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188화 (188/225)

# 188

김필도는 깜짝 놀란 얼굴로 이카렌을 보았다.

사실 김필도가 이카렌과 하라미에게 선물을 준 건 필녀 때문이었다. 아무런 힘도 없이 죽임을 당했던 필녀의 모습과 부하들에게마저 인정을 받지 못하고 핍박을 당하는 이카렌과 하라미의 모습이 오버랩 되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녀들에게 잘해 주었던 것이다.

게다가 맹약의 구슬이나 검은 딱히 그에게 필요도 없는 것들이었다. 돈이 없을 때 같았으면 팔아볼 궁리를 했겠지만 수백만 냥을 호가하는 신의 눈물은 아직 40여 병이나 남아 있다. 그리고 샤일록에게 투자한 사업도 승승장구한다. 굳이 돈을 더 벌려고 아등바등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인심이나 쓰자는 생각에 부담 없이 주었는데 그게 오해를 불러온 모양이었다.

“넌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잖아.”

“그래서 대시를 하지 않았던 거야.”

“대시?”

“인간들과 달리 천족이나 마족은 좋아하는 쪽이 먼저 고백을 하고 상대가 좋다면 만나기 시작해.”

“지금은 어때?”

“지금?”

“그분 무덤에 흙도 안 말랐는데 너무 이른가?”

“호호호! 너 말 재미있게 한다. 우리 마족 사회에서는 남편이 죽은 후에 재혼을 하는 건 흠이 아냐. 오히려 전 남편과 사이가 좋았던 여자일수록 재혼을 빨리 한다는 속설이 있어. 다만 그 집안에서 허락했을 때만.”

“그 집안에서 허락해야 한다는 건 무슨 소리지?”

“남편을 잃은 여자는, 우선적으로 남편 집안의 남자와 재혼을 해야 해.”

“도련님하고 결혼을 해야 한다고?”

문득 어린 시절 역사 시간에 배웠던 형사취수혼이 떠올랐다.

“여자 혼자 자식을 키울 수 있는 그런 사회가 아니잖아. 재산이 없는 여자를 받아줄 남자도 거의 없고.”

“싫든 좋든 남자 집안에서 책임을 지라는 말이네.”

“좋게 말하면 그렇지.”

“그럼 넌 어떻게 되는 거지?”

“남편이 죽었으니까 가주님의 처신에 따라야지.”

“가주님?”

“오테르 가문의 가주님 말이야.”

“나?”

김필도는 자신을 가리켰다.

“아까 오테르 가문의 가주라고 했잖아.”

“그럼 나 맞네.”

김필도는 픽 웃었다.

하라미도 그렇고 이카렌도. 일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엔 별로 인기 없었는데.”

김필도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넌 인기 많게 생긴 얼굴은 아냐.”

“그럼?”

“사람 좋게 생겼고,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상대방을 감동시키는 재주를 가졌어.”

아마도 그 주위로 사람이 모여드는 이유가 그런 그의 성정 때문이지 싶다. 그는 먼저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니까.

하지만 은혜를 입은 많은 이들은 그에게 신뢰를 선물로 준다. 그녀가 그랬고, 라이자칸이 그랬고 하라미가 그랬다.

“그런 거라도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네.”

“다행인 정도가 아니라 커다란 장점이야.”

“그럴까?”

“날 믿어.”

이카렌은 김필도의 어깨를 툭 쳤다.

“멈춰!”

김필도는 이카렌을 자신의 뒤로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재빨리 아공간을 열어 헬칸을 꺼내고 헤를리온을 소환했다.

“왜 그래?”

이카렌은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전투기갑 입어.”

“아, 알았어.”

이카렌은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군단장님!”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일단의 무리가 두 사람 앞에 나타났다.

김필도는 차분한 얼굴로 전면을 바라보았다.

나타난 자들은 마족이었는데 한두 명이 아니었다. 전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았다.

“누군가?”

김필도는 물었다.

“저는 마계10군단 제4부군단장 발카모입니다.”

“저는 마계10군단 제5부군단장 우데습니다.”

그들은 헤를리온을 회수하기 위해 나온 마계10군단 대원들이었다.

“우릴 막아선 이유는?”

“저를 비롯한 이곳에 있는 이들이 마계10군단으로 들어간 이유는 히데우스님을 존경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온 이유도 히데우스님께서 남기신 헬칸을 회수하러 왔고요. 데메우스는 루시안님이 히데우스님의 유체로부터 헬칸을 탈취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아니면 뭐란 말인가?”

“루시안님은 마족의 검술을 익혔을 뿐 아니라 히데우스 가문의 신물인 오테르의 인장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건 곧 히데우스님의 정식 후계자란 의미가 됩니다.”

“마족의 검술은 배울 수도 있고, 오테르 인장 또한 헬칸을 훔칠 때 함께 훔칠 수도 있다는 건 생각해 보지 않았는가?”

“만일 그랬더라면 이카렌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셨겠지요.”

“이카렌 때문에 내 앞에 나타났단 말인가?”

“아마도 루시안님이 오테르 가문의 가주임을 인정하지 않으셨으면 나타나지 않았을 겁니다.”

발카모와 우데스 그리고 마계10군단 소속 전사 350여 명은 이곳에서 김필도를 보고 그가 헬칸을 훔친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혼자서 천족 백여 명을 없앨 수 있는 실력자가 굳이 죽은 시신으로부터 검을 훔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데메우스에게 속았다는 걸 깨달았다.

속았다는 걸 알았지만 임무를 중지하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때부터 고민이 시작됐다. 히데우스를 동경하고, 존경하여 들어온 곳이 마계10군단이다.

히데우스의 흔적이 없는 마계10군단이라면 굳이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마계로 돌아가 전처럼 떠돌이 전사로 살아가야 하는지 내심 고민하던 차에 놀라운 자들을 보게 됐다.

그들은 다름 아닌 마계를 탈출하여 문 대륙으로 갔던 이카렌을 비롯한 전대 마계10군단 대원들이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 숨어 그들이 루시안을 오테르 가문의 가주로 인정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고민을 훌훌 날려버렸다.

드디어 가야 할 길이 정해진 것이었다.

“날 따르겠단 말인가?”

“받아주시면 따르겠습니다.”

“따르겠습니다!”

발카모와 우데스는 고개를 숙였다.

“따르겠습니다.”

이어 350여 명의 마족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소리쳤다.

김필도는 이카렌을 보았다.

“저들은 인간을 상전으로 모신 최초의 마족이 될 거야. 참고로 많은 마족들은 인간을 하등 종족으로 여겨.”

그녀의 말은 인간을 주인으로 모시겠다는 결심은 곤란한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서나, 한두 번의 고민으로 결정할 사항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최소한 마족 사회에서 매장될 각오를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받아줘도 상관없다고?”

“오테르 가문에는 나와 너 둘뿐이야.”

“그럼 저들은 오테르 가문의 첫 번째 가솔이 되는 건가?”

김필도는 헤를리온을 해제하며 물었다.

“오테르 가문이 아니라 프리우스오테르지.”

“들었소?”

김필도는 발카모 일행을 보며 물었다.

“들었습니다, 가주님!”

마족들은 이번엔 허리를 90도로 꺾었다.

“반갑다, 발카모. 난 루시안이다.”

김필도는 발카모 앞으로 다가가서 악수를 청했다.

“발카몹니다, 가주님.”

“성은?”

“없습니다.”

“좋군.”

김필도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성이 없다는 건 기득권층에 끼어본 적이 없다는 뜻이고 그런 자들일수록 잘만 다루면 충성심이 강해진다.

조직이나 가문을 세울 때 가장 필요한 자들이다.

그는 우데스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 우데습니다.”

“반갑다, 우데스. 난 루시안이다.”

김필도는 손을 내밀었다.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가주님.”

“나도 영광이다, 우데스.”

김필도는 빙그레 웃으며 자리를 옮겼다.

그 후로도 김필도는 350번의 악수를 하고 같은 수만큼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 마족과 인사를 마친 그는 선두로 나왔다.

그는 부동자세로 서 있는 마족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내가 가진 건 이 검과 전투기갑과 제군들도 달고 있는 불알 두 쪽이 전부다!”

“풋!”

“훗!”

여기저기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불알 두 쪽’이란 말 때문이었다.

‘아무튼 저 자식은?’

이카렌 또한 다르지 않았다. 처음으로 부하를 받아들이는 엄숙한 자리에서 할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어?’

이카렌은 깜짝 놀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런데 갑자기 훈훈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랬구나.’

이카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리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 말이 김필도와 마족 간의 거리를 없애주는 역할을 한 것이었다. 지금 상황을 노리고 의도적으로 한 말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배운 건 격투기였다. 격투기를 배운 이유는 나보다 크고 힘이 센 녀석들에게 맞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두 번째로 배운 건 훔치는 기술이다. 훔치는 기술을 배운 건 먹고살기 위해서였다.”

김필도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헉!”

“어?”

“헐!”

마족들 사이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들은 재빨리 자신들의 품속을 더듬었다.

“언제……?”

마족들은 넋을 잃었다. 단지 악수를 하고 몇 마디 나눴을 뿐이다. 그런데 품속에 있던 물건이 사라진 것이었다. 훔치는 기술을 배웠다는 건 거짓이 아니었다.

“그리고 세 번째 배운 건 이거다.”

김필도는 단도를 뽑아 돌리기 시작했다. 날이 바싹 선 단도는 그의 양손에서 곡예를 했다. 손등을 타고 돌고 손가락 사이로 넘나들었다.

척!

한동안 그의 양손을 넘나들던 단도는 다시 본래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상태에서 시작했고, 이 자리까지 왔다. 나는 단 한 번도 실패를 두려워한 적이 없다. 왜냐면…….”

김필도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다시 마족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설사 실패한다고 해도 잃을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제군들은 그렇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가주님!”

우렁차게 소리치는 마족들의 얼굴에 열기가 어렸다.

“함께 가 보는 거다, 제군들. 저 끝에, 우리가 달려가는 곳에 뭐가 있는지 가 보는 거다. 그래서 확인하는 거다. 그곳에 영광이 기다리고 있으면 취하면 되고, 낭떠러지가 있으면 기꺼이 뛰어내려 주면 된다. 그리고 한바탕 웃어 주는 거다. 크게 웃어 주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겠는가?”

“하겠습니다, 가주님!”

“좋다, 제군들. 제군들은 지금 이 순간부터 프리우스오테르 가문의 가신들이다!”

“영광입니다, 가주님!”

마족들은 고개를 숙였다.

“이동한다!”

김필도는 몸을 돌렸다.

곧 마족들은 김필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가주님!”

발카모가 김필도 곁으로 다가갔다.

“응.”

“숲을 정찰하다가 인간 전사들을 보았습니다.”

“규모는 얼마나 되는데?”

“2천여 명입니다.”

“2천 명?”

“네.”

“크로네.”

김필도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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