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177화 (177/225)

# 177

김필도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붉은빛의 정체는 다름 아닌 레드 문의 달빛이었다. 놀랍게도 동굴의 끝은 감옥이 아니라 숲과 이어져 있었다.

김필도는 숲으로 발을 내밀었다.

“막을 뚫고 나온 것 같아요.”

하라미는 고개를 돌려 동굴 입구를 바라보았다.

아주 잠깐에 불과했지만 투명한 막을 뚫고 나온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덩달아 온몸을 강하게 속박하고 있던 뭔가가 사라진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슬쩍 마나를 끌어 올려보았다.

스아악!

아랫배 부근으로부터 일어난 마나가 전신으로 퍼져 나가며 힘이 돌아왔다.

“흐흡!”

하라미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숲이 지닌 특이한 향을 머금은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어왔다.

“정말 밖이네요.”

하라미는 활짝 웃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밤의 향기를 만끽했다.

“라파 밖일까?”

김필도는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그건 알 수 없지만 동굴을 벗어난 것만은 확실해요.”

“먼저 쉴 곳을 찾아야겠지?”

“먼저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고 싶어요.”

“오늘은 가능할 거야.”

김필도는 빙긋 웃으며 제6감각을 개방했다. 잠시 후 귓전에 물소리가 잡혀들었다.

“오른쪽이에요.”

하라미도 제6감각을 개방한 듯 김필도가 가려는 방향을 가리켰다. 김필도는 오른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십여 분가량 걷자 둘 앞에 아담한 계곡이 나타났다.

물소리가 들려온 곳은 계곡 안쪽이었다. 김필도는 무성하게 자란 풀을 헤치고 계곡 안으로 들어갔다.

2백 미터 정도 걸어갔을 때 목적지가 나타났다. 폭이 5미터쯤 되는 작은 호수였다.

호수 주변으로는 나무가 듬성듬성 자라 있었다.

“괜찮지?”

김필도는 하라미를 내려주었다.

“아주 좋은 곳이네요.”

바닥으로 내려선 하라미는 호수 옆으로 가서는 아공간을 열었다. 그 안에서 신발과 입욕제 그리고 특별한 날에만 입으려고 아껴두었던 속옷 등을 꺼내 놓았다.

“물 데워줄까?”

“그래주면 좋죠.”

하라미는 김필도를 돌아보며 방긋 웃었다.

“세상을 태우는 불꽃! 내 의지에 답하라! 파이어 볼!”

김필도의 입에서 나직한 외침이 흘러나오고 마법 지팡이 끝에서 쏘아져 간 마나가 농구공 크기의 불덩어리로 변했다. 불덩어리는 빠르게 호수로 날아가더니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대단하네.”

하라미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일반적으로 마법으로 펼친 불덩어리는 물속으로 들어가면 바로 꺼져버린다. 불과 물은 상극이고, 물이 불을 제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필도가 쏘아 낸 불덩어리는 물속에서도 그대로 살아 있다. 물속에서 불길을 토해내는 불덩어리의 모습은 수평선에서 떠오르는 태양보다 더 아름다웠다.

“온도 맞춰 봐.”

“알았어요.”

하라미는 발끝을 물에 담가 보았다.

어느새 온도가 올라간 모양이었다. 물은 목욕하기에 알맞을 정도로 따뜻했다.

“됐어요.”

하라미가 고개를 끄덕이자 김필도는 파이어 볼을 수면 위로 들어 올렸다.

“난 쉴 곳을 만들고 저녁 준비할게.”

“저거 저대로 둬도 괜찮아요?”

하라미는 호수 가장자리에서 대기를 데우고 있는 불덩어리를 가리켰다.

“대기가 차잖아.”

“그 말이 아니라 당신 몸에 무리가 가지 않냐고요.”

“괜찮은데, 무리가 가야 하는 거야? 오픈(Open)!”

김필도는 아공간을 열며 물었다.

“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파이어 볼 마법을 펼치는 와중에 아공간을 연다는 건 마음을 둘로 분리했다는 뜻이고, 마나 또한 충분하다는 말이 된다. 몸에 무리가 가지 않으냐는 건 괜한 질문이었다.

하라미는 호수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자 온몸의 근육이 나른하게 풀렸다. 잠시 그 상태로 앉아 따뜻한 물이 주는 선물을 즐겼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목욕을 시작했다.

머리를 감고 비누 거품을 잔뜩 내어 정성껏 온몸을 씻었다.

그녀가 목욕을 하는 사이에 김필도는 일을 시작했다.

먼저 감옥 지하에서 잡아온 드래곤 피시를 물에 씻어 아공간 안에 집어넣고, 천막을 설치했다.

다행히 천막은 키가 3미터인 하라미가 생활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컸다.

천막 설치가 끝나자 밖으로 나와 불을 피워 저녁 준비를 했다. 음식은 돼지고기 수육과 김치, 채소 샐러드 그리고 밥이었다.

마법은 참으로 편했다. 잡다한 것은 마법을 이용해서 정리하자 시간이 절반으로 단축됐다.

마지막으로 술 한 병을 세팅하는 걸로 저녁 준비는 끝났다.

그리고 물의 속성이 마법으로 걸려 있는 잊힌 전설의 신검인 쿠라(Kura)를 꺼내 한편에 놓았다.

“이게 다 뭐예요?”

준비된 식사를 바라보던 하라미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좌식 테이블 위와 옆이 음식으로 가득 들어차 있는 것이었다.

“나는 하라미가 더 놀라운데?”

김필도는 하라미는 바라보았다. 그녀가 걸친 옷은 가슴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깊게 파였고, 엉덩이 아래쪽이 보일락 말락 하는 초미니 민소매 원피스였다.

“1천 살 생일 때 엄마가 준 선물이에요.”

하라미는 김필도 건너편에 다소곳이 앉았다.

“그땐 키가 작았나 보지?”

“네.”

“어쩐지. 정상적인 엄마라면 그런 옷을 선물할 리가 없지.”

“처음 입는 거예요.”

마음에 드는 사내가 생기면 입고 만나라며 속옷과 함께 사준 옷이다. 이렇게 야한 옷을 어떻게 입느냐며 깔깔댔었는데 정말로 기회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키가 50센티미터가 커진 이제야 입게 된 것이다.

아마도 거의 알몸에 가까운 상태로 그와 생활하지 않았더라면 입을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산뜻하고 청순하고, 활기가 넘쳐. 그리고 점점 더 예뻐지는 것 같아.”

“정말?”

“그렇다니까.”

김필도는 하라미 앞에 놓은 술잔에 술을 따라주고는 잔을 들었다.

“고마워요. 그리고 엄마가 그랬는데 사랑의 향기를 뿜어내면 미인이 된다고 했어요.”

하라미는 활짝 웃었다.

“그 말은 맞는 것 같아.”

“그런데 이건 뭐죠?”

하라미는 김치를 가리켰다.

“김치. 좀 맵긴 하지만 이 녀석, 이 녀석하고는 죽이는 궁합이야.”

김필도는 돼지고기 수육과 쌀밥을 가리켰다.

“세 가지를 함께 먹어야 하는 거예요?”

“아냐, 김치로 고기를 싸서 먹으면 돼.”

김필도는 수육 한 점을 김치에 싸 내밀었다.

하라미는 그걸 얼른 받아먹었다. 입안을 얼얼하게 만드는 매운 맛에 잠시 멈칫했던 그녀는 천천히 입을 오물거렸다. 곧 김치의 매운 맛과 돼지고기의 육즙이 섞이면서 감칠맛이 느껴졌다.

“와! 괜찮은데요?”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이것도 먹어 봐.”

이번에는 밥을 떠서 그녀의 입에 넣어 주었다.

“죽여줘요.”

김치 수육과 밥이 입에 맞는 듯 하라미는 엄지손가락을 세워 올렸다.

김필도와 하라미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아주 오랜만에 정찬을 즐겼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요. 당신은 씻어요.”

식사가 끝나자 하라미는 식기를 챙겨들었다.

“그래 줄 거야?”

“밥값은 해야죠.”

하라미는 개울가로 가 쪼그려 앉아 그릇을 씻었다. 그녀가 설거지를 하는 사이에 김필도는 걸치고 있던 옷을 벗고 호수로 들어갔다.

“거기 비누 있으니까 그거 쓰면 돼요.”

“알았어.”

김필도는 빠르게 목욕을 했다. 몸을 씻고, 아공간을 열어 옷을 꺼내 갈아입었다. 그런 다음 불 가로 향했다.

설거지를 마친 하라미는 그릇을 엎어 놓고, 혼자 술잔을 빙빙 돌려가며 홀짝이고 있었다.

“이 술 진짜예요?”

김필도가 앉자 하라미가 물었다.

“진짜 신의 눈물이냐고?”

“네.”

“스승님이 리모스에서 얻었다고 했으니까 맞을걸?”

“그럼 엄청나게 귀한 술이잖아요.”

“그래서 귀한 사람하고 마시는 거잖아.”

“그런 거예요?”

하라미의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맺혔다.

“감격한 눈치네?”

김필도는 하라미를 빤히 바라보았다.

“당신을 만나게 해 준 신께 감사하고 있어요.”

“기분 좋은 것 같은데 찬물을 끼얹은 거 아닌가 몰라.”

김필도는 조금 전에 꺼내 놓았던 검 손잡이 쿠라를 하라미에게 내밀었다.

“이건 뭐죠?”

“유드카가 남긴 맹약의 구슬과 한 세트야.”

“유드카가 남긴 검이라고요?”

“그건 아냐.”

“그럼?”

“잊힌 전설의 신검 쿠라.”

“네?”

하라미는 깜짝 놀랐다.

“제대로 된 사내는 여자에게 검 같을 걸 선물로 주는 게 아니라고 했는데…… 미안해.”

“저, 정말 잊힌 전설의 신검이에요?”

하라미는 믿어지지 않는 얼굴로 김필도를 보았다.

여자이긴 하지만 그녀는 검사다. 그리고 검사인 이상 잊힌 전설의 신검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드카가 남긴 맹약의 구슬을 완전하게 녹였으니까 이 녀석하고 잘 어울릴 것 같아. 그리고 앞으로는 헬만 같은 놈에게 당하는 일이 없었으면 해서.”

“루, 루시안!”

“검을 받으면서 감격한 얼굴을 하면 내가 미안하잖아. 다음엔 이런 무식한 거 말고 더 멋진 걸로 줄게.”

“고마운 걸 어떻게 하라고요.”

하라미의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부모님을 제외하고 누군가로부터 이렇듯 큰 선물을 받아본 게 처음이었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물건은 아니라고 하지만 검이 검사에게는 최상의 선물인 것이다.

“끼워 봐.”

“알았어요.”

하라미는 검을 꺼냈다. 그러고는 손잡이를 분리해내고는 쿠라를 끼웠다.

딸깍!

웅웅웅! 웅웅웅웅!

쿠라가 끼워지는 순간, 황금색 검 표면으로 서늘한 기운이 타고 올라갔다. 그리고 나직한 검명이 흘러나왔다.

하라미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검명을 듣는 순간, 차가운 섬광 하나가 머릿속으로 스며 들어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웅웅웅! 웅웅웅!

“그래, 그동안 많이 외로웠지. 이젠 내가 있으니까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거야.”

그녀는 쿠라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한동안 검을 쓰다듬던 그녀는 천천히 마나를 주입했다.

쩌엉!

검 포면에 은색을 띤 서리가 끼고, 검 주위 대기에 내포돼 있던 습기가 얼음 덩어리로 변해 바닥으로 떨어졌다.

휙!

하라미는 오른편을 향해 검을 쭉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의 검면에서 금색과 은색이 뒤섞인 광채가 솟구쳐 나왔다.

퍽!

그녀로부터 20미터 떨어진 나무에서 나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쩌엉!

후드득! 툭툭! 후드득!

“헐!”

김필도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단지 검을 내뻗었을 뿐이다. 그런데 키가 50미터도 넘는 거대한 나무가 얼음 조각으로 부서져 내린 것이었다.

엄청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놀란 사람은 비단 김필도뿐만이 아니었다. 검술을 펼친 하라미 또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빛의 검술의 한 종류를 펼쳤을 뿐이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엄청난 결과가 나온 것이었다.

그녀는 김필도를 바라보았다.

“전혀 생각 못했던 거야?”

김필도는 물었다.

“네.”

“유드카의 힘과 쿠라가 합쳐지면서 더 강력해진 모양이네.”

“그렇다고 해도 이건…….”

하라미는 여전히 믿어지지 않은 듯한 얼굴이었다.

엉겁결에 나온 거라 아직은 많은 보완이 필요하겠지만 제대로 다듬기만 한다면 최강의 비기가 될 것 같았다.

“강해지면 좋은 거잖아.”

“이 녀석 이름을 사시미라고 지을래요.”

하라미는 검을 수직으로 세우며 말했다.

“사시미?”

“이름이 없었거든요.”

“사시미는 좋은 말 아닌데. 그리고 우리말도…….”

김필도는 말끝을 흐렸다. 이곳에서 일본 말이니 한국말이니 하면서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마음에 안 들어요?”

“아냐, 괜찮아. 사시미도 어차피 칼인데 뭐.”

김필도는 싱긋 웃었다.

“그럼 사시미로 할게요. 추운데 들어가서 마실래요?”

“그럴까?”

둘은 술잔과 술병을 챙겨들고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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