
“응! 천족 사내들의 비밀을 알았거든.”
“방금 말한 그것과 관련이 있어요?”
“앞으로 천족이나 마족을 만나면 어깨에 힘이 두 배로 더 들어갈 것 같아.”
김필도는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그냥 그렇다는 말이야.”
“목소리가 상당히 밝아졌다는 거 알아요?”
“난 유치한 남자거든. 그보다 조금 전에 한 말 말이야.”
“어떤 말이요?”
“사내 알몸을 볼 나이가 지났다고 했잖아.”
“보통 빠른 여자들은 5백에서 6백 살 정도 되면 사내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엄격한 부모를 만난 딸은 1천 살이 돼야 사내를 만나는 게 허락돼요.”
“사내 알몸을 볼 나이가 지났다는 건 곧 잠을 잘 나이도 지났다는 걸 뜻하는 거 아냐?”
“그렇게 되는 거예요?”
“질문은 내가 했잖아.”
“아마도 그럴 걸요.”
“하라미는?”
“그건 말 못해요.”
“비밀?”
“그런 건 궁금한 사람이 직접 알아봐야 하는 거라고요.”
하라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둘은 통로 끝에 도착해 있었다.
“아무튼 이곳까지 오면서 해부학은 확실하게 공부했네요.”
하라미는 고개를 돌려 동굴을 둘러보았다.
키와 외모의 차이만 있을 뿐 장기는 전부가 같았다. 다만 종족에 따라 일부 장기가 비정상적으로 발달해 있다는 게 다를 뿐이었다.
“대충 알 것 같아.”
“뭘요?”
“각 종족으로 표본을 만든 자가 누군지 알 것 같다는 말이야.”
“누군데요?”
“저 안에는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종족이 다 들어 있어. 심지어 드래곤과 문 대륙에서 멸종당한 철족까지도.”
“드워프를 확대시켜 놓은 듯한 그자들이 철족이에요?”
하라미는 조금 전 안쪽에서 보았던 거인을 떠올리고 있었다. 생김새는 드워프와 비슷했는데 키는 천족이나 마족만큼 컸다.
“응.”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떤 종족이 없다는 거죠?”
“드래고닉이야.”
김필도는 동굴을 나서며 말했다.
제9장 남녀 사이에 극복하지 못한 장애란 없다
“허!”
두 번째 광장에 발을 들인 그는 혀를 찼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시체들이 광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마치 수천 명을 몰아넣고 한꺼번에 몰살을 시켜 버린 것 같은 광경이었다.
이곳에 있는 시체들 또한 처음 보았던 시체들과 다르지 않았다.
외상도 없고, 반항한 흔적도 없었다.
“자는 것 같아요.”
“슬립 마법 아닐까?”
“슬립 마법으로 저들을 재운 다음에 몽땅 살해했다는 거예요?”
“슬립 마법과 독안개면 수천 명 아니라 그보다 더 많은 수도 없앨 수 있잖아.”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드래곤 급은 돼야 할 걸요?”
“저들이 드래고닉 일족이라면 가능성이 있어.”
“그게 무슨…….”
하라미는 의아한 얼굴로 김필도를 보았다.
“일단 단서를 찾아보자.”
“알았어요.”
광장으로 들어선 김필도와 하라미는 주위를 꼼꼼하게 살피며 나아갔다. 하지만 전부를 다 보는 건 아니었다. 죽은 자들 중 수뇌로 보이는 자들만 골라서 조사를 했다.
수천 명이 죽은 광장을 한 바퀴 돌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체들에 대한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저기로 가 볼래요?”
하라미는 절벽 위쪽을 가리켰다.
절벽에는 많은 동굴이 뚫려 있었는데, 하라미가 가리킨 곳은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동굴이었다.
“저긴 왜?”
“천계의 천왕은 가장 높은 곳에서 아래를 굽어보시거든요.”
“높은 것들 하이바는 다 거기서 거기라는 거지?”
“하이바?”
“머리를 나타내는 속어야.”
“높은 분들뿐 아니라 아랫것들 머리도 거기서 거기예요.”
“그렇겠지. 업혀.”
김필도는 하라미 앞으로 등을 디밀었다.
“날 업는다는 게 가능해요?”
“그렇게 사내 기를 죽이고 싶니?”
“알았어요.”
하라미는 얼른 김필도 등에 업혔다.
하지만 그녀가 워낙 커서인지 두 다리는 여전히 땅에 닿은 채였다.
“크긴 크네.”
“그러니까 그냥…….”
“이렇게 하면 되잖아.”
김필도는 하라미의 허벅지를 팔에 끼우고 들어 올렸다. 하라미의 동체에 가려 김필도가 보이진 않았지만 어찌됐든 업은 건 맞았다.
“나 무겁죠.”
“생각보다 훨씬 가벼워.”
“그런데 인간의 피부도 아주 부드럽네요?”
하라미는 팔에 와 닿는 김필도의 피부를 음미하며 말했다. 사실 김필도는 드레스 셔츠를 하라미에게 줘 버린 바람에 상체는 벗은 상태였다.
“내가 할 소리야. 피부가 원래 이렇게 부드러웠어?”
김필도는 깜짝 놀랐다.
바람을 빵빵하게 채운 풍선 같았다. 특정 부위만 그런 게 아니라 온몸이 그랬다.
“어떨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도금한 불상 같을 거라고 생각했지.”
“불상?”
“금으로 도금한 인물상. 이곳에서 신전이라고 말하는 그런 곳에 가면 있어.”
“그러니까 날 보고 금도금한 조각상을 연상했다는 거예요?”
“응!”
“인간보다 훨씬 부드러운 피부를 지녔는데, 너무해요.”
“아무튼 미안해. 바람의 속성, 라콰(Laqwa)!”
나직한 외침이 떨어지고 하라미를 업은 김필도의 신형이 절벽 위로 솟구쳐 올라갔다.
1백여 미터를 날아올라 간 그는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세상을 밝히는 불꽃! 내 의지에 답하라! 파이어!”
하라미를 내려 준 김필도는 허리춤에 끼워 두었던 마법 지팡이로 불꽃을 불러냈다.
곧 마법 지팡이 끝에 횃불 크기의 불꽃이 달렸다.
“자!”
김필도는 하라미에게 마법 지팡이를 건넸다.
마나를 계속 활성화시키고 있는 상태라 마법 지팡이를 하라미에게 맡긴다고 해서 마법이 풀리거나 하지 않는다.
불을 밝힌 둘은 집 안을 수색했다.
문제의 사내를 발견한 곳은 가장 안쪽이었다.
금발의 중년인이었는데, 사내는 벽면에 뭔가를 새기는 중이었다.
새기는 도중에 죽임을 당한 듯 사내가 남긴 글은 세 줄에 불과했다. 그런데 고대어를 알고 있는 김필도도 읽을 수 없는 글이었다.
“아반어예요.”
글자를 바라보던 하라미가 말했다.
“아반어?”
“신마전쟁 전에 살았던 아반 족이 사용하던 언어예요.”
“해석할 수 있겠어?”
“가능해요.”
하라미는 벽 앞으로 다가섰다.
곧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 크록 아반이 남긴다.
나는 아반 족의 540대 족장이다.
우리를 이렇게 만든 자들은…….
이야기는 거기까지였다.
하라미는 김필도를 돌아보았다.
“이들이 누군지 알아낼 단서였는데 아쉽네.”
김필도는 입맛을 다셨다. 드래곤과 전쟁을 치른 자들이 분명한 것 같은데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드래고닉은 어떤 종족이죠?”
이곳으로 들어오긴 전 김필도가 모든 종족 중 드래고닉이 빠졌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 물었다. 그 말은 곧 이곳에 있는 이들이 드래고닉이란 뜻이기도 했다.
“드반드쉬라는 성을 쓰는 자들이고, 드래곤의 키메라인 다두 드래곤을 만들어 낸 자들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종족.”
“다두 드래곤이 키메라라고요?”
하라미는 깜짝 놀랐다.
그녀가 아는 다두 드래곤은 지상에서 가장 강한 종족이며 신의 능력을 보유한 유일한 종족이다.
그런 종족이 키메라라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툭!
너무 놀라서 그런 듯 발로 크록 아반드쉬의 시체를 슬쩍 건드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