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
‘시작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김필도 정면에 있던 천족 한 명이 그를 향해 쏘아져 갔다.
파앗! 파앗! 파앗!
그리고 그 천족이 5미터가량 나아갔을 때 김필도 뒤편에 있던 자가 몸을 날렸고, 그자가 다시 5미터를 나아갔을 때 김필도 오른편에서 세 번째 사내가 바닥을 차며 몸을 날렸다.
“하나!”
가장 먼저 출발했던 천족 사내가 달려오면서 들어 올렸던 검을 힘차게 내리찍었다. 그리고 사내가 공격을 시작한 순간 네 번째 천족이 바닥을 찼다.
김필도는 왼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지잉!
그러자 나직한 소성과 함께 정령의 방패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방패의 모습이 전과 달랐다. 전에는 위쪽과 아래쪽에서 창 형태의 날카로운 무기가 달려 있었는데 이번에는 좌우측에도 솟아나 있었다. 즉 정령의 방패는 네 방향에 창 형태의 무기가 돋아난 특이한 형태가 된 것이다.
콰앙!
방패가 자리를 잡는 순간 둔탁한 소성이 터져 나왔다.
푹!
김필도의 오른발이 10센티미터가량 땅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그리고 공격을 마친 천족 사내는 방패와 부딪친 반발력을 이용해서 튕겨져 나갔다.
‘끙!’
김필도의 얼굴이 슬쩍 일그러졌다.
그의 최대 강점인 흘리는 기술을 사용하기도 전에 천족 사내가 물러나 버린 탓이었다.
흘리는 기술은 상대가 적극적으로 공격을 해 주었을 때 최고의 효과를 발휘한다. 즉 공격자가 마음속으로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때 써먹을 수 있다는 뜻이다.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검사는 어떻게든 상대의 중심을 흐트러뜨리려고 한다. 그때 가장 좋은 방법이 자신의 검으로 상대의 검을 밀어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밀어치는 시간은 길지 않다. 다음 공격을 위해서는 검을 원래 위치로 가져와야 하기 때문이다.
아주 짧은 순간에 상대의 검을 밀고 다시 원래 위치로 가져가기 위해서는 정말로 미는 게 아니라 민다는 느낌으로 검을 휘둘러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김필도의 흘리는 기술은 그 민다는 느낌으로 검을 휘두르는 짧은 순간을 잡아내서 펼친다.
그런데 지금 천족이 휘두르는 검은 달랐다.
천족은 민다는 느낌이 아니라 물러날 생각을 하면서 검을 휘두르고 있다.
흘리는 기술이 먹힐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두울!”
첫 번째 사내가 물러가자마자 뒤편에서 차가운 외침이 들려왔다. 두 번째로 출발했던 천족 사내가 검을 들어 올린 채 공격을 해오고 있었다.
김필도는 헬칸을 들어 올렸다.
“차앗!”
우렁찬 외침과 함께 천족의 검이 떨어졌다.
차앙!
검과 검이 부딪치면서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세엣!”
천족 사내가 물러가는 순간 왼편에서 차가운 외침이 들려왔다. 김필도는 몸을 돌리면서 왼팔을 들어 올렸다.
차앙!
“네엣!”
세 번째 천족 사내가 물러서자마자 네 번째 사내의 검이 김필도의 머리로 떨어졌다.
김필도는 헬칸을 들어 올렸다.
카앙!
이번 역시 그의 오른발은 땅속으로 10센티미터가량 파고들어 갔다.
“다섯!”
천족의 공격은 숨 쉴 틈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5미터 거리를 두고 쉬지 않고 몸을 날렸다. 김필도는 그 자리에서 빙빙 돌며 천족의 검을 막았다.
“더 악랄하군.”
김필도는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마족의 처형식과 비교했을 때 그렇다는 말이다. 마족의 처형식은 오직 정면에서만 달려간다. 그런데 천족의 처형식은 사방에서 달려들어 당하는 자의 혼을 빼놓는다.
더 비열하고 잔인한 방법이었다.
“고난은…….”
김필도는 그 자리에서 빙빙 돌며 천족의 공격을 방어했다. 그러면서 천족의 허점을 찾았다.
고난은 힘겨운 삶이 아니라 김필도를 단련시키는 과정의 하나일 뿐이었다.
“아무리 힘든 일이라고 해도 익숙해지면 그때부터는 요령이 생기고, 요령은 곧 여유가 되는 거야.”
“일흔둘!”
차앙!
“일흔셋!”
차앙!
“일흔넷!”
차앙!
김필도가 서 있는 자리에 지름이 1미터가량 되는 구덩이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의 두 발이 만들어 낸 구덩이였다. 오른팔과 왼팔이 저릿저릿하고,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김필도의 얼굴은 처음 그대로였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천족을 살폈다.
“아흔아홉!”
차가운 외침이 왼편에서 들려왔다.
김필도는 반사적으로 왼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차앙!
“백!”
그리고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헬칸을 들어 올렸다.
차앙!
“음!”
김필도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처음으로 흘러나온 신음이었다.
“놈이 지쳤다. 더욱 거칠게 몰아라!”
김필도가 흘린 신음을 들은 듯 헬만은 부하들에게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자 천족들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천족들은 더 강하고 거칠게 몸을 날렸다.
차앙! 차앙! 차앙! 차앙! 차앙!
하지만 금세 끝날 것 같았던 김필도는 여전히 같은 자세 같은 동작으로 천족의 공격을 막아냈다.
어느새 250명 전원이 죽음의 도끼질에 참여했고, 다시 일 번 순서가 됐다.
그런데 첫 번째 공격을 했던 천족 사내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죽음의 도끼질’의 규칙 때문이었다.
아무리 극악한 죄인이라고 해도 ‘죽음의 도끼질’에 참여하는 모든 전사의 검을 받아내면 무죄가 된다는 규칙이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250명이 펼치는 죽음의 도끼질을 전부 받아낸 전사는 천계를 통틀어도 단 한 명도 없었다. 가장 많이 받아낸 자가 백 번이었는데, 그 또한 백한 번째에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김필도는 천계 최장 기록을 두 배 반이나 경신한 것이었다.
“뭣들 하고 있느냐?”
헬만은 멍하니 서 있는 부하들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그는 죽음의 도끼질을 견뎌냈습니다, 10군!”
천족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누구냐?”
헬만은 차가운 눈으로 부하들이 있는 곳을 쏘아보았다.
“납니다.”
천족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또 너더냐?”
헬만은 앞으로 나온 천족을 쏘아보았다.
제4계급임에도 불구하고, 제3계급보다 뛰어난 검술을 지니고 있는 크레디안이란 자였다.
지금 헬만이 이끌고 있는 천족은 하나의 조직처럼 보이지만 내부적으로는 두 패로 나뉜 상태였다.
한 패는 헬만을 따르는 자들이고 다른 한 패는 하라미를 따르는데, 그들의 수장이 바로 크레디안이었다. 크레디안을 비롯한 하라미를 따르는 자들은, 그녀의 죽음에 의문을 표시하고, 비록 증거가 없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지만 헬만 일행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죽음의 도끼질을 견뎌낸 전사는 무죄라는 게 천계의 율법입니다, 10군.”
“그 율법은 천족에게만 해당한다, 크레디안.”
“전 천족뿐만이 아니라 전사면 누구라도 그 율법의 적용을 받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단 말이냐?”
헬만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식었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게 아니라 난 천족의 자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자존심도 없는 놈이라는 거구나.”
“…….”
크레디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좋다. 인간을 공격하라는 내 명령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자는 물러나라.”
헬만은 차가운 눈으로 크레디안을 쏘아보았다. 그는 결코 부하들이 물러날 거라고 생각지 않았다. 설령 크레디안의 말이 맞는다고 해도 지금 물러나는 자는 배신자로 낙인찍힐 뿐, 본인 경력에 도움이 될 건 아무것도 없다.
크레디안은 물론이고 다른 자들 또한 물러나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
헬만의 예상대로였다. 뒤로 빠지는 천족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 모두가 죽음의 도끼질에 참여하는 걸로 알겠다! 지금부터 다시 죽음의 도끼질을…….”
“난 빠지겠소.”
죽음의 도끼질을 시작한다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크레디안은 뒤로 물러났다.
“배신자가 되고 싶은 게냐, 크레디안.”
헬만의 몸에서 살기가 흘러나왔다.
“나는 우리 천계의 율법을 어기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나도 빠지겠습니다.”
이어 크레디안의 친구 볼리카가 뒤로 물러났다.
“나도 빠지겠습니다.”
“나도 빠지겠습니다.”
“나도…….”
그리고 수십 명이 동시다발적으로 물러났다.
헬만은 뒤로 물러난 자들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뒤로 물러난 자는 150명이고 남은 자는 1백여 명이었다.
“명령권자는 나다, 크레디안.”
“아무리 상관이라고 해도 죽음의 도끼질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천계 율법입니다.”
“죽일…….”
헬만은 싸늘한 눈길로 크레디안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말이 틀리지 않다.
‘죽음의 도끼질에는 오직 자발적인 참여만 허용된다.’라는 조항은 죽음의 도끼질을 당하는 자가 배신자인지 아닌지의 판단을 상급자가 아닌 대원들이 하도록 하는 규정이었다. 150명이 물러났다는 건 곧 이곳에 있는 천족 중 절반 이상이 김필도를 벌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는 의미가 된다.
“대신 방해하지도 않겠소.”
크레디안은 검을 거둬들였다. 그러자 물러났던 나머지 대원들도 전부 검을 거뒀다.
“후회할 거다, 크레디안.”
“설사 후회한다고 해도 전사로서의 자존심을 팔고 싶지 않습니다.”
크레디안은 단호하게 말했다.
“쿡! 자존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헬만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부하들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죽음의 도끼질을 시작하라!”
“시작하라!”
페르토가 헬만의 명령을 복창했다.
“차앗!”
페르토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천족 한 명이 김필도를 향해 쏘아져 갔다. 그는 조금 전에도 일 번으로 공격을 감행했던 자였다. 그 사내가 5미터가량 전진했을 때 두 번째 사내가 몸을 날렸고, 두 번째 사내가 5미터여 전진했을 때 세 번째 사내가 몸을 날렸다.
죽음의 도끼질에 참여한 숫자만 줄었을 뿐 천족의 공격은 처음과 같았다.
“타앗!”
하지만 김필도는 달랐다. 가장 먼저 출발한 사내가 15미터 지점에 도착했을 때 지면을 박차고 쏘아져 갔다. 그가 나아가는 방향은 처음 출발한 천족 사내 쪽이었다.
“헉!”
느닷없는 김필도의 대항에 천족 사내는 깜짝 놀랐다.
“나 같으면 먼저 공격을 하겠어.”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헬칸이 허공을 갈랐다.
슈캉!
헬칸은 간단하게 천족 사내의 허리를 자르고 파고들어 갔다.
“차앗!”
김필도는 힘차게 기합을 내지르며 헬칸을 당겼다.
스악!
천족 사내의 허리로 파고들어 갔던 헬칸은 시원스럽게 뽑아져 나왔다.
“크아악!”
“광속의 바람…….”
주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김필도의 신형은 반대편으로 쏘아져 갔다. 김필도가 달려가는 곳에서는 두 번째로 출발한 천족이 쏘아져 오고 있었다.
이미 동료가 당하는 광경을 본 천족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그는 김필도가 눈앞으로 다가오자마자 급하게 검을 찍었다. 방어보다는 공격에 더 치중한 도끼질 검법이었다.
차앙!
“헉!”
힘껏 찍었던 검이 아래로 흘러 버리자 천족 사내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미 천족 사내의 상체는 무방비 상태였다. 그런 천족 사내의 심장을 향해 가시가 달린 송곳 모양의 마훼가 파고들어 갔다.
“크억!”
천족 사내의 입이 쩍 벌어지고 피가 튀어나왔다.
“광속의 바람…….”
마훼를 뽑아냄과 동시에 오른편으로 쏘아져 갔다. 그가 나아가는 속도는 달려오는 천족의 속도를 능가했다.
천족은 김필도를 향해 검을 내리찍었다.
하지만 천족의 검보다 김필도의 헬칸이 더 빨랐다. 천족의 검이 김필도 머리 위에 당도하기도 전에 헬칸은 천족의 심장을 뚫었다.
“커억!”
천족의 손에서 검이 떨어져 나갔다.
쥐고 있던 헬칸을 놓은 김필도는 떨어지는 천족의 검을 잡아채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천족을 향해 내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