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
“풋!”
김필도는 피식 웃었다.
“어린 시절엔 누구나 꾸는 꿈이라고요.”
“이왕 시작한 아내놀인데 한 가지 더 해줄래?”
“뭔데요?”
“이것 좀 읽어 줘.”
김필도는 마법서를 내밀었다.
“그건 내가 봐선 안 되는 거잖아요.”
하라미는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마법사가 남긴 마법서는 서점에서 파는 단순한 교재가 아니다. 마법을 익히면서 깨달았던 것들이 기록된, 그야말로 보물 같은 책이다. 그런 책은 비술이라고 하여 부모형제에게도 보여 주지 않고, 다 익히고 나면 태워 없애 버리기 일쑤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그런 마법서가 있다고 하면 살인을 동반한 쟁탈전이 벌어진다.
그런데 김필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비서를 보라고 내민 것이다.
“하라미를 위해서 읽어 달라는 게 아냐.”
“그럼?”
“난 지금 이 책의 내용을 토씨 하나 놓치지 않고 전부 암기했어. 그런데 다 익히진 못했어. 책을 계속 보면서 스승님이 남긴 행간을 읽어야 하는데 내용을 앞서 가다 보니까 그게 안 돼.”
“눈과 머리가 따로 논다는 거죠?”
“맞아. 눈은 이 페이지에 있는데 머리는 다음 페이지를 읽고 있어. 그래 가지곤 아무것도 알 수가 없잖아.”
“알았어요.”
마법서를 받은 하라미는 침대 위로 올라와 첫 페이지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녀는 김필도가 내용을 음미하도록 천천히 읽었다.
“어린이에게 마법을 가르치는 것처럼 쓰셨네요?”
하라미는 깜짝 놀랐다. 단순히 읽어 주기만 하는데도 머릿속에 쏙쏙 들어왔다. 마치 머릿속이 종이고 거기에 글을 쓰고 있는 기분이었다.
“완전 쉽게 씌었다고?”
“네.”
“방금 읽었던 내용에서 느낀 점을 말해 봐.”
“그냥 읽기만 했는데요?”
“아무 생각 없이 읽었다는 거야?”
“그래야 하는 거잖아요.”
“너 아버지 빽으로 천좌 제2군이 된 거지?”
“그게 무슨…….”
“너처럼 착한 애는 절대 그런 자리로 올라가지 못하거든. 내 말이 맞지?”
“이래 봬도 난 전사 아카데미를 수석 입학에서 수석으로 졸업했다고요.”
“그런데 검술은 왜 그 모양인데?”
그녀의 검술이 부족하다는 게 아니라 세라핌에 비하면 많이 부족한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었다.
“헤! 수석은 전 과목을 두루두루 잘해야 주는 거거든요.”
하라미는 싱겁게 웃었다.
“말이나 못하면. 아무튼 다시 처음부터 다시 읽어. 이번엔 내용을 음미하면서 읽어야 해.”
“그래도 돼요?”
“지금 내게 필요한 건 기계처럼 읽어 주는 목소리가 아니라 내용에 대한 토론이야.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
“알았어요.”
하라미는 다시 첫 페이지부터 읽어 내려갔다. 이번에 읽는 속도는 처음보다 더 느렸다. 의미를 파악하면서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10페이지 정도를 읽은 후 내용에 대해 김필도와 토론을 했다. 읽는 시간보다 토론 시간이 더 길었다.
그리고 다시 책을 읽고 토론을 하고, 다시 책을 읽어주고 토론을 했다.
책 읽기가 끝난 건 다섯 시간이 흐른 후였다.
“아주 쉽게 쓰인 것 같았는데…….”
하라미는 놀란 눈으로 마법서를 보았다.
어린애도 금세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쓰인 책이다. 그런데 토론을 하면 할수록 심오한 내용이 튀어나왔다.
심지어 삶의 질곡을 겪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머리 복잡할 때는 휴식을 취하는 게 최고야, 누워.”
김필도는 좌식 테이블을 저만치 치웠다.
“도움이 많이 됐어요?”
하라미는 김필도 옆으로 누우며 물었다.
“하라미에게 읽어 달라고 한 게 백번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이러다 나도 익히게 생겼어요.”
“날 도와주다가 부수적으로 얻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야. 그건 그냥 받아들이면 돼.”
“그래도 괜찮아요?”
“괜찮다니까.”
베개 없이 자는 게 마뜩잖은 듯 김필도는 자꾸만 머리 위치를 바꿨다.
“팔 빌려 줘요?”
“남자가 팔베개를 해 주는 경우는 있어도, 여자가 해 주는 경우는 없어.”
“베개 없으면 못 잔다고 하지 않았어요.”
“내가 언제?”
“어젯밤에요.”
“그런 말까지 했어?”
“이름이 학사 사시미 김필도라고도 하던데요?”
“억!”
김필도는 질겁했다. 이성을 잃은 상태이긴 했지만 그런 말까지 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또, 또 다른 말은?”
김필도는 다그치듯 물었다.
“그게 전부예요. 그런데 원래 이름이 학사 사시미 김필도였어요?”
“한때 그렇게 부르기도 했어.”
“그게 무슨 뜻인데요?”
“학사는 머리에 먹물이 좀 들었다는 뜻이고.”
“먹물은 지식?”
“응.”
“사시미는요? 여기 팔요.”
하라미는 김필도의 머리를 살짝 들어 올리더니 제 왼팔을 목 아래로 끼워 넣었다.
“끙!”
김필도는 얼굴을 찌푸렸다.
“인상 그만 쓰고 사시미가 뭔지 말해 주세요.”
“건달들 중 작은 칼을 아주 잘 쓰는 녀석에게 붙여 주는 별명이야.”
“그럼 김필도는…… 고유명사?”
하라미는 김필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법서 맨 첫 장에서 보았던 글. 그게 정확하게 무얼 뜻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다. 그의 이름은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가 아니라 학사 사시미 김필도라는 것.
“응, 고유명사. 저기 하라미.”
“왜요?”
“또 어제처럼 그런 향이 나오는 건 아니겠지?”
“설마 그게 날이면 날마다 나오겠어요? 오늘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그리고 나 추워요.”
하라미는 김필도를 끌어당겼다.
“내가 난로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김필도는 불의 속성 마법 세딕을 펼쳤다. 그의 몸에서 따뜻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역시 당신은 멋진 남편이 될 자격이 충분해요. 당신 같은 사람과 결혼하는 여자는 진짜 행운아일 거예요.”
“하, 하라미!”
“왜 그러세요?”
“나, 날 기절시켜.”
“왜요?”
하라미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 빌어먹을 향기가 또…….”
김필도는 하라미의 가슴을 가린 천을 걷어내며 얼굴을 묻었다.
“사랑의 향이 자꾸만 나오는 걸 보면 내가 당신을 좋아하게 됐나 봐요.”
하라미는 빙그레 웃으며 김필도에게 몸을 맡겼다.
사실 몸에서 사랑의 향이 나오는 건 그녀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물론 김필도의 말처럼 그의 뒷목에 충격을 줘 기절을 시키면 일이 일어나지 않겠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이런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지만 그때까지만이라도 이성이 아닌 감정이 시키는 대로 하고 싶었다.
“난 다만 당신이 오늘 밤을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하라미는 김필도의 입술을 받아들이며 눈을 감았다.
처음 시작이 힘들지, 두 번째부터는 어렵지 않다는 옛말은 맞았다. 눈을 뜬 김필도는 이편을 빤히 바라보는 하라미에게 미소를 보내고 말았다.
“전혀 기억이 안 나요?”
“익숙해지고 있나 봐. 어제보다는 많은 부분이 기억 나.”
“다행이에요.”
“뭐가?”
“난 당신이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정말 그래?”
“네.”
“노력해 볼게. 그런데 왜 떨어진 거지?”
문득 그녀가 이곳으로 떨어진 이유를 한 번도 묻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헬만 일행의 공격을 받았어요.”
하라미는 그녀가 공격받았던 상황을 간단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니까 마족이 아니고 동료의 공격을 받았다는 거네?”
“네.”
하라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랬지?”
“난 이스마디온 가문의 유일한 상속자거든요. 아빠가 4천 살이 넘어서 얻은 딸이고요.”
“마족의 4천 살이면 인간으로 치면 60대 정도라고 봐야 하겠지?”
“그럴 거예요.”
“쉰둥이도 아니고 예순둥이네. 아빠 성격은 어때?”
“내가 1천 살 되던 해에 천족 사내들에게 성폭행을 당할 뻔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그 자리에 있던 다섯 명과 망을 보고 있던 다섯 놈이 전부 아빠께 맞아 죽었어요.”
“내가 아빠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걔들은 전부 키가 3미터였을걸요?”
“신분이 높은 녀석들이었다고?”
“부모들이 대부분 제2계급이었으니까요.”
“난리가 났겠네?”
“물론이죠. 천계가 발칵 뒤집혔고, 죽은 아이들의 부모는 복수하겠다며 병력까지 동원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병력을 동원한 집안이 초토화됐어요.”
“하라미 아빠가 그런 거야?”
“누가 그랬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어요.”
“하지만 대부분 하라미 아빠가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그것까진 모르겠지만. 그 일이 있고 난 후에, 아빠더러 아들을 살려내라고 한 부모는 없었어요.”
“그러니까 지금까지 말을 종합하면 하라미 아빠는 한번 화가 나면 물불 안 가리는 다혈질이란 말이네?”
“내가 실종됐다는 말을 들으면 이스마디온 전사단을 이끌고 당장 건너올 거예요.”
“그럼 전쟁에 반대하는 자들은 구심점을 잃게 되는 건가?”
“국방대신 일행이 노리는 게 바로 그걸 거예요”
“재미있네.”
김필도는 빙그레 웃었다.
“뭐가 재미있다는 거죠?”
“하라미 아빠가 휴도니아 대륙으로 넘어오면 마족 측에서는 어떻게 나올 거라고 생각해?”
“날 찾으러 왔다고는 생각하지 않겠죠.”
“맞아. 그들은 병력을 증강시킬 테고, 마족이 병력을 증강시키면 천계 또한 병력을 증강시킬 거야.”
“그럼 어떻게 되는 거죠?”
“휴도니아 대륙에서 다섯 종족이 전쟁을 벌이는 멋진 그림이 그려지는 거지.”
“국방대신이 제2의 신마전쟁을 원한다는 거예요?”
“내 생각은 그래.”
“그건 말이 안 돼요.”
“왜 말이 안 되는데?”
“국방대신은 지금도 최고 자리에 올라 있어요. 만일 전쟁에 패하면 그는 지금까지 쌓았던 모든 것을 잃게 돼요. 아니 비겨도 마찬가지예요.”
“승리하면 본전이고 패하거나 비기면 모든 것을 잃는 전쟁을 굳이 하려는 이유가 뭘까?”
“정말 국방대신이 전쟁을 원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전 같으면 아니라고 했을 거야.”
“그럼 지금은?”
“동굴 안쪽 기억나?”
“아반 족을 말하는 거예요?”
“응.”
“그들은 왜요?”
“죽어 있던 자들이 몇 명이나 됐지?”
“수천 명은 될 것 같았어요.”
“그럼 드반 족은 몇 명이나 됐을까?”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다 어디로 갔지?”
“설마…….”
하라미는 놀란 눈으로 김필도를 보았다.
“아무튼 나도 하라미를 보내 주지 못할 것 같아.”
김필도는 왼손의 검지와 중지로 하라미의 배를 간질이며 말했다.
“왜요?”
“나도 세이아칸 그놈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거든.”
어느새 김필도의 손가락은 하라미의 명치 근처에 도달해 있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거죠?”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김필도의 손길을 음미했다.
“확전 말이야. 그리고 하라미 아빠가 어떤 분인지 알고 싶기도 하고.”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데?”
“맞는 건 내가 제일 잘하는 것 중의 하나였어.”
김필도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