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
천족들의 입에서 일제히 신음이 흘러나왔다. 20여 미터 전방에서 마족 1백여 명이 이편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전투 준비하라!”
크레디안은 급하게 소리쳤다.
“그럴 필요 없다, 크레디안.”
마족들 속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스, 스승님이십니까?”
크레디안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내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구나.”
차분하게 말을 받으며 등장한 자는 다름 아닌 라이자칸이었다. 라이자칸이 모습을 드러내자 천족 진영에 동요가 일었다. 설마 라이자칸이 마족과 함께 나타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스승님!”
“고생이 많았구나.”
라이자칸은 크레디안의 등을 가볍게 두들겼다.
크레디안은 라이자칸이 훈련교관이었을 때 가장 뛰어난 학생 중의 한 명이었다. 좀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제자로 받아들여 가르쳤을 텐데, 대천신군으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기회가 없었다.
서로 헤어졌던 둘이 다시 만난 건 크레디안이 전사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대천신군으로 들어오면서였다.
크레디안이 하라미를 따르게 된 것도 라이자칸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그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나야 늘 같지. 아니다, 이젠 대천신군을 떠났으니까 전과 달라졌다고 해야겠구나.”
“저분들과 함께 다니시는 겁니까?”
크레디안은 뒤쪽에 서 있는 마족들을 가리켰다.
“천족은 나를 쳐내지 못해서 안달을 하는데 저들은 나를 친구로 받아주더구나. 저기 맨 앞에 있는 분은 마계10군단의 전 군단장이시다.”
라이자칸은 마족 맨 앞에 서 있는 검은 피부의 여자를 가리켰다. 거대한 검을 등에 메고 있는 그녀는 다름 아닌 이카렌이었다.
“반가워요. 나는 이카렌 쿤타 카킬레우스예요.”
이카렌은 방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처, 처음 뵙습니다, 크레디안입니다.”
크레디안은 인사를 했다.
“우리 이야기는 이따가 해요. 지금은 오래전에 헤어졌던 친구를 만나야겠어요. 이해해 주실 거죠?”
“그, 그렇게 하십시오.”
크레디안은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를 비켜주었다.
이카렌은 크레디안을 지나쳐 공터로 들어갔다.
공터 중앙에는 김필도가 이편을 빤히 바라보며 서 있었다.
“드디어 소원을 이뤘네?”
이카렌은 김필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슨 소원?”
“마족과 천족 앞에서 침을 뱉는 게 소원이라고 했잖아.”
“살아선 이루지 못했지.”
“…….”
이카렌은 할 말이 없었다. 살아서는 이루지 못했다는 말에는 김필도가 겪었던 고난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결국 그는 죽은 후에야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미안해. 그때 함께 가야 했었는데.”
“아냐. 그 때문에 헬칸의 주인이 될 수 있었고, 저들과 싸우고도 이렇게 멀쩡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거니까. 오히려 내가 고마워해야지.”
김필도는 주변에 널려 있는 천족들의 시체를 가리켰다.
“그래도 미안해.”
이카렌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그녀는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괜찮다니까 그러네. 그보다 어떻게 된 거야?”
이카렌이 진정되는 듯하자 김필도가 본론을 꺼냈다.
“내가 무능해서지 뭐.”
“데메우스 그놈 아버지 농간?”
“자기네들 말을 듣지 않았다고 잘렸어.”
“쯧! 아무리 뛰어난 자라고 해도 제 아들의 흠은 못 본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나 보네. 아무튼 잘 왔어. 라이자칸도요.”
김필도는 옆에 서 있는 라이자칸을 보며 빙긋 웃었다.
“나는 자네가 정히 갈 곳이 없으면 천둥의 성으로 찾아오라고 했던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네.”
라이자칸은 밝게 웃었다.
“천둥의 성은 비어 있는 방이 더 많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난 저 친구들을 좀 봐야겠네.”
라이자칸은 크레디안 일행을 가리켰다.
“그렇게 하세요.”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개시켜줄게.”
라이자칸이 자리를 뜨자 이카렌은 옆에 서 있는 두 명을 가리켰다. 그들은 전대 친위대 대주 록과 부대주 히발이었다.
김필도는 록과 히발을 바라보았다.
한 명은 3미터 키의 최상급 마족이고 다른 한 명은 2미터 50센티미터 키의 상급 마족이었다.
“하하하! 반갑소, 대공. 나는 록 체빌 델미우스 크락 하말리온이오.”
마치 거대한 범종을 치는 것 같은 소리가 김필도 귓전을 강타했다.
“목소리로 서열을 정하는 거라면 댁이 마왕이구려. 반갑소, 록. 난 루시안이오.”
김필도는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오잉? 역시 직위가 대공이라 그런지 통이 크외다. 다른 놈들은 기껏 군단장 급이라고 하는데.”
록은 활짝 웃으며 김필도의 손을 잡았다.
혼자 천족 1백여 명을 없앴으니까 실력은 입증된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록은 김필도의 손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목소리만 그렇다는 뜻이오, 록!”
김필도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맺혔다. 록의 얼굴에서 속마음을 읽어냈다.
그 역시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김필도와 록의 손등에 힘줄이 불뚝 불거졌다.
‘이거 봐라?’
록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김필도의 손에서 상당히 강한 힘이 감지된 것이었다. 그 힘은 웬만한 마족들보다 더 강했다.
록은 그가 지닌 힘의 70퍼센트 정도를 끌어 올렸다.
“몇 살이나 됐소?”
김필도는 웃으며 물었다.
“4천7백5살이오, 대공.”
“나이가 좀 많구려.”
김필도의 말에 록의 눈동자가 약간 가늘어졌다. 나이가 많다는 말은 곧 퇴물이 다 되지 않았느냐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러쥔 손에 모든 힘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마나가 아닌 순순한 근육의 힘이었다.
“마나를 사용하는 게 나을 거요, 록.”
“나는 상급 마족이오, 대공.”
“나는 상급 인간이오.”
“후회하지 마시오.”
록은 서서히 마나를 끌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전신에서 검은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비록 키는 작지만 난 헬칸과 오테르 인장의 주인이오.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오.”
김필도의 몸에서 검붉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헉!”
“헛!”
둘 옆에 있던 이카렌과 히발이 깜짝 놀라 물러났다. 둘의 몸에서 흘러나온 암흑의 기운과 혼돈의 기운이 역장을 형성하면서 이카렌과 히발을 밀어내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놀람도 잠시. 둘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눈앞의 광경을 지켜보았다.
한쪽은 오로지 노력을 통해 각성을 이룬 최상급 마족이고 다른 한쪽은 헤를리온의 전승자이자 헬칸과 오테르 인장의 주인이다. 그 둘의 대결은 그야말로 최고의 볼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응?”
“어?”
록과 김필도의 몸에서 흘러나온 역장을 감지한 듯 여기저기서 놀람에 찬 외침이 흘러나왔다. 그것도 잠시, 마족과 천족들은 김필도와 록을 주시했다.
그들 또한 둘이 대결을 펼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었다.
“우린 졸지에 동물원 원숭이가 됐소이다그려.”
김필도는 웃으며 말했다.
“동물원 원숭이가 뭐요?”
“동물원은 동물을 가둬 놓고 구경꾼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말하고, 원숭이는 그 동물원에서 가장 인기 있는 동물을 말하는 거요.”
“그렇다면 우린 동물원 원숭이가 된 게 맞소이다.”
“힘들면 그만 힘을 푸는 게 어떻소.”
“난 아직 멀었소.”
록은 더욱 힘을 주었다.
우웅!
그러자 그의 몸 주변에서 대기의 파동이 생겨나며 나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도 그런데.”
김필도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검붉은 기운이 더욱 많아지고, 덩달아 역장의 크기도 커졌다.
둥실!
김필도와 록의 신형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둘의 몸에서 흘러나온 힘이 너무 강해 저절로 떠오른 것이었다.
“대단하군요.”
히발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는 록의 상대가 될 수 있는 자는 히데우스, 칼베리언, 알리토 세 명뿐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키가 2미터도 되지 않은 인간이 록과 대등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러게 말이야.”
이카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대주는 아직 모든 힘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루시안도 마찬가지야. 그도 아직 전력을 다하지 않았어.”
찌이익! 찌이익!
두 역장이 부딪친 곳에서 천이 찢겨나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역장은 더욱 넓어져 주위에 있는 마족을 밀어내더니 지금은 20여 미터 밖에 있던 천족마저도 밀어낼 지경이었다. 물론 이카렌과 히발 또한 라이자칸이 있는 곳까지 물러난 상태였다.
“전투기갑을 착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저 정도면, 마족이건 천족이건 일대일로는 그의 상대가 없을 것 같네.”
라이자칸은 감탄한 얼굴로 김필도를 보았다.
그러는 사이에 김필도와 록은 더욱 높이 올라갔다. 둘이 올라간 높이가 무려 30미터에 달했다.
웅웅웅! 웅웅웅!
갑자기 김필도 몸 주위에서 특이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검은색의 뭔가가 김필도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마법진입니다, 군단장님!”
김필도를 바라보고 있던 히발이 소리쳤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김필도는 마법진을 갑옷처럼 두른 채 록의 손을 잡고 있었다.
웅웅웅! 웅웅웅!
찌이익! 찌이익!
그리고 조금씩 록이 만들어 낸 역장 크기가 줄어들었다. 록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지금 놀라 기절할 지경이었다. 감옥을 나오면서 누군가에게 질 거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마족이나 천족이 아닌 인간에게 패배를 당하는 중이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서 마치는 게 어떻소.”
“젠장!”
휘익!
욕설을 뱉어 낸 순간 역장의 균형이 완전하게 무너지면서 김필도가 쏟아낸 힘이 록을 강타했다.
“크억!”
록은 피를 토해내며 뒤로 훨훨 날아갔다.
“대주!”
히발은 록을 향해 몸을 날렸다.
콰앙!
하지만 그는 날아가는 록을 잡지 못했다. 록은 커다란 나무에 부딪쳐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쯧! 서로 동시에 힘을 거둬들이면 부상 없이 끝낼 수 있는데.”
김필도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제 그만 내려와!”
“얼레, 언제 여기까지 올라온 거야?”
김필도는 훌쩍 몸을 날려 이카렌 옆으로 내려섰다.
“진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네?”
이카렌은 믿어지지 않은 얼굴로 김필도를 바라보았다.
“또 패한다면 다시 살아난 의미가 없잖아.”
김필도는 싱긋 웃으며 아공간을 열고 헬칸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설향과 단도를 꺼내 엉덩이 쪽으로 걸쳤다.
“더 이상 패배는 없다는 말?”
“그렇지. 그런데 땅속에 어쌔신이 숨어 있다는 건 무슨 뜻이야?”
김필도는 시체가 없는 곳으로 자리를 옮기며 물었다. 그 말은 천족을 처음 만났을 때 헬만이 했던 말이었다.
“우리도 자세히는 몰라. 땅속에서 활동하는 자들이 있는 것 같아.”
“그런 자들이 있어?”
“노르카인 것 같아요.”
그때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네 명이 다가왔다.
그들은 알마니와 데푸시, 이프리스, 고스트 킹이었다. 그리고 네 명의 머리 위에는 라헤나와 다란 두 사람이 숨어서 따르고 있었다. 대답을 한 사람은 알마니였다.
“어서 와! 고생 많았지.”
김필도는 반가운 얼굴로 맞았다.
“말도 마세요. 저 양반이 없었으면 저 둘은 진작 죽었을 거예요.”
알마니는 고스트 킹과 데푸시, 이프리스를 차례로 가리켰다. 즉 고스트 킹이 데푸시와 이프리스의 목숨을 구했다는 말이었다.
“사돈 남 말하고 있네. 이프리스와 내가 없었으면 너희가 뒈졌지, 자식아!”
-말은 똑바로 해라, 난쟁이. 너희가 아니고 세다크 저 자식이다!
“웃기지 마, 자식아! 힘도 못쓴 주제에.”
데푸시는 고스트 킹을 향해 인상을 썼다.
“얼레?”
김필도는 깜짝 놀랐다. 최상급 마족 이상의 포스를 풍겨대던 고스트의 킹이 일반 마족보다 더 약해져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