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180화 (180/225)

# 180

푸욱!

검은 정확하게 천족의 심장으로 파고들어 갔다.

“아악!”

천족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김필도는 죽어가는 천족을 보고 있지 않았다. 심장을 찔린 채 쓰러지고 있는 천족의 몸에서 헬칸을 뽑아냄과 동시에 처음 천족을 죽였던 곳으로 내달렸다.

그쪽에서 다섯 번째 천족이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스아악!

“크아악!”

천족의 비명이 길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 비명은 끝이 아니었다. 동료들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족들은 더욱 거칠게 대항했고, 김필도의 헬칸과 마훼와 방패에 죽임을 당했다.

익숙해진다는 건 곧 강해지는 거라는 김필도의 말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천족은 쉬지 않고 달려들었지만 김필도의 몸에 검을 꽂아 넣지 못했다. 오히려 죽어나가는 속도만 더 빨라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하라미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김필도가 이번에도 공격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면 그녀도 나설 생각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 죽음의 도끼질이 시작되자마자 선공을 취함으로써 도끼질을 무력화시켜 버린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단한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너희는 전부 죽게 될 거야.”

하라미는 헬만을 비롯한 천족들을 바라보았다.

흔히 많은 이들이 말하길 종족 중 가장 자존심이 강하고 집요한 자들이 마족이라고 한다. 하지만 하라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가 겪은 종족 중 가장 집요하고 자존심이 강하며 때로는 비열하기까지 한 종족은 천족이었다.

천족은 조금이라도 유리하다 싶으면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천족이 생각하는 유리한 상황이란 지금처럼 많은 수가 아주 적은 수를 공격하는 죽음의 도끼질 같은 것이다. 인원수도 백 배 이상이고 전투기갑까지 걸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동료들이 희생당하는 걸 보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아마도 열 명 이하가 남았을 때나 돼야, 동요할 것이다.

유리한 상황이라 판단하면 절대 물러나지 않는 천족의 성정이 저들 전부를 죽음으로 이끌게 될 것이다.

하라미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수십 명이 죽었지만 천족은 결코 포기하지도 작전을 변경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쉬지 않고 김필도를 향해 쏘아져 갔다.

차앙!

“크윽!”

바로 이 소리 때문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모르게 김필도는 강한 충돌이 있을 때마다 낮게 비명을 흘렸다. 그리고 그의 입가로는 실낱같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김필도의 겉모습은 조금만 더 몰아치면 끝날 것 같은 위태로운 지경이었다. 상황이 그런데 천족 입장에서 죽음의 도끼질을 그만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천족들은 앞다퉈 김필도를 향해 몸을 날렸다.

“얼마 남지 않았다, 몰아쳐라!”

헬만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는 김필도가 얼마 버티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는 부하들을 독려했다.

팔십여 명이 당하고 이제 남은 부하의 수가 이십여 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아니 뒤편으로 물러나 있는 방관자들을 아군으로 착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차앙! 스악!

“아아악!

차앙! 푸욱!

“크아악!”

차앙! 퍼억!

“악!”

헬만이 독려하는 와중에도 비명은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정적이 찾아왔다.

“더 세게 몰아치란 말이다! 저 벌레의 비명이 들리지 않느냐!”

더 이상 나서는 부하가 없자, 헬만은 고함을 내질렀다. 부하들이 겁을 먹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천족 진영은 침묵에 휩싸여 있을 뿐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내 말이 말 같지…….”

“누렁이 네 편은 아무도 없어.”

나직한 목소리가 헬만의 말을 잘랐다.

“어, 없다고?”

헬만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반경 20미터에 달하는 공터는 천족의 시체들로 인해 황금색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서, 설마…….”

이제야 지금껏 따랐던 부하 1백 명이 전부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헬만은 멍해졌다.

“말도 안 돼.”

헬만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 그랬다.

한두 명도 아니고 처음엔 250명이 참여했고, 두 번째에는 1백 명이 참여했다. 그렇다면 총 350명이 ‘죽음의 도끼질’에 참여한 셈이다.

그런데 놈은 그 모든 공격을 견뎌냈을 뿐 아니라 아군 1백 명을 살해하기까지 했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고, 피해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믿어지지가 않았다. 어떻게 마족도, 천족도 아닌 인간이, 아니 다섯 종족 중에서 가장 약한 인간이 350번의 도끼질 검술을 견뎌내고 반격을 한단 말인가?

지금 상황을 보고한다고 해도 믿어줄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제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은데 누렁이 네 생각은?”

김필도는 헬만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부상을 당한 게 아니란 말이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 지금껏 버텨낸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혀를 살짝 깨물었어.”

“일부러 부상당한 척했단 말이냐?”

“도망치면 안 되잖아.”

“도, 도망?”

“다른 놈은 몰라도 넌 반드시 잡고 싶었거든.”

김필도는 히죽 웃었다.

“죽여주겠다, 개자식!”

헬만은 검을 들어 김필도를 겨냥했다.

“개자식은 내가 아니라 직속상관을 공격해서 낭떠러지로 밀어버린 너지.”

“그게 무슨…….”

헬만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네가 하라미를 공격해서 밀어버린 그 낭떠러지 아래쪽에 내가 있었어. 나는 그곳에서 하라미를 만났고. 하라미 말이 자신을 공격한 놈은 너라고 하더구나.”

“네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헬만은 크레디안 일행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믿어달라고 한 말이 아냐. 난 그저 그녀에 대해 저들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한 말이야.”

김필도는 크레디안 일행을 가리켰다.

“정말이오?”

시선이 마주치자 크레디안은 물었다.

“그녀로부터 분명히 들었소.”

“그걸 어떻게 믿소?”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하라미 하딘 이스마디온이라고 했소.”

“으음!”

크레디안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대천신군 대원들 중에서도 하라미의 풀 네임을 아는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물론 이스마디온이란 성과 퍼스트 네임인 하라미는 모두 안다. 하지만 미들 네임인 하딘은 아주 친한 사이가 아니면 알지 못한다. 하물며 인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인간에게 풀 네임을 말하는 경우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유언 말고는 없을 것 같았다.

크레디안은 시선을 돌려 헬만을 바라보았다.

“크레디안 너는 상급자인 나보다 인간의 말을 더 믿는 모양이구나.”

헬만은 차갑게 말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그의 내심은 조마조마했다.

검으로 김필도를 겨냥하긴 했지만 그건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니라 크레디안 일행을 끌어들이기 위한 제스처에 불과했다. 그런데 김필도가 하라미를 언급한 것이었다. 김필도가 어떻게 하라미를 알고 있는지 그것까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지금 위기를 돌파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10군과 함께 갔던 이들 중 돌아오지 않은 분은 하라미님뿐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라미가 죽기 전에 유언을 남겼고, 저놈이 그 유언을 들었다는 사실을 믿는단…….”

“나는 하라미가 죽었다고 말한 적 없어, 누렁이.”

김필도가 헬만의 말을 잘랐다.

“뭐라고?”

헬만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조금 전에 말한 그대로야. 난 하라미가 죽었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 넌 죽었다고 했어. 그건 곧 하라미가 낭떠러지로 떨어지기 전 상황을 넌 알고 있었다는 게 되는 거잖아.”

“쿡!”

헬만은 피식 웃었다.

“인정하는 모양이지?”

“맞다, 벌레. 그 자리에 내가 있었다.”

“정말이오?”

이번엔 크레디안이 물었다. 크레디안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살기였다.

“크레디안, 난 명령대로 했을 뿐이다.”

“누가 명령을 내렸단 말이오?”

“천좌10군인 내게 명령을 내릴 권한을 가진 분이 세이아칸님밖에 없다는 걸 몰라서 묻는 거냐?”

“정말 세이아칸님이 하라미님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단 말이오?”

“나는 하라미를 없앨 이유가 없다.”

“으음!”

크레디안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처음엔 헬만이 하라미를 질투하여 살해한 걸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설마…….’

크레디안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하라미의 암살 시도가 엄청난 사건의 시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결정해라, 크레디안!”

그때 헬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레디안은 고개를 돌려 볼리카를 보았다. 둘은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볼리카가 먼저 입을 열었다.

“10군의 말처럼 만일 이번 일을 주관한 자가 천좌라면 우린 하극상을 저지른 꼴이 되네.”

“최소한 문 대륙으로 추방이고 아니면 ‘죽음의 도끼질’ 형벌이 기다리고 있겠구먼.”

“그렇지.”

크레디안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꼬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하라미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계의 이인자인 총리대신의 외동딸이다.

그런데 그녀를 암살할 생각을 하다니.

아무리 국방대신의 아들이라고 해도 일을 너무 크게 벌인 것 같았다.

“문제는 우리도 그 사실을 알아버렸다는 거네.”

볼리카는 신음처럼 말했다.

총리대신 딸 암살 사건 같은 엄청난 일이라면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 그런데 이곳에 있는 150명은 헬만이 한 말을 듣고 말았다.

세이아칸이 어떤 일을 꾸미고 있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천계의 최고 권력자인 천왕이 되고 싶어 할 수도 있고, 어쩌면 성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어떤 직책에 있든 하라미 암살 사건은 오점처럼 따라다닐 것이다. 미래를 위해서라면 세이아칸의 선택은 한 가지밖에 없다. 오점으로 남을 수도 있는 하라미 암살 사건을 완벽하게 지우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아닐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추방을 당하든지 제거될 게 분명하다.

“우리도 선택의 기로에 섰구먼.”

크레디안은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조장을 따르겠소.”

천족 중 한 명이 소리쳤다. 그 또한 자신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직면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나도 따르겠소.”

“우린 조장을 따르겠소.”

천족들은 일제히 소리쳤다.

천족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크레디안에게 맡기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헬만은 당황했다.

“천좌께는 내가 잘 말하겠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하면 그분도 이해해 줄 거다.”

그는 천족들을 향해 소리쳤다.

“우린 빠지겠소, 10군.”

하지만 크레디안은 세 걸음 물러났다.

“지금 날 따르지 않으면 너희는 대천신군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그래도 상관없단 말이냐?”

“대천신군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우리에게 미래는 없소, 10군. 어차피 불투명한 미래라면 이곳에서 개척해 보겠소.”

크레디안은 단호하게 말했다.

“인간들이 너희를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느냐?”

“내가 받아줄 거니까 누렁이 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김필도가 헬만의 말을 받았다.

“네가 받아준다고?”

“부하도 없고, 영지도 없지만 그래도 난 발탄 제국의 대공이거든. 저 친구들 정도는 먹여 살릴 돈도 충분히 가지고 있어.”

김필도는 싱긋 웃었다.

“…….”

헬만은 김필도를 쏘아보았다.

“이제 우리 둘의 빚을 청산할 시간이야, 누렁이.”

김필도는 헬칸을 들어 올려 헬만을 겨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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