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
“전 임시 조장을 맡고 있는 크레디안입니다.”
“나와 함께 가겠다는 거요?”
“조금 전 천좌10군 헬만과 싸우기 전에 가주님께서 저희의 밥은 책임지겠다고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소.”
“돌아가면 놔줄 거냐고 물었지 돌아간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내 곁에 남겠다는 거요?”
“받아주신다면 남겠습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소?”
“솔직한 대답을 듣기를 원하십니까?”
“그렇소.”
“갈 곳이 없습니다.”
“당신네들만 입을 다물면 이곳에서 일어난 일은 아무도 모르오.”
“저희는 전부 150명입니다.”
“누군가는 실수로라도 비밀을 발설할 수도 있다는 거요?”
“만일 누군가가 발설하게 되면 우리는 추방자가 되든지, 배신자가 돼 죽음의 도끼질을 당하게 될 겁니다.”
“그러니까 내 밑으로 들어오겠다는 이유가 오직 살기 위해서란 말이군.”
“죄송하지만 그렇습니다.”
크레디안은 고개를 푹 숙였다.
“좋네, 크레디안. 자네들을 받아주겠네. 나는 루시안이네.”
김필도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가주님!”
크레디안은 김필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천족 150명과의 악수가 이어졌다.
“오데야크!”
인사를 마친 김필도는 그의 자리로 걸어가면서 오데야크를 불렀다.
“넵!”
오데야크는 벌떡 일어났다.
“천족들과 인사하고, 음식도 나눠주도록 해.”
“알겠습니다, 가주님.”
김필도가 자연스럽게 말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오데야크는 기분 나빠하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아니 말을 내리는 김필도의 어투가 너무 자연스러워 인지하지 못한 상황이라고 해야 옳다.
김필도는 빙긋 웃으며 그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곳도 이미 식사 준비가 끝나 있었다.
그때 알마니가 스프가 든 대접과 커다란 접시를 내밀었다. 접시 안에는 튀김옷을 입혀 튀긴 돼지고기와 쌀밥 그리고 김치가 담겨 있었다. 과거에 먹던 포크커틀릿 정식과 비슷했다.
“돈까스 정식이네.”
김필도는 빙그레 웃으며 알마니를 보았다.
“전에 마스터께서 한 말을 듣고 몇 번 만들어 봤어요.”
“이제 먹을 정도가 됐다는 거야?”
“제가 보기엔 그래요.”
“맛 좀 볼까?”
김필도는 접시를 내려놓고 돼지고기를 작게 잘랐다. 그리고 입으로 가져갔다.
“어때요?”
알마니는 긴장한 얼굴로 김필도를 보았다.
“디자이너 그만두고 식당 차려도 대박 나겠다.”
“그 정도예요?”
알마니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라헤나와 다란도 나오세요. 하라미도 나오고.”
“알았어요.”
허공에 몸을 숨기고 있던 세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하라미?”
하라미의 등장에 일행은 깜짝 놀랐다. 특히 라이자칸의 놀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크레디안 일행으로부터 하라미가 변을 당했다는 말을 들었던 탓이었다.
“아무런 힘이 되어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하라미는 라이자칸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대천신군에서 밀려나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 것에 대한 사죄였다.
“2군이 무슨 힘이 있다고 그러시는가. 지금 난 아주 좋네.”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직급과 신분에서 하라미가 상급자이기 때문에 라이자칸은 말을 올렸다.
“그래도 아빠에게 말씀드렸다면…….”
“그랬더라면 2군 아버님만 곤란했을 거 아닌가. 그보다 크레디안에게 대충 이야기는 들었네만, 어떻게 된 건가?”
“그게…….”
하라미는 그녀가 겪었던 일을 설명해주었다.
“불행 중 다행이구먼.”
이야기를 듣고 난 라이자칸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만일 그곳에 김필도가 없었다면 하라미는 얼어 죽었을 것이다. 김필도는 하라미의 생명의 은인이었다.
“제가 살아난 걸 비밀로 하고 싶어요.”
“그렇게 되면 2군 아버지가 이곳으로 건너올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상관없는가?”
“저도 아빠가 보고 싶어요.”
“그게 무슨…….”
라이자칸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하라미가 이곳에서 죽었다는 보고가 올라가면 홀딘 총리대신의 성격상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스마디온 전사단을 이끌고 휴도니아 대륙으로 건너올 게 분명하다. 마계에서 그 사실을 알게 되면 그들 또한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홀딘 총리대신은 하라미의 죽음에 대해 조사를 하기 위해 휴도니아 대륙으로 오겠지만 마족 입장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을 테고, 결국엔 그들도 추가 병력을 파견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곳 휴도니아 대륙은?
라이자칸은 고개를 돌려 김필도를 보았다.
“차원의 벽이 사라졌기 때문에 언젠가 한번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오. 그리고 어차피 휩쓸릴 거라면 선수를 치는 게 낫지 않겠소.”
“승산이 있다고 보는가?”
“난 운이 좋은 놈이잖소. 동료들도 많고.”
“하지만 제일 약하네.”
“그건 두고 봐야지요.”
김필도는 빙그레 웃었다.
“저는 저들에게 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올게요.”
식사를 마친 하라미는 천족 대원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따가운 시선에 김필도는 고개를 돌렸다. 록이 이편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할 말 있는 것 같소이다.”
“아까 그게 뭔지 궁금해서 그렇소.”
“아까 그거라면?”
“가주 몸통에 문신처럼 돋아난 마법진을 말이오.”
“그것 때문에 패했다고 생각하는 거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소.”
“맞소, 록 당신을 가랑잎으로 만들어버린 것은 이거요.”
김필도는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 표면에 검은 마법진 하나가 생겨났다. 마치 물속에서 떠오르는 것 같았다.
일행은 놀랍다는 듯 김필도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이카렌, 돌을 올려 봐.”
김필도가 말하자 이카렌은 조약돌 하나를 주워 마법진 위에 올렸다. 김필도는 주먹을 지그시 말아 쥐었다.
푸스스!
주먹 안쪽에서 나직한 소성이 흘러나왔다.
잠시 그 상태로 있던 김필도는 주먹을 폈다. 놀랍게도 이카렌이 얹었던 돌은 가루로 변해 있었다.
“마법 같기는 한데…….”
록은 낮게 중얼거렸다.
“실전 마법이오.”
“실전 마법?”
“문 대륙의 멸망을 가져왔던 헬칸이 익혔던 마법이오.”
김필도 주위에 있는 이들은 깜짝 놀랐다. 록을 한 방에 보내버렸던 그 힘이 마법일 줄은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 난 영광으로 생각해야겠군.”
록은 머리를 긁적였다. 다른 것도 아니고 다섯 종족을 멸망으로 이끌었던 헬칸의 기술에 당한 거니까, 상대가 인간이라고 해서 창피하게 여길 게 아니었다.
아니 그 정도로 버텨낸 것만 해도 대단한 거였다.
“그보다 어떻게 된 거야?”
김필도는 이카렌을 보았다.
“땅속에 어쌔신들이 쫙 깔렸어.”
“노르카들?”
“그것까진 모르겠고.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곳에서 나타나는 바람에 대응이 힘들어.”
“그럼 우리가 있는 이곳은 어떻게 된 거지?”
“라파 외각을 기준으로 모든 방향으로 1킬로미터까지는 안전지대야.”
“그럼 라파는 저 안쪽이겠네?”
김필도는 반대편을 가리켰다.
“그건 나도 몰라.”
이카렌은 고개를 흔들었다.
“몰라?”
“다시 라파로 돌아가려고 시도를 해봤는데, 계속 숲만 나오더라.”
“밖으로 나가는 길밖에 없는데 그곳엔 적이 있다는 말이네?”
“그렇지.”
“노르카는 얼마나 강하죠?”
김필도는 라헤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대지의 기운이 강한 곳에서는 최강이라고 보면 돼요.”
“이곳은 대지의 기운이 강하다고 하지 않았나요?”
라파에 펼쳐진 마나 속박 마법의 본바탕이 대지의 힘이라고 해서 묻는 말이었다.
“맞아요. 이곳에 펼쳐진 환영 마법도 대지의 힘을 강화시키게 돼 있어요.”
그 당시 다른 정령전사들이 행칼에서 죽어갈 때 노르카들은 땅속을 통해 탈출을 시도했다. 이곳에 있는 자들은 그들의 후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르카의 약점은 없어요?”
“땅속에서 나오면 급속도로 약해져요.”
“하지만 땅속에서 나오게 하는 게 문제겠죠?”
“행칼 지하는 바위로 돼 있고 그 아래쪽에는 용암이 흐르고 있다고 들었어요.”
“노르카의 약점은 바위와 용암이라 말이군요.”
“그럴 거예요.”
“방법 있어?”
김필도는 이카렌을 보며 물었다.
“생각해 봐야지.”
“그럼 일단 휴식을 취하고 보자고.”
“그게 낫겠다.”
이카렌은 록을 보았다.
“이곳은 너무 좁아서 안 되겠고 계곡 밖에 진영을 구축하도록 하겠습니다, 군단장님.”
록은 자리에서 일어나 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우리도 천막을 치도록 하세요.”
마족들이 진영을 구축하자 하라미 또한 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천족들은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30분 후, 천족과 마족 양측은 동쪽과 서쪽에 천막을 세웠다. 중앙에는 세 개의 천막을 세웠는데, 왼편은 김필도와 알마니 일행, 중앙은 여자들 그리고 오른편은 록과 히발, 라이자칸이 묵을 곳이었다.
“차 드려요?”
김필도가 자리를 잡자 알마니가 물었다.
“깔끔한 차로 하자.”
“허브티 어때요?”
“좋아.”
“바로 준비할게요.”
알마니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너도 방향 감각이 없어?”
김필도는 이프리스를 보며 물었다.
“아무리 내놓은 자식이라고 하지만 난 엘프요.”
“가능하단 말이야?”
“정확하진 않겠지만 북쪽과 남쪽 정도는 알아낼 수 있을 거요.”
“그럼 숲에서 나가는 건 큰 문제없겠구나.”
“하지만 크로와 신의 정원 정원사는 문제가 될걸요?”
뜨거운 물이 든 주전자를 가지고 들어오던 알마니가 말했다.
“크로와 정원사의 수가 3천 명이라고 했던가?”
“네.”
알마니는 찻잔에 허브를 집어넣고 물을 부어 김필도에게 건넸다.
“나를 잡으러 왔으니까 조만간 공격을 해 오겠지?”
“그분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잖아요?”
“천족과 마족에게 무슨 말을 하겠어. 다 알아서 하는 거지.”
“바르칸은 그자를 믿습니까?”
한편에서 가만히 앉아 있던 다란이 입을 열었다.
“누구…… 리처드를 말하는 거요?”
“클!”
다란은 피식 웃었다.
사실 ‘그를 믿느냐는 말은’ 아주 엉뚱해서 설명해주지 않으면 그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김필도는 대번에 리처드를 입에 담는다. 그건 곧 그도 리처드를 믿지 않고 있다는 뜻이었다.
“내가 한 가지 질문을 하고 싶은데 대답해 볼래요?”
김필도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물었다.
“말씀하십시오.”
“만일 다란이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30년 전부터 준비를 해 왔다고 쳐요.”
“원대한 꿈은 어떤 걸 말합니까?”
“편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해 황제 자리라고 해요.”
“제가 30년 전부터 황제가 되기 위해 준비를 했단 말이군요.”
“맞아요. 다란이 황제 자리를 욕심 낼 수 있었던 것은 전 황제의 성을 이은 유일한 사람이란 이유 때문이었어요. 즉 전 황제의 친족이란 뜻이죠. 전 황제에게 딸이 있기는 했지만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건대 머잖아 암살을 당할 것 같으니까 신경 쓸 가치도 없어요. 물론 그 딸이 시집을 가 자식을 낳기는 했지만 부모가 암살을 당하고 성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으니까 신경 쓸 이유도 없겠죠. 그런데 느닷없이 성에 틀어박혀 있던 녀석이 대공이 돼 차원수리공을 지휘하여 문 대륙으로 간다는 거예요.”
“저 같으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게 질문이군요.”
“그래요.”
“저 같으면 더 자라기 전에 제거하겠습니다.”
“그렇군.”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마셨다.
“그가 범인이라고 생각하세요?”
듣고 있던 알마니가 물었다.
“넬, 라이드, 솔트, 릭 아저씨가 이곳에 없었다면 그를 의심하지 않았을 거야.”
“마스터 어머니를 호위했던 그분들이 세력을 만들자 마스터를 위한 안배라고 생각한 거군요.”
“처음엔 몰랐을 거야.”
“누군가에게 들었을 거란 말이에요?”
“들은 게 아니라 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신분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내가 튀어나왔을 거야.”
“일리가 있는 말이네요.”
알마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력을 규합한 전 황제 딸의 호위들. 그리고 대공으로 임명된 전 황제의 외손자.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아직은 확실한 건 아니니까 단정 짓지는 말아. 그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