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187화 (187/225)

# 187

이카렌의 검에서는 화염의 기운이 쏟아져 나오고, 하라미의 검에서는 사람을 순식간에 얼음 조각으로 만드는 한기가 쏟아져 나왔다. 두 여자가 검으로 겨냥하는 순간 가루로 변한 다르와 얼음조각으로 부서지는 다르 수십 명이 생겨났다.

데무들보다 거의 두 배나 많은 수가 들어왔지만 전투는 더 싱겁게 빨리 끝났다.

“록!”

김필도는 밖을 향해 소리쳤다.

“말하게.”

“몇 명이나 남았소?”

“200여 명 정도요.”

“지금부터는 대형을 풀고 공격하도록 하시오.”

“알았네.”

“마계10군단은 대형을 풀고 공격하라! 두당 한 명씩만 맡아라.”

“대천신군은 대형을 풀고 공격하라! 각자 한 명씩만 맡아라!”

“해산하라!”

“차앗!”

“타앗!”

“이야합!”

마족과 천족은 일제히 흩어지면서 죽음의 상단 다르를 공격했다. 병력의 수가 4배였을 때도 상대가 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더 적은 상황. 전투가 지속될 수 없었다.

싸움은 금세 끝이 났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죽음의 상단 가주인 체로키만 보이지 않았다.

“헉! 헉헉!”

체로키는 연신 뒤를 돌아보며 내달렸다. 그는 지금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안과 밖에서 공격하면 승산이 있다고 여겼고 출발도 좋았다.

그런데 400명이 안으로 파고들어 갔는데도 적의 대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순간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 자리에 남아 있으면 개죽음밖에 없다는 걸 깨닫고 급하게 자리를 떴다.

척!

자리에 멈춰 선 체로키는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손바닥 크기의 그것은 이곳에 펼쳐진 마법과는 상관없이 방향을 알려주는 마법 나침반이었다.

쐐액!

바로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차가운 소성이 흘러나왔다.

“헉!”

체로키는 황망히 왼손을 거둬들였다. 섬뜩한 뭔가가 왼손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움직임보다 섬뜩한 기운이 더 빨랐다.

스악!

툭!

“악!”

체로키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새하얀 광채가 팔목에서 터져 나오더니 잘려나간 팔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었다.

갓 잡아 올린 물고기처럼 팔딱팔딱 뛰고 있는 팔은 마법 나침반을 꼭 틀어쥐고 있었다.

체로키는 검으로 심장을 방어하며 급하게 물러났다.

“10인 위원회 위원은 지혈을 하지 않아도 생명엔 지장이 없나 보지?”

허공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김필도였다.

“네놈은?”

“루시안이야.”

“으음!”

체로키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서둘러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는데 꼬리를 잡힌 모양이었다.

체로키는 재빨리 김필도 주위를 살폈다. 일행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검을 들어 올렸다.

파앗!

체로키의 검이 멈추는 순간 김필도의 신형이 공간을 갈랐다.

스악!

그리고 오른편 허리춤에 있던 단도가 허공을 갈랐다.

“불출하는 용암의 뜨거움! 내 의지에 답하라! 볼케이노!”

체로키는 김필도를 향해 마법을 펼쳤다. 그가 들고 있는 무기는 검처럼 보이지만 실은 마법 지팡이였다.

“……?”

체로키는 의아했다.

주문을 외웠으니 마법 지팡이로 마나가 모여들고 마법 펼칠 준비가 끝나야 한다. 그럼 상대를 향해 마법 지팡이를 겨냥하면 마법이 펼쳐진다. 그런데 마나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방금 잘렸거든.”

김필도는 떨어져 있는 체로키의 팔에서 마법 나침반을 뽑아냈다.

“잘렸다고?”

체로키는 움찔했다.

툭!

그러자 앞으로 내밀고 있던 오른손이 지면으로 떨어졌다.

츄악!

잘린 동맥으로부터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아악!”

이제야 고통이 밀려오는 듯 체로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김필도는 체로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팔에서 흘러나온 핏줄기가 약해질 즈음 체로키 앞으로 다가갔다.

“몇 가지 알고 싶은 게 있는데, 가능할까?”

“내게서 뭔가를 알아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다, 대공.”

“너도 헤이먼 그놈과 같은 말을 하는구나.”

“헤이먼도 네가 죽였느냐?”

“그놈도 처음엔 너처럼 그랬어. 그러다가 신의 정원에 있는 가족들을 언급하니까 술술 불더라고. 시간이 더 있었으면 더 많은 것을 알아냈을 텐데, 출혈과다로 죽어버리고 말았어. 불행히도 그놈은 제 가족을 살릴 기회를 잃고 말았지 뭐야.”

부르르!

체로키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김필도의 목소리는 지극히 차분하다. 하지만 그 차분함 속에는 섬뜩한 기운이 숨어 있었다.

“내, 내 가족을 살해하겠단 말이오?”

체로키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희도 내 아버지와 엄마를 살해했잖아.”

“그건 내 뜻이 아니었소. 아론 위원장과 헤이먼 위원의 뜻이었소.”

“암묵적 동의라는 말 알아?”

“반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소, 대공. 제발 살려주시오. 난 여기서 죽어도 좋으니까 내 가족은 살려주시오.”

체로키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잘려나가고 없는 두 팔을 비비며 애원했다.

“지금부터 질문을 할 거야. 내 질문이 끝나기 전에 죽거나 대답을 못하는 게 있으면 죽음의 상단에 속해 있는 자들은 전부 죽게 될 거야. 약속할게. 개 한 마리 남기지 않고 전부 없애버릴 거라고.”

“지, 질문하시오.”

“먼저 10인 위원회에 대해 알고 싶어.”

“마, 말하겠소. 위원장은 아론 드반드쉬 카이제 이클라우스고 나이는 모르오. 그리고 10인 위원으로는…….”

체로키는 10인 위원회에 대해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걸 털어놓았다.

“혹시 드반 족이라고 알아?”

“모르오.”

“진짜 몰라?”

“정말 모르오. 믿어주시오.”

“좋아 믿어줄게. 그럼 지금부터는 10인 위원회 위원들의 가족에 대해서 알고 싶어.”

“내가 알고 있는 건 전부 말하겠소.”

체로키의 말이 빨라졌다. 피가 빠져나가면서 머릿속이 몽롱해져 오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빨라서 알아들을 수가 없잖아. 좀 천천히 해.”

“아, 알았소.”

체로키는 10인 위원회 위원들의 가족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그의 이야기는 거의 30분 동안 이어졌다.

“헤이먼 그놈은 여기까지 말하고 죽었는데, 넌 아직 살아 있네?”

“질문은 끝난 거요?”

“아냐, 아직 남았어.”

“어서 하시오.”

“신의 정원이 있는 위치를 알고 싶어. 대륙3상이 있는 그곳 말고 위원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장소 말이야.”

“라팔과 라비아 경계에 있는 가드 마운틴 정상에 있소이다.”

“내 집 밑에 있었네? 아니 산꼭대기에 있으니까 윈가?”

김필도는 피식 웃었다.

가드 마운틴은 대륙 최남단의 라팔 지역과 루나가 있는 라비아 지역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라팔 산맥의 최고봉이다.

최고 1만 미터 높이 때문에 가드 마운틴이라는 이름을 얻은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곳에 신의 정원을 만들면서 산의 이름을 정한 것이었다.

“그곳에는 누가 있지?”

“신의 정원을 관리하는 정원사들이 있소. 그들의 이름은 퍼, 퍼니셔요.”

“몇 명이나 되는데?”

쿠웅!

대답 대신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김필도는 고개를 숙였다.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을 한 체로키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직 질문할 게 남았는데 어떡하지?”

김필도는 체로키를 내려다보았다.

“내 가, 가족을…….”

“넌 내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어, 체로키. 너희 가족은 전부 죽을 거야. 너보다 더 처참하게.”

김필도는 차갑게 말하며 체로키의 머리에 발을 올렸다. 그러고는 사정없이 밟았다.

퍽!

10인 위원회 위원 중 두 번째 사망자였다.

“잔인해졌네.”

어둠 속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더니 커다란 덩치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이카렌이었다.

“신은 이렇게 죽이지 않으면 다시 살아날 수도 있거든.”

“그자가 신이야?”

“인간이 휴도니아 대륙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대를 이어 신으로 군림했던 자들이야.”

“신의 자리도 상속되나 보지?”

“그런 모양이야. 걱정이 돼서 온 거야?”

“넌 무모한 사람이잖아.”

“내가 무모하다고?”

“전엔 목숨 걸고 모험을 많이 했잖아.”

“저놈은 목숨을 걸 만한 가치도 없는 놈이라고. 아무튼 따라와 줘서 고마워.”

“내가 네게 해 준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이카렌 네게 준 건 내겐 쓸모없는 것들이었어. 전혀 부담 갖지 않아도 돼.”

“이 검이나 맹약의 구슬 말고.”

“그럼?”

“그분 말이야.”

“그분이 누군데?”

“그분은 ‘단 한 번의 짧은 만남을 끝으로, 1천 년 동안 그리움을 안고 살아야 한다고 해도, 나는 한순간의 짧은 만남을 선택하겠다는’ 그런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야.”

“그 양반 입이 가볍네. 아무 소리 안 하겠다고 하더니.”

“그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그럼 그 말을 내가 해 주었다는 걸 어떻게 아는데?”

“그분이 이걸 주더라.”

이카렌은 품속에서 푸른 액체가 들어 있는 손가락 크기의 병을 꺼내 보여주었다. 그것은 김필도가 히데우스에게 주었던 포션이었다.

“전부 마시랬더니 그것도 남겼네.”

김필도는 피식 웃었다.

“이것도 줬어.”

이카렌은 왼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왼손 약지에는 검은색 보석이 박힌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반지의 형태는 달랐지만 검은색 보석은 오테르의 인장과 비슷했다.

“그분의 어머님이 끼셨던 반지래.”

“그랬구나. 가시는 길은 편안하셨어?”

“응! 웃으면서 가셨어.”

“다행이네.”

“그런데…….”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하라미 언니하곤 어떻게 된 거지?”

“알몸을 봤다고 막무가내로 책임지라던데?”

“정말?”

“응! 천족의 풍습이라면서. 책임지기 싫으면 목을 치래.”

“그러게 왜 알몸은 봐.”

“내가 보고 싶어서 봤니.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호수에 빠진 하라미를 살리는 과정에서 옷이 얼음조각으로 부서져 내린 걸 낸들 어떻게 하라고.”

“그렇게 된 거였어?”

“난 목숨을 구해준 죄밖에 없어. 그리고 그녀는 내 스타일도 아냐.”

“예쁘게 생겼잖아. 몸매도 훌륭하고.”

“그거야 천족이나 마족이 봤을 때 이야기고. 키 185센티미터의 인간이 봤을 땐, 미인이거나 뛰어난 몸매를 가진 건 아냐.”

“풋! 하라미 언니는 네가 진짜 마음에 들었나 보다.”

“마음에 든 게 아니라 호기심일 거야.”

“무슨 호기심?”

“왜? 만날 같은 음식을 먹다 보면 물리잖아.”

“그러니까 네 말은 타 종족에 대한 호기심으로 너와 잤다 이거야?”

“네 말처럼 얼굴 예쁘고 몸매 죽이는 여자가 뭐가 아쉬워서 자기보다 1미터20센티미터나 작은 남자와 사귀겠냐? 마족이나 천족 중에서 멋있는 남자를 만나면 나 같은 사람은 금세 잊을 거야.”

“자기를 너무 비약하는 거 아냐?”

“비약이 아니라 나도 그렇게 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헤어질 거면서 맹약의 구슬하고 잊힌 전설의 검은 왜 준 건데?”

“오죽 못났으면 부하들에게 배신을 당했겠냐. 불쌍해서 준 거지 뭐. 그리고 유드카의 구슬은 준 게 아니고 하라미가 빵인 줄 알고 먹은 거야.”

“나와 비슷한 경우였네?”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뭐.”

“그래도 네 행동엔 문제가 있었어.”

“무슨 문제?”

“그런 대단한 것들을 주면 여자는 이 남자가 자기를 좋아해서 그런 걸로 착각한단 말이야.”

“넌 안 그랬잖아.”

“나?”

“네게도 구슬하고 검을 줬잖아.”

“나도 그랬는걸!”

“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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