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
퍽!
푸스스!
그러자 무릎을 꿇고 있던 크록 아반드쉬가 가루로 부서져 내렸다.
“아……!”
하라미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죄, 죄송해요.”
하라미는 가루로 변한 크록 아반드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어?”
가루를 바라보던 그녀는 의아하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루 속에서 반짝이는 물체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반짝이는 물체를 들어 올렸다. 그것은 하만티움으로 만든 종이 피루스 두 장이었다.
“피루스예요.”
하라미는 김필도를 보았다.
“뭐라고 적혀 있는지 읽어 봐.”
“알았어요.”
하라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피루스로 시선을 내렸다.
-드반 족이다.
“저 내용과 이어져요.”
하라미는 벽면에 적힌 글을 가리켰다.
“저건 속임수였네.”
“속임수라고요?”
“저자는 드반 족의 누군가가 찾아올 거란 걸 알고 벽에 유언을 남긴 것처럼 한 거야.”
“품속에 있던 피루스를 숨기기 위해서 그랬다는 거예요?”
“아냐, 피루스는 품속에 없었어.”
“그걸 어떻게 아는데요?”
“크록의 품이 열려 있었거든.”
“누군가가 품속을 뒤졌다는 건가요?”
“그런 것 같아. 계속해 봐.”
“알았어요.”
-그들의 배신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우리 아반 족이 창안한 마법은, 몬스터의 사냥감에 불과했던 그들을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전사로 거듭나게 해 주었다. 스스로 신의 아들이라 칭하는 드래곤을 잡아 낼 다두 드래곤도 만들어 주었다.
그들을 형제로 여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강력한 힘을 얻은 드반 스스로 드래고닉이라고 칭했다. 드래고닉은 지상 최강의 전사라는 뜻이다.
그때 그들의 배신을 눈치 챘어야 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드래고닉이라 칭하면서 우리와 갈라설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 역시 그들이 달라지고 있다는 걸 조금씩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다두 드래곤에 대한 명령권을 달라고 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어쩌면 그 때문에 배신이 앞당겨졌는지도 모른다.
드반 족은 수백 년 동안 우리가 축적한 지식과 연구물을 몽땅 훔쳐간 후 전쟁 중이던 드래곤에게 이곳 위치를 발설했다.
평생 연구에만 몰두했던 우리가 수백 객체의 드래곤을 막아 낸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외곽에서 경비를 서던 전사 수백이 죽임을 당했다.
이제 우리 차례다.
나는 수차례 다두 드래곤을 불렀다. 하지만 다두 드래곤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탓에 마지막으로 다두 드래곤에게 두 가지 명령을 내렸다.
하나는 우리를 멸망으로 이끌고 있는 드래곤과 배신자 드반 족의 몰살이었다. 다두 드래곤이 내 명령을 듣게 될지 그건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가 할 일은 다 했다.
졸음이 밀려온다.
우리가 죽으면 아반 족은 영원히 세월 속으로 스러지게 될 것이다. 태어나고 죽는 우리 삶처럼 부족 또한 그럴 거라 믿기 때문에 아쉽진 않다.
다만 한 가지 우리가 창조한 마물 다두 드래곤을 없애지 못하고 떠나는 게 마음에 걸린다.
만일 누군가 이글을 읽는다면 내 부탁을 들어 주기 바란다. 내 부탁은 다름 아닌 다두 드래곤을 없애 달라는 것이다.
크록 아반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을 맺었다.
“무슨 수로?”
김필도는 피식 웃었다.
요른 형님을 생각하면 백번 없애고 싶다. 하지만 드래곤마저 패배시킨 자들은데 무슨 수로 없애겠는가?
“이 사실을 누가 믿을까요?”
하라미는 넋을 잃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반 족, 드반 족, 그리고 그들이 창조한 키메라 다두 드래곤. 아반 족의 연구소를 봤으니 망정이지 누군가로부터 들었다면 자신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말하면 정신병자로 몰릴걸?”
“그렇겠죠?”
“그러니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나도 그럴 생각이에요.”
하라미도 같은 생각이었다. 다두 드래곤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자.”
김필도는 몸을 돌렸다.
“잠깐만 기다려 봐요.”
“왜?”
“이분이 다두 드래곤을 없애 달라고 했잖아요.”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해, 하라미.”
“아니에요. 분명 뭔가 남겼을 거예요.”
“뭘 남겼다는 건데?”
“아반 족은 절대 병기인 다두 드래곤을 창조해서 드반 족에게 줬어요. 그런 경우엔 보통 다두 드래곤을 제어할 수 있는 뭔가를 만들어 두기 마련이에요.”
“그럴까?”
“크록의 품이 벌어져 있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럼 다두 드래곤을 없앨 수 있는 무기가 따로 있다는 거야?”
“그럴지도 모른다는 거죠. 어디 보자…….”
하라미는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훑어보아도 특이한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아무것도 없지?”
“이분은 왜 여기에 글을 썼을까요? 그것도 가장 안쪽에.”
하라미는 크록이 남긴 글을 가리켰다.
“거기에 있을 가능성이…….”
김필도는 말끝을 흐렸다. 글 바로 위에 가느다란 틈이 있었다. 틈의 폭은 피루스 넓이였다.
“저 틈으로 피루스를 집어넣어 봐.”
김필도는 틈을 가리켰다.
“어떻게 넣죠?”
“드반이란 글이 적힌 부분이 먼저 들어가게 해.”
“알았어요.”
하라미는 피루스를 틈에 끼워 넣었다.
스르르!
그러자 나직한 소성과 함께 피루스가 안으로 밀려들었다.
“아!”
하라미는 탄성을 내질렀다.
그르르!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서랍 형태의 벽면이 튀어나왔다. 그 안에는 새카만 색의 정육면체 물체가 들어 있었다.
하라미는 손을 뻗었다.
“멈춰!”
김필도는 하라미의 손을 잡았다.
하라미의 손이 우뚝 멈췄다. 그러고는 김필도를 돌아보았다.
“알았어요.”
그녀는 차갑게 말하고 물러났다.
김필도는 서랍 앞으로 다가섰다.
서랍 안에 있는 물체는 광채가 날 정도로 검다.
주먹보다 약간 큰 크기에 불과했지만 식은땀이 날 정도로 엄청난 위압감을 풍기고 있다.
김필도는 주먹을 폈다 풀었다 반복했다.
“뭐라고 쓰여 있는 거지?”
김필도는 검은 상자에 시선을 묶어 놓은 채 물었다.
하지만 하라미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낮게 흐느끼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제야 김필도는 고개를 돌렸다.
“어?”
그의 얼굴이 의아해졌다. 하라미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고 있었다.
“왜 울어?”
“나, 난 그 상자를 욕심내지 않았어요. 당신 주려고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런데 당신은 내가 훔쳐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잖아요.”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왜 멈추라고 한 건데요?”
“함정일지도 모르니까 멈추라고 한 거잖아.”
“무슨 함정이요?”
“크록은 배신자가 이곳으로 찾아올 걸 예상하고 있었어. 그럼 함정을 팔 게 분명하잖아.”
“그러니까 저게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하라미는 정육면체를 가리켰다.
“반반이지 뭐.”
“난 또.”
하라미는 배시시 웃었다.
“생각보다 예민하네?”
“키가 크지만 나도 여자라고요.”
하라미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알았어. 그건 그렇고 이건 뭐라고 쓴 거야?”
김필도는 헤를리온을 착용하며 물었다.
“어디 보자…… 마훼라고 씌어 있어요.”
“마훼라…… 나쁘지 않은 이름이네.”
김필도는 상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라미는 긴장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마훼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거 수수께끼네.”
마훼를 뒤집어가며 살피던 김필도는 이내 헤를리온을 해제했다. 헤를리온이 완전히 사라지고 손바닥에 마훼만 남았을 때 일이 일어났다.
철컥! 철컥! 철컥!
걸쇠가 풀리는 듯한 소리가 마훼에서 흘러나오더니 검은 기체로 변한 마훼가 김필도의 팔목을 타고 흘러가는 것이었다. 곧 김필도의 오른손이 검은색 기체에 휩싸였다.
“얼른 털어내요!”
하라미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냐, 기다려 봐.”
김필도는 검은 기체를 주시했다.
검은 기체는 전투 기갑을 착용할 때 나타나는 기체 금속 해르마나움과 흡사했다.
기체는 김필도의 오른팔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고는 어느 순간 조금씩 안쪽으로 스며들어갔다.
“괘, 괜찮아요?”
하라미는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헤를리온은 내 몸에 해가 되는 기운이 들어오면 방어를 하는 기능이 있어.”
“그럼 헤를리온이 검은 기체를 받아들였다는 건…….”
“결코 내 몸에 해가 되는 게 아니라는 거지.”
어느새 검은 기체는 김필도 팔 안으로 몽땅 사라지고 없었다.
“그럼 함정은 아니라는 거네요?”
“그런 것 같아.”
“그런데 마훼는 어떻게 끄집어내죠?”
“그걸 내가 알 리가 없잖아.”
마훼가 뭔지, 어떤 기능을 하는지 심지어 무기인지조차도 언급돼 있지 않았다.
“참나. 어떤 물건인지 알려나 줄 것이지는!”
하라미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데 마훼가 무슨 뜻이지?”
“전지전능이란 뜻이에요.”
“그럼 나쁜 건 아닌 모양이네. 아무튼 다 둘러본 것 같으니까 나가자.”
김필도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들은 그대로 두고 갈 거예요?”
동굴 집 입구에 선 하라미는 아래를 가리켰다.
“영면을 시켜 줄까?”
“그게 나을 것 같아요.”
“알았어.”
김필도는 마법 지팡이에 주입하고 있던 마나를 거둬들였다. 그러자 불꽃이 사그라졌다.
“시원한 바람! 무한한 자유를 원한다! 윈드!”
나직한 외침이 흘러나오고 마법 지팡이 끝에서 바람이 불어나왔다. 바람은 점점 강해지더니 광장을 휩쓸고 다녔다.
퍽! 퍽퍽퍽! 퍽퍽!
바싹 마른 시체가 폭발하면서 뿌연 가루가 피어올랐다. 곧 광장 안쪽은 뿌연 가루로 들어찼다.
바람은 쉬지 않고 불었다.
하연 가루들은 하나로 뒤섞이며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마치 눈보라가 휘날리는 광경 같았다.
“부디 극락왕생하십시오.”
김필도는 광장을 바라보며 합장을 했다.
5분여가 지나고 바람이 잦아들면서 뼛가루가 가라앉았다.
“자!”
김필도는 하라미 앞에 등을 댔다.
하라미는 얼른 김필도 등에 업혔다.
그녀를 업은 김필도는 이동 마법을 펼쳐 아래로 내려왔다. 광장을 지나 각 종족의 표본이 전시된 동굴을 무너뜨려 무덤을 만들고, 첫 번째 광장에 있던 시체들도 가루로 만들고 밖으로 나왔다.
“마법 익히는 속도가 너무 빠른 거 아니에요?”
“스승님께서 맹약의 구슬에 마법을 걸어놔서 그래.”
“속성으로 마법을 익힐 수 있도록 해 놨다는 거예요?”
“응!”
“노릇노릇하게 잘 익은 빵을 먹을 걸 잘못했네요.”
“그러게 말이야.”
“아니에요. 난 지금이 딱 좋아요. 만일 흰 빵이 아니고 금색 빵을 먹었더라면 난 많이 후회하고 있을 거예요.”
“착하네.”
김필도는 빙그레 웃었다.
문득 좋은 이들을 많이 만난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세이아칸 같은 자를 만나기도 했지만, 요른, 이카렌, 라이자칸, 히데우스 같은 좋은 인연을 만나기도 했다.
“저도 얼마나 강해졌는지 상상도 못해요. 이젠 스승님과 싸워도 승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스승님이 누군데.”
“당신도 아는 분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