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
“어떻게 된 거야?”
김필도는 코스트 킹을 보며 물었다.
-권능의 주인과 너무 오래 떨어져 있어서 몸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원래 그런 거였어?”
-나도 처음 알았다. 이틀까지는 괜찮았는데 그 후부터 조금씩 마나가 줄어들었다.
“그래서 저 난쟁이 자식에게 발리고 있었구나.”
-다음에 저 난쟁이 녀석 손 좀 봐줘야겠다.
“알았어. 우선 들어가서 충전이나 해.”
김필도는 오른손을 고스트 킹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고스트 킹은 검은 운무로 변하더니 파라온의 팔찌 안으로 들어갔다.
“고스트 킹!”
그제야 생각난 듯 이카렌이 버럭 소리쳤다.
그녀는 고스트 킹을 처음 본 순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검은 운무로 변하는 모습을 보자 이름이 퍼뜩 떠올랐다.
“기억난 모양이네?”
“어떻게 된 거야?”
“그곳에서 우연히 얻게 됐어.”
“그럼 그날 날 구한 사람이 너였어?”
“그 당시엔 고스트 킹이 이 안으로 들어간 걸 몰랐어.”
김필도는 파라온의 팔찌를 가리켰다.
“그거 혹시 파라온의 팔찌니?”
“응!”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가 막히네.”
이카렌은 멍한 얼굴로 김필도를 보았다.
“왜?”
“오테르의 인장과 파라온의 팔찌를 가진 자를 카포오테르라고 불러.”
“카포오테르?”
“진정한 가주라는 뜻이야.”
“내가 진정한 가주라고?”
“카포오테르가 인간에게서 나올 줄은 아무도 몰랐을 거야.”
“그래 봐야 아무것도 없잖아.”
“카포오테르가 건재한데 아무것도 없다고 하면 큰일 나지.”
“나?”
“히데우스님의 후계자잖아.”
이카렌은 배시시 웃었다.
“마계로 가서 오테르 가문을 재건해버릴까?”
“내가 옆에서 도와주면 금세 세울 수 있을 거야. 물론 마계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충족돼야 하겠지만.”
“그렇지. 오테르 가문을 재건하려면 일단 마계로 가야겠지.”
김필도는 전날 하라미와 머물렀던 장소에서 멈췄다.
“여기서 쉬게?”
“상황이 너무 복잡하잖아. 이곳에서 정리를 한 다음에 라파로 들어가든지 숲을 뚫고 나가든지 해야 할 것 같아서.”
“전 식사 준비 할게요.”
알마니는 아공간을 열고 요리 도구와 음식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그럼 난 카판이나 끓여야겠네.”
김필도는 아공간을 열고 카판 내릴 준비를 했다.
“히발!”
이카렌은 히발을 불렀다.
“하명하십시오, 군단장님!”
“우리도 식사 준비를 해.”
“알겠습니다.”
히발은 고개를 숙이고는 마족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잠시 후 마족들은 자리를 잡고 식사 준비에 들어갔다.
“자!”
김필도는 내려진 카판을 이카렌에게 내밀었다.
“네가 내려준 카판 오랜만에 마셔보네.”
이카렌은 선물을 받는 것처럼 카판잔을 공손하게 받았다.
“앞으로 자주 마시게 될 거야.”
김필도는 데푸시와 이프리스에게도 카판을 건네주었다.
“잘 마실게.”
“나도.”
“한 잔씩 할래요?”
데푸시와 이프리스에게 카판을 건네고는 허공에 대고 물었다.
“우리 것도 있어요?”
라헤나는 고개만 드러내고 물었다.
“당연히 있죠.”
“그럼 주세요.”
“라미는?”
천족들이 있는 곳에서 하라미라고 부를 수가 없어 ‘하’를 빼고 라미라고만 불렀다.
“좋아요.”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네?”
이카렌은 김필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허공에 세 명이 숨어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두 명이 여자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내가 인간성이 좀 좋잖아.”
김필도는 카판을 따라 허공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황금색 손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카판잔을 채갔다.
“천족?”
황금색 피부를 가진 팔을 본 이카렌이 물었다.
“그건 나중에 이야기해줄게. 그건 그렇고 지금 있는 곳은 어디야?”
인간들과 완전히 다른 체구라 머물 곳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천둥의 성에 있어.”
이카렌은 카판을 마시며 말했다.
“천둥의 성?”
“응.”
“천둥의 성이면 내 집 아냐?”
“리시아라고 하는 예쁜 아가씨도 있던데?”
“그럼 거기 있다가 온 거야?”
“나머지는 거기에 남아서 성 보수 작업을 하고 있어.”
“나머지?”
“좀 많이 넘어왔거든.”
“얼마나 왔는데?”
“우리까지 포함해서 781명.”
“헐!”
김필도는 멍한 얼굴로 이카렌을 보았다.
제4장 프리우스오테르
781명.
그 많은 마족이 한꺼번에 건너왔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원래는 문 대륙에 머물 생각이었는데, 차원의 벽이 사라지고 바다가 생겨나 있더라고. 그리고 우연히 라이자칸을 만났는데 네 이야기를 해 주더라.”
“천족과 마족이 날 잡기 위해 휴도니아 대륙으로 건너왔다는 말을 들은 거야?”
“응!”
“그럼 날 구하기 위해서 온 거네?”
“그런 셈이야.”
이카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놔, 자식아.”
“걷지도 못하면서 왜 그러십니까?”
“난 걸을 수 있어. 저 인간에게 맞은 건 모기에 물린 것 정도밖에 안 된다고.”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일행은 고개를 돌렸다.
록과 히발이 티격태격하면서 이편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록의 걸음걸이가 불안했다.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똑바로 서지 못하고 계속 비틀거렸다.
아마도 히발이 부축하지 않으면 금세 쓰러질 게 분명했다.
“여기로 앉으세요.”
히발은 록을 김필도 앞에 앉혔다.
김필도는 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록은 몸이 상당히 좋지 않은 듯 덜덜 떨고 있었다.
“데푸시!”
“네, 형님!”
“여기에 불 좀 피워.”
“알겠습니다.”
데푸시는 곧바로 근처로 가서 마른 나무를 모아왔다. 곧 일행 중간에 불이 피워졌다.
“다시 소개하겠소. 난 하말리온 가문의 가주 록 체빌 델미우스 크락 하말리온이오.”
록은 다시 자신을 소개했다.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요.”
“오테르 가문을 계승했다고 하지 않았소?”
오테르 가문의 가주면 오테르란 성을 써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이었다.
“헬칸의 오테르 인장의 주인이 됐을 뿐이오. 그리고 적당한 인재가 나타나면 두 가지를 물려줄 생각이오.”
“형님, 잠깐 나 좀 봅시다.”
듣고 있던 이프리스가 김필도를 보며 말했다.
“할 말 있어?”
“일단 나 좀 봅시다.”
이프리스는 김필도를 데리고 자리를 옮겼다.
“왜?”
“프리우스 뒤에 오테르를 붙이세요.”
“프리우스오테르로 하라고?”
“네.”
“왜 그래야 하는데?”
“록 저 양반은 지금 형님을 마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려고 하고 있어요.”
“무게를 잡은 게 그 때문이었던 거야?”
“그렇다니까요.”
“그런 건 진작 말해 줘야지, 인마.”
김필도는 이프리스의 어깨를 툭 치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다시 소개하겠소. 나는 오테르 가문의 가주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오테르요.”
만일 김필도가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본인이었다면 성을 바꾸는데 조금은 망설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루시안 본인이 아닌 김필도. 이곳에서 얻은 성이 어떤 거라도 상관없었다. 최상급 마족을 친구로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들었는가?”
록은 근처에 있던 마족들을 향해 소리쳐 물었다. 마족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김필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들었습니다, 대주!”
마족들은 일제히 소리쳤다.
“지금부터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오테르 대공은 오테르 가문의 가주다. 예의를 지키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대주님!”
마족들은 고개를 숙였다.
“나는 라베이커 가문의 장자 히발 벨프스 라베이컵니다. 오테르 가문의 가주께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히발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만나서 반갑소, 히발.”
김필도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히발에게 손을 내밀었다.
“영광입니다, 가주님!”
히발은 공손하게 김필도의 손을 잡았다.
“대원들에게 한 말씀 하시지요.”
악수가 끝나자 히발은 대원들을 가리켰다.
“한 말씀?”
김필도는 히발을 보았다.
“대원들의 우상은 록 대주님이었거든요. 그런데 가주께서는 록 대주님을 한 방에 보내버리지 않으셨습니까?”
히발은 웃으며 말했다.
“아! 그거라면 말보다는 이게 낫지.”
김필도는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네?”
히발은 의아한 얼굴로 김필도를 보았다.
“말보다 행동이 백 배 낫다는 말이네.”
김필도는 마족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그러고는 맨 앞에 있는 마족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반갑네. 나는 오테르 가문의 가주네.”
“바, 반갑습니다, 가주님. 전 오데야크입니다.”
마족은 상관과 악수를 하는 것처럼 부동자세를 취하며 본인의 이름을 외쳤다.
“잘해 보세.”
김필도는 자리를 옮겨 다른 마족 앞에 섰다.
“전 할모니입니다, 가주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마족은 부동자세를 취하더니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반갑네, 할모니. 좋은 인연으로 이어지길 바라네.”
김필도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허?”
록은 놀란 얼굴로 대원들을 보았다.
이곳에 있는 마족은 전부가 전대 친위대 대원들이다.
저들은 감옥에서 보낸 1천 년 동안 노력을 통해 각성을 이루었고, 강해지면서 덩달아 자존심도 세졌다.
그러면서 나타난 부작용 중의 하나가 여간해서는 타인을 인정하지 않는 성정이었다.
이카렌을 대할 때도 다르지 않았다.
록과 히발이 군단장으로 모시고 무릎을 꿇는 바람에 덩달아 복종하고는 있지만 내심으론 인정하지 않은 자들이 다수였다.
대원들이 이카렌을 따르게 하는 방법은 실력을 직접 보여주는 것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곳으로 올 때도 죄수들만 데리고 왔다. 몇 번의 싸움을 거치고 나자 비로소 이카렌을 인정하고 완전한 부하가 됐다. 이카렌을 처음 만나고 6개월 만에 이루어진 일이다.
그런데 김필도는 만나자마자 대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버린 것이었다. 물론 엄청난 실력을 직접 보여주긴 했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처음 보는 자들을 끌어들인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엄청난 실력에 상대를 압도하고 끌어들이는 능력을 지녔다는 건 곧 지도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란 뜻이지.’
록은 김필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김필도는 어느새 마지막 줄에 선 대원들과 악수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끝이 아니었다.
마족들 뒤편으로 150명에 달하는 천족이 정렬해 있었다.
“저들도 합류할 모양이네.”
록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뭐지?”
김필도는 바로 앞에 선 천족을 보았다. 마지막 마족과 악수를 끝내고 자리를 뜨려고 하는데 천족이 우뚝 서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