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
김필도는 데푸시를 보았다.
“왜 그러쇼?”
“전투기갑이 없는 거냐, 아니면 압수당한 거냐?”
지금껏 단 한 번도 전투기갑을 착용한 적이 없어서 하는 말이었다.
“없을 리가 있겠소.”
“그런데?”
“후자요.”
“압수당했다고?”
“네.”
“너는?”
이번엔 이프리스를 보았다.
“나도 마찬가지요. 숲의 전사단 단장직을 맡기 전까진 전투기갑을 줄 수 없다는 말만 들었소.”
“숲의 전사단은 뭔데?”
“모든 부족의 전사들이 모여서 만든 전사단이오.”
“상당히 높은 자리인 것 같은데 싫어?”
“형님도 그 자리에 앉아 보쇼. 반년도 못 버티고 뛰쳐나가 버릴 거요.”
“그렇게 힘든 자리냐?”
“아침 다섯 시에 기상, 여섯 시에 아침 점호, 일곱 시에 식사, 여덟 시부터 열 시까지 연공, 열두 시까지 부하들 교육, 열세 시까지 점심 식사, 열다섯 시까지 부하들 교육, 열일곱 시까지 개인 연공, 열아홉 시까지 부족장들과 만찬…….”
이프리스는 단장의 하루 스케줄을 좍 읊었다.
“정말 그걸 다 해?”
“약간씩 변화는 있기는 하지만 방금 내가 말한 틀을 벗어나진 않소.”
“힘들긴 하겠다.”
“저놈과 내가 돌아가지 않은 이유를 이제 알겠소?”
“너희가 바꾸면 안 돼?”
“네?”
이프리스는 멀뚱한 얼굴로 김필도를 보았다.
“단장이면 조직의 보스를 말하잖아. 보스란 규율을 바꾸는 권한이 있는 자를 말하는 거야. 그런 권한이 없다면 보스라고 할 수가 없잖아.”
“그런 방법이 있었네요.”
이프리스는 히죽 웃었다. 그렇게 좋은 방법을 놔두고 그동안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원들을 거느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냐. 어떤 조직을 만들 건지에 대해서는 많은 공부가 필요해.”
“아무래도 연구를 좀 해야겠습니다.”
이프리스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피곤할 텐데 한숨들 자.”
김필도는 찻잔을 알마니에게 건네고, 깔아 놓은 요로 가 누웠다. 그는 거짓말처럼 바로 잠이 들었다.
“아무튼 잠은 귀신처럼 빨리 들어.”
알마니는 졌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불을 덮어 주었다.
“우리도 자자.”
데푸시 또한 졸린 듯 요 위로 몸을 던졌다. 그동안 쌓인 피로가 급격하게 밀려왔다.
“얼마 만에 자는 건지 모르겠네.”
이프리스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는 재빨리 데푸시 옆으로 누웠다.
그들이 잠드는 속도는 김필도 못지않았다. 2분도 지나지 않아 코고는 소리가 둘의 코에서 흘러나왔다.
그렇게 천막 안에는 다란과 알마니 두 사람만 남았다. 두 사람은 말없이 차만 홀짝였다.
“피곤하지 않는가?”
“각성을 이룬 뒤로는 피곤함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요.”
“조금 전에 모닥불 가에 앉아 있어서 그럴 거네.”
“세다크의 피로를 풀어주는 매개체는 불이라는 말이군요.”
“몰랐는가?”
“짐작만 하고 있었을 뿐 경험한 적은 없어요.”
“불이 강하면 강할수록 세다크의 피로는 빨리 풀리고, 좋은 불을 흡수하게 되면 점점 강해진다네.”
“흡수한다는 건 어떤 의미죠?”
“말 그대로 솜이 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흡수하는 거라네. 불 속에 앉아서 흡수할 수도 있고, 손을 집어넣어서도 흡수할 수가 있네.”
“그럼 좋은 불이란 어떤 걸 말하죠?”
“신성하고 오래된 나무를 태울 때 나오는 불이라네.”
“원래 세다크였어요?”
문득 몇 개월 동안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란과 라헤나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몰랐는가?”
“정말 세다크라고요?”
자기가 질문을 해 놓고 알마니는 깜짝 놀랐다. 다란에게서는 불의 기운이 전혀 감지되지 않았던 것이다.
“불의 정령왕 셀리어스님의 수신호위였네.”
“그런데 왜 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거죠?”
“어떤 경지를 넘어서면 물, 불, 바람, 대지가 하나로 합일 되면서 아무 기운도 흘리지 않게 된다네.”
“그런 경지도 있어요?”
“이건 내 의지가 발현됐을 때네.”
다란은 오른손을 내밀었다.
“헉!”
알마니는 깜짝 놀랐다.
앞으로 내민 다란의 손에서 가공할 열기가 흘러나왔다. 그 열기가 얼마나 강한지 순식간에 천막 안이 후끈하게 달궈졌다.
하지만 알마니의 놀라움은 시작에 불과했다.
다란의 손이 점점 뜨거워지더니 시뻘겋게 변해 가는 것이었다.
“세상에!”
알마니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란의 손은 불속에 넣고 달군 쇠처럼 시뻘겋게 변한 채 가공할 열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저, 저도 그렇게 할 수 있나요?”
“부단하게 노력하면 자네도 가능할 거네.”
다란은 빙그레 웃으며 힘을 거둬들였다.
“이왕 끌어올린 거 바위나 몇 개 달궈놓죠.”
김필도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다란은 고개를 돌렸다.
“안 주무셨습니까?”
“추워서 깼어요.”
“따뜻하게 데워놓겠습니다.”
다란은 아공간을 열더니 쇠뭉치 다섯 개를 꺼냈다. 그리고 손바닥을 붙이고 힘을 끌어 올렸다. 쇠뭉치는 금세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쇠뭉치 다섯 개 전부를 시뻘겋게 달구자 천막 안은 후끈한 열기로 들어찼다.
“고마워요.”
김필도는 빙그레 웃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그는 금세 잠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 * *
일단의 무리가 마족과 천족의 진영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어둠을 이용해서 은밀하게 이동 중인 이들은 신의 정원 정원사들이었다. 거의 1천에 가까운 대규모 병력이 이동 중이었지만 소리는 거의 흘러나오지 않았다.
휙!
앞서가던 자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뒤따르던 자들이 도미노처럼 그 자리에 멈추며 자세를 낮췄다. 그늘과 동화돼 거의 구분할 수 없는 이들은 대륙3상의 한 곳인 죽음의 상단 다르들이었다.
“무슨 일이냐?”
왜소한 체구의 중년인이 전면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 사람은 죽음의 상단 상단주 체로키였다.
“5백 미터 전방에 천막이 있습니다.”
나직한 대답이 돌아왔다.
“규모는?”
“천막은 50동 정도고 높이는 4미터 정도입니다.”
“헬파이!”
“말씀하십시오, 가주님.”
“정찰을 실시하라. 그리고 베칼리오 후작에게 이곳 상황을 알려라.”
“알겠습니다, 가주님.”
건장한 사내 한 명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죽음의 상단 다르 조직인 데무의 수장 헬파이였다.
헬파이가 선두로 나가고 죽음의 상단 다르 십여 명이 전방으로 나아갔다. 섀도 기능을 활성화시킨 다르들의 모습은 어둠 속으로 완전하게 녹아들어 갔다.
정찰을 나간 다르들이 돌아온 건 30분 후였다.
“이상합니다.”
보고하러 온 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첫 마디였다.
“무슨 일이냐?”
“오른편에 있는 자들은 마족이고 왼편에 있는 자들은 천족입니다. 그리고 양 진영 중앙에 낮은 천막이 한 동 있습니다.”
“마족과 천족이 한 곳에 모여 있단 말이냐?”
헬파이의 보고에 체로키는 고개를 갸웃했다.
마족과 천족은 얼마 전만 해도 서로에게 칼을 겨누고 전쟁을 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함께 진영을 구축하고 있다니. 부하가 잘못 보지 않았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확실합니다.”
“가 보자.”
체로키는 전방으로 나아갔다. 직접 확인을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잠시 후 체로키와 그의 부하들은 김필도 일행이 천막을 친 장소로부터 1백 미터 떨어진 지점에 도착했다.
“왼편의 황금색 천막은 천족이고 오른편의 검은색 천막은 마족입니다. 경계를 서는 자들도 있습니다.”
헬파이는 전방을 가리키며 속삭였다.
체로키는 눈을 가늘게 모았다. 헬파이의 말 대로였다. 황금색 천막 근처에는 천족들이 나와 경계를 서고 있고, 검은색 천막 앞에는 마족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저건 뭐라고 생각하나?”
체로키는 양측 진영 사이에 세워져 있는 작은 천막을 가리켰다.
“천막 안에 있는 자가 인간이란 뜻입니다.”
“대공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공이 아니면 마족과 천족이 한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천족이나 마족이 이곳 라파까지 온 이유가 바로 대공 때문이 아니던가?
“하지만 저런 진영을 구축하고 있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대공을 제압한 상황이라면 싸움을 해서 승부를 가리면 그만이다. 그런데 저들은 싸우지 않고 진영을 구축한 채 서로를 감시하고만 있다.
“공동의 적 때문이 아닐까?”
“공동의 적이라면…… 이곳 땅속에 있다는 노르카를 말하는 겁니까?”
“이곳에서 서로 싸우게 되면 상잔밖에 없지 않느냐.”
“그러니까 일단 숲을 벗어난 다음에 승부를 가리기로 하고 휴전을 한 상태라는 거군요.”
“그렇지.”
“하면 저들은 일촉즉발의 상황이겠군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헬파이. 저놈들은 대공 때문에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을 테고, 아주 사소한 거라 할지라도 어떤 계기만 주어지면 바로 싸움으로 번지게 될 거다.”
“우리가 그 계기를 만들어주면 된다는 거군요.”
“맞다. 굳이 놈들과 전투를 치를 필요가 없다. 양 진영이 혼란스러워지면 루시안 그놈은 탈출을 시도할 테고 우린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놈을 잡으면 된다.”
체로키가 천족과 마족의 상황을 정리한 이유가 바로 이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최강이라 자부하는 다르라고 하지만 상대는 천족과 마족.
부담이 가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공격 명령을 내리면 다르들은 망설이게 될 테고, 망설임은 곧 패배로 돌아오게 된다. 지금 상황에서 다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성공에 대한 자신감이다.
체로키는 그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 천족과 마족의 대치 상황을 아군에게 유리하게 정리를 한 것이었다.
“놈을 잡은 다음에는 어떻게 합니까?”
“바로 철수해야지.”
“그렇군요.”
헬파이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떠올랐다.
“일단 주위를 포위하고, 데무를 이곳으로 집합시켜라!”
“알겠습니다, 가주님.”
헬파이는 고개를 숙이고는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로부터 20분 후, 다르 삼백여 명이 체로키 뒤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죽음의 상단 소속 다르 중 최강의 전사로, 데무라 부르는 자들이었다.
데무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천천히 주위를 잠식해 들어갔다.
“준비됐느냐?”
체로키는 낮게 물었다.
척!
데무들은 손을 가슴에 대며 의사 표시를 했다.
“두 줄로 선 채로 치고 나간다!”
척!
데무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가라!”
파앗! 파앗! 파앗! 파앗!
체로키의 명령이 떨어지자 데무들은 마족과 천족 진영으로 몸을 날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