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176화 (176/225)

# 176

제1장 사시미

알 수 없는 장소에서의 생활은 단조로웠다.

낮이라고 생각되는 때는 검술을 익히고, 밤에는 마법을 익히며 토론하고, 때론 젊음을 불태웠다.

김필도와 하라미의 검술과 마법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특히 하라미 검술의 습득 속도는 김필도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가 몇 달에 걸쳐 익혀 낸 흘리는 기술을 하라미는 단 며칠 만에 완성해 버린 것이다.

물론 대검으로 펼치는 검술의 기초가 확실하게 잡혀 있고, 천족 검술 또한 상당한 경지에 오른 강자라 가능했겠지만, 그 차이는 질투가 날 정도였다.

“나는 당신이 더 놀라워요.”

놀란 건 하라미도 마찬가지였다.

김필도는 설명이 필요 없는 사람이었다. 이해보다는 본능으로 익혀 내는데, 이론적인 체계를 잡고 접근하는 이들보다 습득하는 속도가 더 빠르고 정확했다. 더불어 집중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남들은 몇 시간씩 걸리는 일들을 몇 분 만에 해내는 고도의 집중력을 보였다.

고도의 집중력과 검에 대한 천부적인 자질.

그 두 가지는 그를 한 단계 더 높은 경지로 끌어 올렸다.

“오늘이 마지막 밤인가?”

김필도는 좌식 테이블 위에 놓인 마법서를 바라보았다. 책의 두께는 처음 잡았을 때보다 훨씬 두꺼워져 있다. 수없이 넘겨본 탓에 종이가 부풀어 올라 그렇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몇 번을 읽었을까. 아마 수백 번은 넘었을 것이다. 각각의 구절을 놓고 하라미와 토론을 벌이고, 한 장을 놓고도 토론을 했다.

책에 있는 모든 것이 머릿속에 저장됐다. 지금부터는 세월이 해결해 줄 것이다. 길을 가다가, 밥을 먹다가, 혹은 싸움을 할 때, 문득문득 떠올라 양분처럼 몸에 흡수될 터였다. 차분하게 기다리면 궁극의 마법사는 언젠가 손 안으로 들어온다.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에요.”

하라미는 김필도의 몸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손이 워낙 커서 그런 듯 탄탄하고 넓은 김필도의 가슴이 작아 보였다.

“시작일 수도 있다고?”

“나는 그렇게 믿어요.”

하라미는 김필도 위로 올라갔다.

“난 맞아죽기 싫은데?”

김필도는 하라미의 허리를 잡으며 빙긋 웃었다.

“맞는 건 자신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하라미는 상체를 숙였다. 상체 또한 김필도보다 훨씬 커서 김필도의 얼굴에 닫는 건 하라미의 얼굴이 아니라 가슴이다.

김필도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자 요즘 들어 자주 맡았던 사랑의 향기가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온다. 하지만 지금은 전처럼 이성을 잃지 않는다. 다만 몸이 맹렬하게 반응하는 건 김필도도 어쩔 수 없었다.

김필도의 손이 저절로 하라미의 가슴을 찾았다.

“맞다가 잘못되면 허리를 다칠 수가 있어.”

김필도는 가까스로 손을 멈추며 말했다.

“그럼 아빠에게 허리는 절대 건들지 말라고 할게요.”

하지만 손을 멈춘다는 건 김필도의 생각뿐이었다. 하라미는 멈춰 선 김필도의 손을 잡아 자기 가슴으로 이끌었다.

“에이, 나도 모르겠다. 설마 죽이지는 않겠지.”

김필도는 손에 힘을 주었다.

“맞아요. 러브 서클에서 사랑의 향기를 뿜어낸 사낸 절대 죽이지 못해요. 왜냐면 그 사내는…….”

하라미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김필도가 그녀의 얼굴을 끌어내려 입을 맞춰버린 것이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순간이었다. 지금부터는 입이 아닌 몸으로 대화를 나눠야 할 때였다.

다음 날.

물건과 음식을 챙긴 김필도와 하라미는 폭포 앞에 섰다. 하라미의 목에는 드래곤 피시가 채워진 김필도의 바지가 목도리처럼 걸려 있었다.

바지 아래를 묶어 만든 자루였다.

“업혀.”

김필도는 하라미 앞으로 등을 내밀었다.

“이제 업는 게 익숙해졌죠.”

하라미는 방긋 웃으며 김필도 등에 업혔다.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짐은 그녀에게 넘어갔다. 그녀의 오른손에는 분해한 삼각대와 주전자를 비롯한 카판 내리는 도구들을 싼 천이 들려 있다. 그 천은 물건을 싸기 전까지 그녀의 가슴을 가리던 것이었다.

그리고 왼손으로는 좌식 테이블을 들었다.

“피난 가는 것 같아요.”

하라미는 제 모습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동료를 만나지 않기를 빌어.”

그는 왼손으로 하라미의 엉덩이를 받치고 오른손으로는 마법 지팡이를 들었다.

“속삭이는 바람! 창공을 나는 새가 된다! 플라이(Fly)!”

하라미를 업은 김필도의 몸이 천천히 떠올랐다.

처음 펼치는 마법이라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듯 속도도 느리고 비행 또한 불안했다.

“제대로 하고 있는 거예요?”

하라미는 김필도의 목을 두른 팔에 힘을 주었다.

“날아가는 거 안 보여?”

“이건 날아가는 게 아니라 기어가는 거 같은데요?”

“그건 하라미가 예뻐서 그래.”

“예쁜 거와 마법은 상관없잖아요.”

“마법은 정신 집중의 산물이라는 거 몰라?”

“너무 예쁜 여자를 업고 있어서 정신 집중이 잘 안 된다는 거예요?”

“응!”

“천천히 올라가도 괜찮아요.”

자고로 일부 특이한 성격을 가진 자들을 제외하고 예쁘다는 말과 미남이란 말을 싫어하는 여자와 남자는 없다. 하라미는 헤벌쭉 웃으며 김필도의 볼에 입을 맞췄다.

느리다고 해도 마법은 마법이었다. 1백50미터나 되는 곳을 아무런 보조 도구도 없이 날아올라온 것이었다.

아래쪽과는 달리 위쪽은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김필도와 하라미가 머물렀던 아래쪽은 구멍이 숭숭 뚫린 뚜껑을 덮은 거대한 항아리 모양이었다.

뚜껑에 뚫린 구멍은 여러 개의 동굴과 이어져 있었는데, 김필도는 위쪽 동굴이 무너지는 바람에 아래로 떨어졌고, 하라미는 동굴 끝에서 헬만 일행의 공격을 받아 아래로 추락한 경우였다.

감개가 무량한 듯 하라미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헬만 일행의 공격을 받아 떨어질 때만 해도 이젠 죽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가장 먼저 아빠의 얼굴이 떠올랐다. 딸의 시체조차 찾지 못하고 휴도니아 대륙을 헤매고 계실 아빠를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희망은 어디에도 없었다.

만일 저 아래쪽에 김필도가 없었다면……. 차디찬 물속에 가라앉아 죽었을 것이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저 아래쪽에서 마족의 검술과 드래곤의 마법을 익혔다. 그리고 작은 키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사내를 만났다.

하라미는 지금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꿈은 아니죠?”

그녀는 확인하듯 물었다.

“꿈같아?”

“아래로 떨어질 때만 해도 죽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살아났을 뿐 아니라 나처럼 멋진 사내도 만났다는 거네?”

“네.”

“그렇다고 하니까 오히려 미안한데?”

“사실인데요, 뭐.”

“그래도 키가 컸으면 더 좋았겠지?”

“나는 지금도 충분히 만족하니까 자학하지 마세요. 그리고 엄마 말이 키 크고 실속 없는 사내보다 키는 작더라도 강단 있는 사내가 훨씬 낫다고 했어요.”

“참, 엄마는 어떤 분이야?”

“1백 년에 돌아가셨어요.”

“괜한 걸 물었네. 미안해.”

“양친이 다 안 계신 사람도 있는데요, 뭐. 엄만 참 자상한 분이셨어요.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일러주셨거든요? 남자에 대하 것도 그 중 하나죠. 엄마 말씀이, 남자를 고를 땐 키는 고려 대상이 아니라고 했어요.”

“그럼 뭐가 중요한데?”

“사랑.”

“그거 말 되네.”

“나도 엄마 말에 동의해요.”

“그래도 난 많이 작지.”

“자학하지 말라니까 그러네. 이제 어디로 가죠?”

“저기로.”

김필도는 멀리 검은 입구를 드러내고 있는 동굴을 가리켰다.

“이제 내릴게요.”

“그대로 있어.”

김필도는 하라미의 허벅지를 꽉 틀어쥐어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날 업는 게 좋아요?”

“그럴 리가 없다는 건 네가 더 잘 알잖아.”

“그럼 내 엉덩이를 만지는 게 좋은 건가? 아니면 맨살의 촉감을 즐기고 있거나.”

“꿈도 야무지네.”

“그러니까 굳이 날 업고 가려는 이유를 말해달라고요!”

하라미는 빽 소리쳤다.

“신발이 없잖아.”

“신발이라고요?”

하라미는 김필도 다리 앞으로 튀어나와 있는 자기 발을 보았다. 그의 말처럼 그녀의 발에는 신발이 신겨져 있지 않았다. 물속으로 떨어졌을 때 얼어서 얼음 조각으로 부서져 버린 것이었다.

김필도가 신발을 벗어주었지만 너무 작아 신을 수가 없었다. 신발이 크다면 실로 묶어 벗겨지지 않게 고정시키겠지만 작은 경우에는 방법이 없다.

그렇게 맨발인 상태로 검술을 연마한다며 격렬하게 움직인 탓에 발은 온통 멍투성이, 피투성이다.

“힐링 마법을 배워보려고 했는데 그건 안 되더라.”

“고마워요.”

하라미는 김필도의 목을 가만히 끌어안았다.

말은 무뚝뚝하게 해도 그는 마음이 깊은 사람이었다.

마법서만 해도 그렇다.

만일 다른 사람, 아니 다른 천족 같았으면 숨기기에 급급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마법서를 읽어달라는 핑계를 달아 마법을 익힐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면서 마법서를 읽어줘서 고맙다고 말한다.

목숨을 구해주고, 실버 드래곤이 남긴 맹약의 구슬을 주고, 궁극의 마법사가 남긴 마법을 주었다.

반면에 그가 얻은 거라고는 빛의 검술 한 가지.

백을 받았는데 하나밖에 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 상황에서는 내가 아닌 누구라도 그랬을 거야. 그러니까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둘은 곧 동굴로 들어갔다. 이곳은 아직 개발 전인 듯 마법등이 밝혀져 있지 않았다. 김필도는 지팡이 끝에 횃불을 만들어 앞을 비추며 걸었다.

동굴은 상당히 길었다. 한 시간 이상을 걸었음에도 끝은 고사하고 누군가 지나간 흔적조차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마나 속박 마법은 여전히 유효했다.

“이곳에 펼쳐진 마나 속박 마법은 드반 족, 그러니까 드래고닉이 펼쳐 놓은 것 같지 않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마나 속박 마법의 매개체는 땅이거든요. 즉 땅에 발을 대고 걷는 종족은 마나 속박 마법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날아다니는 종족은 구애를 받지 않으니까요.”

“드래곤은 날아다니는 종족이니까 마나 속박 마법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거네?”

“반면에 아반 족은 바닥에 발을 대고 사는 자들이니까 마나 속박 마법에 영향을 받았겠죠.”

“뒤통수치고 배신하는 자들은 늘 절친한 친구나 부하라고 하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형제처럼 살았던 드반 족이 아반 족을 배신한 걸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건 잘못된 말이에요.”

“뭐가?”

“친구가 배신을 하는 게 아니라, 친구나 부하가 아니면 배신자라는 말을 쓸 수가 없는 거예요.”

“모르는 사람은 날 배신할 수가 없다는 말?”

“그렇잖아요. 전혀 모르는 사람이 배신을 하거나, 욕을 한다는 건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요.”

“그러니까 배신자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믿음이나 의리를 저버린 가족이나 절친한 친구 또는 부하라고 해야겠네.”

“그래요.”

“그거 말 된다. 그보다 드반 족이 펼쳐 놓은 거라면 마나 속박 마법은 영구 마법이라는 거지?”

“그런 것 같아요.”

“영구 마법을 없애는 방법이 뭐지?”

“영구 마법은 마법이 지속될 수 있게 해 주는 매개체가 있어야 해요.”

“그 매개체는 마법진이나 디바인 마크고.”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것보다 더 찾아내기 힘들 거예요.”

“굳이 없애고 싶은 생각도 없는데 뭐.”

구불구불 이어진 동굴은 길었다. 느낌상 하루 종일 걸은 것 같은데도 여전히 끝은 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잠잘 곳을 찾아봐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겠어.”

김필도는 걸으면서 장소를 물색했다.

거의 알몸이나 다름없는 두 사람은 동굴 벽을 타고 들어오는 서늘한 바람도 조심해야 했다.

“저기가 좋겠다.”

김필도는 오른편을 가리켰다.

“풀이에요!”

김필도가 가리킨 곳을 보던 하라미가 기쁨에 찬 소리를 내질렀다. 처음 들어올 때부터 시작하여 며칠 동안 동굴을 헤매고 다녔지만 풀은 처음이었다.

“계속 갈까?”

풀이 있다는 건 가까이 숲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숲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동굴에서 풀을 본 건 처음이잖아.”

“그렇긴 한데. 좋아요, 가요.”

하라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필도는 다시 힘을 내 걸음을 옮겼다.

앞만 보고 걷기를 두어 시간. 갑자기 둘의 시야 속으로 붉은 광채가 확 끼쳐들었다.

“드디어 밖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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