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
천막 안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김필도는 빛을 만드는 마법을 펼쳐 천막 안을 밝혔다.
그는 마법을 빨리 익히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할 뿐이었다.
둘은 바닥에 앉아 주거니 받거니 술병을 비웠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바닥난 술병을 치우고 나란히 누웠을 때 김필도가 물었다.
“아빠를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요?”
“휴도니아 대륙으로 왔으면 좋겠다고 했지, 보고 싶다고 하진 않았어.”
“아무튼 아빠를 이곳으로 오게 하려면 난 대천신군으로 돌아가면 안 돼요. 그리고 휴도니아 대륙엔 친척도 없고 친구도 없어요. 아는 사람이라고는 당신뿐이에요.”
하라미는 김필도를 자기 몸 위로 잡아끌었다.
“그럼 나와 함께 움직여야겠네?”
“그렇게 할 생각 아니었어요?”
“그건 내 생각일 뿐 하라미 의견도 들어봐야 하잖아.”
“내 의견은 묻지 않아도 돼요.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해요.”
하라미는 김필도의 얼굴을 러브 서클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러브 서클은 짙은 향을 뿜어내고 있었다.
김필도는 고개를 들어 하라미를 보았다.
“저절로 흘러나오는 거예요.”
“아무에게나?”
“그건 아니고 진정한 짝을 만났을 때만.”
하라미의 목소리가 모기소리처럼 작아졌다.
“그런 거였구나.”
김필도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러브 서클에서 흘러나오는 향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열정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김필도와 하라미가 눈을 뜬 건 다음날 아침이었다.
“사랑의 향기는 언제까지 나오는 거지?”
“왜요?”
“멈추지 않고 계속 나왔으면 해서.”
“마음에 드나 봐요?”
“천연 비아그라잖아.”
“비아그라?”
“남자에게 힘을 주는 향기라고.”
“남자뿐만이 아니에요.”
“그럼 여자에게도 영향을 미쳐?”
“그땐 당신의 키가 3미터로 변해요.”
“진짜?”
“네.”
“그거 아주 좋은 약이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라미는 양손으로 김필도의 얼굴을 감쌌다.
“아침이야, 하라미.”
“하지만 우리 둘뿐이에요.”
“아아악!”
어디선가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우리 둘만 있는 게 아닌 것 같은데?”
“둘뿐라니까요!”
하라미는 김필도의 머리를 억세게 잡아당겼다. 또다시 젊음의 열풍이 천막 안에 몰아쳤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하라미는 거칠고 대담했다. 마치 마지막인 것처럼 온몸을 불살랐다.
그녀가 얼마나 열정적이었는지, 김필도는 맨 처음 사랑의 향기에 취했을 때처럼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열풍은 거의 2시간가량 이어졌다.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나고 둘은 아침을 먹고 천막을 정리한 후 자리를 옮겼다.
“내가 업고 가요?”
하라미는 타박타박 따라오는 김필도를 돌아보며 물었다.
“싸움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거칠게 다뤄도 되는 거야?”
“당신이 싸움을 해야 하니까 그런 거였어요.”
“그건 무슨 소리래?”
“우리 천족에서 내려온 말이 있는데 들어볼래요?”
“어떤 말인데?”
“‘평범한 아내는 전쟁터로 떠나는 남편에게 따뜻한 밥을 주고, 현명한 아내는 불꽃같은 밤을 선물한다.’라는 말이 있어요.”
“너무 원초적인 말 아닌가?”
“하지만 그 원초적인 게 남편을 살아서 돌아오게 만든다고 해요.”
“그래서 내게도 그런 거였어?”
“당신도 전쟁을 해야 하잖아요.”
“전쟁을 해야 할지, 하지 않아도 될지는 아직…….”
“크악!”
처절한 비명이 김필도의 말을 잘랐다.
“아무래도 하라미는 현명한 부인 자격이 있는 것 같아.”
김필도는 마법 지팡이를 하라미에게 건넸다.
“무슨 말이죠?”
“전쟁을 해야 한다는 거지 뭐.”
김필도는 숲으로 시선을 던졌다. 2백여 미터 전방에서 황금색 전투기갑을 걸친 자들이 이편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천족이었다.
“인비지빌리티 마법 펼칠 수 있겠지?”
김필도는 오른손을 심장에 대고 헤를리온을 소환했다.
곧 그는 전투기갑을 걸친 모습으로 변했다.
“은밀함! 그 조용한 움직임! 인비지빌리티!”
이어 하라미의 나직한 외침이 들려오고 그녀의 동체가 허공으로 녹아들어 갔다.
“무기는 어떤 걸 쓸 거죠?”
“이것과.”
김필도는 쥐고 있는 헬칸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거!”
이번엔 왼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1미터50센티미터가량 되는 특이한 무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앞은 뾰족하고 뒤로 갈수록 두꺼워지는 송곳 형태였다. 송곳의 표면에는 손가락 두께의 가시 수백 개가 박혀 있었다.
그런데 그 무기는 김필도 팔과 분리돼 있지 않고 붙어 있었다.
“그, 그게 뭐죠?”
하라미는 깜짝 놀라 물었다.
일체형으로 된 검에서, 엄청난 힘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 힘이 얼마나 강한지 맹약의 구슬을 복용한 그녀가 식은땀을 흘릴 정도였다.
“마훼.”
김필도는 빙그레 웃으며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제2장 선택
스아악! 휘이익!
천족들은 가공할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치워라!”
천족들 사이에서 차가운 외침이 흘러나왔다. 부하들을 향해 명령을 내린 자는 천족의 지휘관 헬만이었다.
헬만의 눈동자는 거의 1자에 가까울 정도로 가늘어져 있었다. 극도로 분노했다는 방증이다.
그가 이토록 화를 내는 건 많은 부하를 잃어서가 결코 아니었다. 비록 부하 절반을 잃었지만 작전을 펼치다 보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상대는 마족이었다.
게다가 하라미를 없애는 임무를 완수했으니까 천좌 세이아칸도 충분히 납득할 수준의 희생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동굴을 벗어나 이곳 숲에서 일어났다.
마나 속박 마법도 풀려 전투기갑도 소환이 가능한 상황이 됐는데도 50명이나 희생됐다. 부하들을 살해한 자들이 숨어 있는 곳은 땅속이었다.
놈들은 땅속을 자유롭게 오가며 어쌔신처럼 천족을 공격해 온 것이었다. 잠을 자는 도중이나, 식사할 때, 휴식을 취할 때 또는 볼일을 보는 도중에 공격해 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천족은 잠을 잘 수도, 편하게 쉴 수도 없었다. 끊임없이 땅속과 주위를 살피며 적의 공격에 대비해야 했다. 땅속에서 느닷없이 공격을 해 오기 때문에 누가 누구를 지켜줄 수 있는 그런 상황도 아니었다.
자기의 목숨은 스스로 책임져야 했다.
사소한 일에도 짜증이 날 만큼 극도로 예민해져 있는데 멀리 김필도가 보이자 적인지 아군인지 확인하지도 않고 없애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크아악!”
처절한 비명이 들려오자 헬만은 비로소 빙긋 미소를 지었다. 부하가 아닌 인간의 비명을 듣자 마음이 약간 풀린 것이었다.
척! 척척! 척척!
“응?”
헬만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앞서가던 부하들이 그 자리에 우뚝우뚝 멈춰 섰기 때문이었다.
츄악!
바로 그때 앞에서 액체가 뿜어져 나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헬만은 시선을 들었다.
황금빛 광채를 뿌리는 물체 하나가 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그 물체가 부하의 머리라는 걸 알아차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윽고 황금빛 광채가 급격하게 사그라지며 본래 얼굴이 나타났다.
전투기갑을 착용한 상태에서 목이 잘리면 잠시 동안 투구를 쓴 상태를 유지하다가 본래 얼굴로 돌아가게 된다. 지금 허공으로 떠오른 머리처럼.
툭!
동료의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천족들은 일제히 김필도를 포위했다.
“인간입니다, 10군.”
천족 중 한 명이 헬만에게 보고했다.
“죽이지 마라!”
헬만은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죽이지 말라고 한 이유는 김필도 또한 땅속에서 공격해 온 자들과 한패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부하들 사이를 지나 선두로 나갔다.
“아무래도 우린 인연인가 봐.”
헬만을 발견한 김필도는 히죽 웃었다. 하지만 투구를 쓴 상태라 그의 미소는 보이지 않았다.
“인연?”
헬만은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인연도 아닌데 네 번씩이나 만날 리가 없잖아, 누렁이.”
“네놈은?”
헬만의 몸에서 지독한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를 향해 누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인간은 김필도밖에 없었다.
갑자기 잘려나간 왼팔이 씀벅씀벅 아파 왔다.
“맞아, 난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야.”
“죽일 놈!”
공격 명령을 내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헬만은 참았다. 김필도를 없애는 것보다 이 숲에 대한 비밀을 아는 게 더 급했다. 그걸 알고 나서 죽여도 늦지 않을 것이다.
“땅속에 숨어 있는 벌레들에 대해 말하면 편하게 죽여주겠다.”
“땅속에 숨어 있는 벌레?”
김필도는 헬만을 비롯한 천족들을 살폈다.
전투기갑을 착용하고 있어 어떤 상태인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전투기갑 주위에 흐르는 마나를 파악하면 어떤 심리상태인지 대충은 짐작이 가능하다.
천족의 몸 주위에 형성돼 있는 마나 역장은 상당히 불안했다. 그건 곧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 이유가 바로 헬만이 말한 ‘땅속에 숨어 있는 벌레’ 때문인 듯했다. 헬만은 인간을 벌레라고 부르니까 다시 말하면 땅속에 숨어 있는 인간이 된다.
“모른다고 할 테냐?”
“공격을 당한 모양이지?”
김필도는 슬쩍 떠보았다.
숲에 대한 정보는 그도 알고 싶은 사항 중의 하나였다.
“고통스럽게 죽고 싶은 모양인데 소원을 들어주마. 페르토!”
헬만은 그의 심복 페르토를 불렀다.
“하명하십시오, 10군.”
페르토는 헬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죽음의 도끼질을 시작하라!”
“알겠습니다, 10군.”
‘나쁜 자식!’
허공에 숨어 상황을 지켜보던 하라미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죽음의 도끼질은 조직의 존립을 위태롭게 한 배신자를 처벌하는 방법 중 가장 지독한 형벌이다.
먼저 배신자를 둥글게 에워싼 다음 번호를 외치면서 순서대로 공격을 하게 되는데, 공격은 배신자가 치명적인 부상을 당할 때까지 쉬지 않고 이어진다.
그때 사용하는 검술은 단순하다.
위에서 내리찍는 모습이 도끼질과 비슷하다고 하여 도끼질 검술이라고 부르고, 그 도끼질 검술을 바탕으로 펼치는 처형식을 ‘죽음의 도끼질’이라고 한다.
마계의 처형식처럼 한 사람을 두고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수백 명이 연이어 공격을 하기 때문에 방어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게다가 검사가 지닌 모든 힘을 한 번에 쏟아내는 일격필살의 검술이라 할 수 있다.
처형식과 죽음의 도끼질의 차이라면 전자는 일렬로 늘어선 채 공격을 하고, 후자인 죽음의 도끼질은 둥글게 에워싼 채로 공격을 한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공통점은 공격을 받는 자는 절대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라미는 어깨에 둘러메고 있던 검을 빼 들었다.
바로 그때 김필도가 손을 젓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김필도를 가만히 보았다.
‘기다려!’
김필도는 하라미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나서지 말라는 신호였다.
‘하지만!’
하라미는 굳은 얼굴로 김필도를 보았다.
‘도움이 필요하면 그때 말할게. 날 믿어.’
“준비하라!”
휙! 휙휙!
페르토의 명령이 떨어지자 천족이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그들이 물러난 거리는 10미터였다. 이로써 김필도와의 거리는 20미터로 벌어졌다.
“지금부터 죽음의 도끼질을 시작한다!”
페르토의 명령이 떨어지자 천족들은 일제히 검을 가슴 앞에 세웠다.
웅! 웅웅! 웅웅!
마나를 주입하자 천족의 검들은 낮게 검명을 토해냈다.
“시작하라!”
“차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