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
하라미는 김필도의 눈을 보았다.
“아무튼 그 향기는 너무 강하다고.”
저절로 나온다는데 할 말이 없었다.
“자르지 않을 거죠?”
“내 건데 왜 네가 신경 써!”
“그게…….”
“알았어.”
“다행이다.”
하라미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일어나자.”
“알았어요.”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인지 저녁인지 모르지만 불을 피우고 드래곤 피시 한 마리씩으로 배를 채웠다.
물론 드래곤 피시의 피를 통해 얻은 마나는 차곡차곡 저장했다.
그런 다음 김필도는 마법서를 들고, 하라미는 그녀의 검을 들었다. 하라미는 신중하게 검술을 펼쳤다.
검술을 펼치면서 그녀는 김필도를 흘끔거렸다.
“그래 가지고 검술이 잘도 늘겠다.”
마법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독파한 김필도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나랑 대련 한번 할래요?”
“자신 있어?”
“그건 내가 물어 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난 마족의 검술을 익혔는데?”
“정말요?”
“이래 봬도 마계10군단 검술 스승으로부터 배웠다고.”
김필도는 침대에서 내려와 헬칸을 들고 하라미 앞에 섰다.
“마계10군단 검술 스승이라면 누굴 말하는 거죠?”
“알리토.”
“정말 알리토로부터 배웠어요?”
“응! 그런데 알리토 유명해?”
“마계3대 검사 중 한 명이에요.”
“마계3대 검사는 누구누군데?”
“칼베리언, 히데우스, 알리토 세 명이에요.”
“네 명으로 바뀌어야 할 거야.”
“루시안이 추천할 한 명은 누군데요?”
“현 마계10군단 군단장.”
“데메우스는 검술이 그렇게 뛰어난 자가 아닌데요?”
“난 이카렌을 말하는 건데?”
“아! 이카렌 쿤타 카킬레우스 백작?”
“응!”
“마계10군단 군단장은 그녀가 아니에요. 그녀는 마계 평의회의 재가를 얻지 못했어요. 그 결정에 불복한 마계10군단 대원들이 항명을 했고, 마족 평의회에서는 그들을 반역자로 선포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마계10군단 대원들과 함께 루루시아를 탈출해서 문 대륙으로 갔어요.”
“그럼 이카렌 대신 데메우스 그놈이 마계10군단 군단장이 됐다는 거야?”
“마계10군단 대원들도 전부 새로 뽑았다고 해요. 듣기론 역대 가장 약한 마계10군단이라고 하데요. 그런데 이카렌이 그렇게 강해요?”
“레드 드래곤 이나함이 남긴 맹약의 구슬의 주인이 그녀거든. 그리고 잊힌 전설의 신검의 하나인 세딕의 주인이기도 하고.”
“그녀의 검은 마계 신검의 하나인 발콘 아니었어요?”
“발콘의 손잡이를 세딕으로 바꿨거든.”
“잊힌 전설의 신검 세딕은 어디서 얻었는데요?”
“리모스.”
“그럼 이카렌 그녀는 레드 드래곤 이나함이 남긴 맹약의 구슬을 복용했고, 잊힌 전설의 신검인 세딕의 주인이며 마계3대 신검의 하나인 발콘의 주인이네요?”
“발콘이 불의 속성을 가진 검이었어.”
“그녀도 빵을 좋아해요?”
그녀도 훔쳐 먹었느냐는 질문이었다.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거든. 그리고 나를 자신과 동등하게 대우해 주었고.”
“그것 때문에 맹약의 구슬과 잊힌 전설의 신검을 줬다고요?”
“죽을 고비도 함께 넘기고 이런저런 사연이 많아.”
“잤구나.”
“그녀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
“그걸 알면서도 보물을 줬다는 거예요?”
하라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잊힌 전설의 신검과 이나함이 남긴 맹약의 구슬. 그것들은 보통 보물이 아니다.
그런 것들을 아무런 조건 없이 줘 버린 김필도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넌 빵인 줄 알고 먹었잖아.”
“하긴.”
하라미는 배시시 웃었다.
“자! 이제 검술을 비교해 보자. 내가 알리토로부터 익힌 마족의 검술을 흘리는 기술이야.”
“흘리는 기술이란 어떤 걸 말하죠?”
“나는 마족이나 천족에 비해 체구가 작고 체중도 적게 나가. 지금 상태에서 그들과 부딪치면 내가 밀릴 수밖에 없어. 그래서 흘리는 기술을 배운 거야.”
“구체적으로 가르쳐 줄래요?”
하라미는 눈을 빛냈다.
체중에 대해 핸디캡이 있는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키가 가장 작은 제5계급 사내들보다 몸무게가 적게 나가다 보니 대련을 할 때 불리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내게 검을 휘둘러 봐.”
김필도는 하라미 앞으로 다가갔다.
“어느 정도 세기로 휘두르죠?”
“전력을 다해.”
“알았어요.”
하라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힘차게 검을 내리찍었다.
스악!
그녀의 검은 산악 같은 기세를 머금고 김필도의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 바로 그 순간 김필도는 헬칸을 수평으로 뉘어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차앙!
하라미의 검이 강하게 헬칸을 후려쳤다.
‘이렇게 하면 머리를 다칠…….’
“헉!”
하라미는 깜짝 놀랐다. 김필도의 머리가 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팔에 힘을 빼려는 순간 헬칸의 검 끝이 푹 꺼지더니 그녀의 검이 아래로 맥없이 흘러내려 버린 것이었다.
휙!
그리고 헬칸의 날이 목 앞에 다가와 있었다.
“이건?”
하라미는 멍한 얼굴로 김필도를 바라보았다.
“내 체중이 가볍고 힘이 약하니까 상대방의 힘을 이용할 수밖에 없어. 흘리는 기술은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큰 효과를 발휘해.”
“다시 한 번 해 봐요.”
“아무 때나 하고 싶은 대로 공격해 봐.”
“차앗!”
김필도가 헬칸을 거둬들이자마자 하라미는 공격을 시작했다.
차앙! 차앙! 차앙!
김필도가 흘릴 때마다 그녀의 검은 다시 허공을 갈랐다.
콰앙! 콰앙! 콰앙!
급기야 하라미의 검과 헬칸이 굉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건 곧 하라미는 물론이고 김필도도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럴 수가?”
하라미는 경악했다. 그녀는 지금 전력을 다해 공격을 하고 있고, 김필도 또한 전력을 다해 막는다. 그런데 부딪친 반발력을 이용하여 검을 들어 올리려는 찰나의 순간에 헬칸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그녀의 검이 미끄러지듯 흘러버린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흘리는 시점이 조금씩 달랐다. 먼저 흘리는 경우도 있고, 나중에 흘리는 경우도 있고, 부딪치는 순간 바로 흘려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김필도가 검을 흘린다는 걸 알면서도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대천신군 대원들이 그렇듯 어이없이 당한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콰앙!
척!
어느새 헬칸이 목 앞에 와 있었다.
“졌어요.”
하라미는 패배를 시인했다.
비록 천족의 최강 기술인 빛의 검술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김필도 또한 실전 마법을 펼치지 않았다.
헬칸을 들어 올릴 때마다 온몸에 마법진이 나타나긴 했지만 주문을 외운 적이 없으니 마법을 펼친 것은 아니었다. 결국은 자신의 패배였다.
“지금부터는 내가 공격할게.”
김필도는 헬칸의 무게 조절기를 끝까지 돌려 40킬로그램으로 증가시켰다.
“실전으로 익히라는 건가요?”
“머리가 아닌 몸으로 익혀야 해.”
“알았어요.”
“손목에 충격이 오는 순간 힘을 뺀다는 거 한 가지만 생각해.”
김필도는 공격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한 공격이었다.
콰앙!
“크윽!”
제대로 흘리지 못하고 충격은 고스란히 하라미의 몫이었다. 헬칸이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자 그녀는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천족의 검에 대해 말해 봐.”
김필도는 다시 헬칸을 찍으며 말을 걸었다.
“천족의 검은 빛의 검술이라고 불러요.”
콰앙!
“으음!”
“계속 해.”
“누구나 빛을 대하면 눈을 감기 마련이잖아요. 그 광채에 검을 실어 보내요.”
콰앙!
“음!”
콰앙! 콰앙! 콰앙!
쿵쿵쿵!
그녀는 연거푸 물러나면서도 자세를 풀지 않았다.
“그럼 비가 오거나 빛이 없는 밤엔 어떻게 하지?”
김필도는 거칠게 몰아붙이며 물었다.
“스스로 빛을 만들어 내요.”
“빛의 마법인 모양이지?”
“그래요. 넓게 퍼지는 빛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수십 줄기의 빛을 만들어 내기도 해요.”
“그 빛에 검을 싣는다는 거야?”
“실력에 따라 빛에 싣는 검의 수가 달라져요.”
“하라미는 몇 개까지 가능하지?”
“난 150개까지 가능해요.”
“가장 많이 싣는 자는 몇 개까지 가능한데?”
“1천 개까지 가능하다고 해요.”
“방어를 하면서 펼쳐 봐.”
“알았어요.”
하라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빛의 검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비록 방어 동작이었지만 그녀의 검은 수십 수백 개로 늘어나 헬칸을 막았다. 그녀는 방어 검술을 펼칠 때마다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김필도 또한 다르지 않았다.
강하게 내리치기도 하고, 약하게 내리치기도 했다.
매번 휘두르는 힘을 변경하여 하라미가 여러 종류의 검을 경험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실체는 하난가?”
“지금은 하나예요. 이건 둘이고?”
“그렇네.”
“이건 다섯이에요.”
“수백 개의 허상과 실체를 동시에 만들어 낼 수 있는 검술이란 말이네?”
“맞아요.”
“헬칸은 그런 자들을 상대로 어떻게 승리를 거뒀는지 알 수가 없네.”
천족의 검술은 1천 개의 빛에 검을 싣는 건 허상이 아니라 전부가 실상이다.
1천 개의 오러 블레이드가 자신에게 날아오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정령 방패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방어구가 있어도 막을 수가 없다. 헬칸은 그런 자들을 상대하여 승리를 거둔 것이다.
“헬칸은 다섯 종족의 검술을 전부 파악하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그럴지도 모르겠네.”
“우리 폭포 쪽으로 자리를 옮기는 거 어때요?”
“씻고 싶어서?”
“밤낮 땀만 흘리고 있잖아요.”
“풋! 저녁때 옮기자.”
둘은 다시 훈련에 돌입했다. 김필도는 헬칸을 내리찍고, 하라미는 빛의 검술을 설명하며 방어를 했다.
그녀가 끊임없이 빛의 검술에 대해 이야기를 한 것은 머리가 아닌 육체가 반응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저녁 무렵이란 말이 맞는지 그것까진 알 길이 없지만 둘은 훈련을 끝내고 폭포 근처로 짐을 옮겼다.
바로 옆에 물이 있어서 그런지 처음에 있던 장소보다 훨씬 아늑했다.
김필도가 불을 피우는 동안에 하라미는 폭포에서 몸을 씻었다.
“배고파?”
불길이 오르자 김필도는 물었다.
“괜찮아요. 당신은?”
“나도 괜찮아.”
“하루에 한 마리면 충분한 것 같아요. 카판은 내가 내릴 테니까 당신도 씻으세요.”
“알았어.”
김필도는 폭포로 갔다.
그의 속옷과 바지 역시 땀으로 범벅이었다. 먼저 옷을 빤 다음에 몸을 씻었다.
수건이 없으니 닦을 게 없었다. 그 상태로 속옷을 걸치고 자리로 돌아왔다.
“끙!”
하라미를 바라보던 김필도는 얼굴을 찌푸렸다. 치마라고 할 수도 없는 짧은 옷을 걸친 채 카판을 내리는 그녀 모습이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이거.”
그는 결국 바지를 내밀고 말았다.
“안 들어간다는 거 알잖아요.”
“잘라서 입으면 되잖아.”
“한 명이나 제대로 걸치는 게 나아요.”
“내가 불편해서 그래. 그리고 다른 이들을 만나면 어떻게 하려고.”
“전투 기갑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에요?”
“하긴.”
“내가 불편하면 여기서도 걸칠까요?”
“아냐, 됐어.”
김필도는 물을 짠 바지를 삼각대 위쪽에 걸었다.
“여기 카판요.”
하라미는 내린 카판을 김필도에게 내밀었다.
“금세 배우네.”
김필도는 코를 킁킁거려 카판 냄새를 맡아보았다.
그녀가 내린 카판은 향은 물론이고 온도도 아주 적당했다.
카판을 한 모금 마시고 침대로 올라가 헤드에 등을 기댔다.
척!
그가 카판잔을 내려놓으려고 하자 좌식 테이블이 옆에 놓였다.
김필도는 시선을 들어 하라미를 보았다.
“꼭 한번 해 보고 싶었거든요.”
“뭘 말이야?”
“아내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