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
제6장 증발
베칼리오 후작은 통신 마법구를 노려보았다. 일반 마법 통신구로는 연락이 불가능하지만 그가 지닌 통신 마법구는 이곳에서도 통신이 가능하도록 특수 제작된 기구였다. 그가 기다리는 소식은 죽음의 상단과 마족과 천족의 특이한 조합의 전투 결과였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마법 통신구는 활성화되지 않았다.
“이곳에서 얼마나 떨어진 곳이라고 했나?”
베칼리오 후작은 마법 통신구 앞을 지키고 있는 부관 포트 남작을 향해 물었다.
“5킬로미터가량 떨어져 있습니다.”
“5킬로미터라…….”
베칼리오 후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가 연락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움직이지 않았던 이유는 밤이기 때문이었다.
마법 나침반이 있고, 1킬로미터 외각에서 활동하는 노르카가 같은 편이긴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어둔 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다.
사소한 실수가 대형 참사를 불러오는 것처럼 조심해서 나쁠 게 없다는 게 베칼리오 후작의 생각이었다.
“그들이 당하게 되면 신의 정원과 협력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단장님.”
심각한 얼굴로 말을 하고 있는 이자는 크로의 부단장 샘 안드레이 백작이었다.
“체로키 가주는 공격할지 말지를 물어온 게 아니라 공격할 거라고 통보를 해 왔네, 샘.”
“그들이 당한다고 해도 우린 책임이 아니란 말이군요.”
“당연히 아니지.”
불완전한 협력의 말로였다.
만일 정말로 같은 편이었다면 체로키 일행을 지원하기 위해 출발했을 것이다. 하지만 베칼리오 후작은 마법 나침반을 신뢰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크로가 주둔한 장소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죽음의 상단 다르에게 당하지 않았다면 놈들은 숲을 벗어나려 할 테고, 그럼 노르카의 공격을 받게 될 거네. 노르카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원래 자리로 들어올 때 우리는 공격을 시작할 거네.”
“조장들에게도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단장님!”
슈욱!
바로 그때 어디선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칼리오 후작은 안드레이 백작을 보았다.
“화살 소리 같습니다.”
“화살 소리치곤 좀 큰 거 아닌가?”
“그렇긴 한데…….”
“불이다, 불이 났다!”
“응?”
베칼리오 후작은 벌떡 일어나 천막을 나섰다.
슉! 슉슉슉! 슉슉슉!
휘이익!
하늘에서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수백 대의 불화살이 날아오더니 계곡 곳곳으로 떨어졌다. 메마른 풀포기들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잠시 후 크로 대원 2천여 명이 머물고 있는 계곡은 대낮처럼 환해졌다. 계곡이 환해지면서 주위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저들은?”
베칼리오 후작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지금 있는 곳은 들어오는 입구 20여 미터를 제외한 나머지 삼면이 2백여 미터 높이의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그 절벽 위에 검은색 전투기갑을 걸친 자들이 조각상처럼 늘어서 있었다. 그들은 인간의 키보다 더 큰 활로 이편을 겨냥한 채였다.
“적입니다, 단장님!”
“마족입니다 단장님!”
절벽 위를 살피던 대원들이 고함을 내질렀다.
슈악! 쇄애액! 슈악!
퍽! 퍽! 퍽퍽퍽! 퍽퍽퍽퍽!
“크악!”
“아악!”
“으아악!”
사방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경황 중에 기습을 당하자 미처 전투기갑을 착용하지 못한 대원들이 마족이 쏘는 화살에 맞아 죽임을 당했다.
“전투기갑을 걸쳐라! 대원들은 전투기갑을 걸쳐라!”
베칼리오 후작은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그의 얼굴엔 당혹한 기색이 역력했다. 적과의 거리는 5킬로미터 떨어져 있었고, 죽음의 상단과 전투 중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기습을 해 온 것이었다.
더구나 적의 수 또한 헬파이로부터 들은 것보다 훨씬 많았다.
“크악!”
“아악!”
“으악!”
전투기갑을 걸치는 와중에도 크로 대원들은 계속 죽어나갔다.
“저, 전투기갑이 뚫렸습니다. 화살이 전투기갑을…… 크악!”
베칼리오 후작을 향해 보고를 하던 대원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전투기갑이 뚫리다니 무슨 소리냐?”
퍽! 퍽퍽! 퍽퍽퍽! 퍽퍽!
“크악!”
“으악!”
“아악!”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베칼리오 후작 20미터 전방에서 크로 대여섯 명이 처절한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그들의 심장에는 1미터 길이의 커다란 화살이 박혀 있었다.
“어떻게…….”
베칼리오 후작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전투기갑은 금속이지만 착용하는 자의 마나와 공명하여 마나 갑옷 역할을 한다.
화살로 마나 갑옷을 뚫기 위해서는 최소한 50미터 안으로 들어가야만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놈들과의 거리는 2백여 미터. 비록 마족의 힘이 강하다고 해도 전투기갑을 뚫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크로들이 속속 죽어가고 있었다.
“은신술을 펼쳐라!”
지금은 마족의 화살이 전투기갑을 뚫는 이유를 밝혀내기보다는 피하는 게 우선이었다.
“은신술을 펼쳐라!”
“섀도 기능을 활성화시켜라!”
여기저기서 베칼리오 후작의 명령을 복창하는 외침이 들려오고 크로들은 허공으로 녹아들어 갔다.
“차앗!”
“타앗!”
“이야합!”
바로 그때였다.
절벽 위쪽에서 우렁찬 외침이 들려오더니 환한 빛 덩어리들이 계곡 안쪽으로 쏘아져 들어왔다. 번쩍이는 그것들은 천족이 펼치는 빛의 마법의 광자(光子)였다.
빛 무리는 광채를 쏘아대 주위를 환하게 밝히고, 숨어 있던 크로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러자 활 쏠 준비를 하고 있던 마족들은 일제히 시위를 놓았다. 4백여 명이 쏜 화살은 순식간에 2백여 미터의 공간을 단축했다.
퍽! 퍽퍽! 퍽퍽퍽!
툭! 툭툭툭!
하지만 이번엔 조금 전과 상황이 달랐다.
조금 전에는 모든 크로의 몸속으로 무자비하게 파고들었던 화살이 일부 크로의 몸은 뚫지 못하고 튕겨져 나가버린 것이었다.
죽음을 떠올렸던 자들 중 살아난 일부의 얼굴에 기쁨의 빛이 떠올랐다. 그들 중에는 베칼리오 후작도 있었다.
새하얀 빛에 노출되면서 모습이 드러난 순간 화살이 날아왔고, 피할 수 없다는 생각에 눈을 감았다. 그런데 화살이 튕겨 나가버린 것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휘이익! 휘이익! 휘이익!
또다시 주위를 환하게 밝히며 불화살이 쏘아져 왔다.
베칼리오는 화살을 주시했다.
“역시.”
이번에도 조금 전과 다르지 않았다.
절반 정도는 대원들의 몸에 틀어박히고 절반은 튕겨 나갔다.
“돌겠군.”
베칼리오 후작은 고개를 갸웃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혹시 저 불 때문…… 맙소사.”
베칼리오 후작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전투기갑은 세 가지 기운이 하나로 합쳐진 장소에서는 일반 갑옷과 다름없다.’
문득 스승으로부터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바로 여기가 그런 장소였어.”
그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이곳 숲은 땅의 기운이 극대화된 곳이다. 그리고 계곡 전역에 지른 불은 불의 기운을 활성화시켰다.
그리고 세 번째는 마족의 기운이다.
사물을 빛과 어둠으로 나눌 때 천족은 빛이 되고 마족은 어둠이 된다. 그걸 더욱 확장하게 되면 빛은 불과 통하고 어둠은 물과 통한다. 즉 마족의 힘은 물의 기운이 되는 것이다.
땅의 기운과 불의 기운이 합쳐진 공간에 물의 기운을 머금은 화살이 통과하면 그 화살은 세 가지 기운을 동시에 내포하는 혼돈의 화살이 된다.
크로 대원들이 당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떤 자가 이런 엄청난 생각을 해냈단 말인가?”
베칼리오 후작은 시선을 들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가공할 속도로 쏘아져 대원들의 몸속으로 파고들어 가는 화살뿐이었다.
“남은 건 탈출뿐인데…… 문제는.”
“당장 탈출해야 합니다, 단장님.”
그때 부단장 샘 안드레이 백작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퇴로는 확보했는가?”
베칼리오 후작은 안드레이 백작을 돌아보며 물었다.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있으면 우리를 기다리는 건 전멸뿐입니다.”
“계곡 입구의 폭이 20미터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가?”
베칼리오 후작 또한 탈출에 대한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게 아니었다. 문제는 계곡 입구의 폭이었다.
20미터밖에 되지 않는 곳이라 이삼십 명만 지키고 있으면 빠져나갈 수가 없다. 더구나 적은 화살 공격을 해 오고 있는 상황.
전투기갑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곳에서 한 곳으로 모인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상황이 악화 일로로 치닫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퇴각명령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계곡 입구에 있는 자들은 20여 명이 전붑니다.”
그때 입구를 살피러 갔던 부관 포트가 돌아오며 소리쳤다.
“아악!”
“으악!”
“크아악!”
“희생을 감수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단장님.”
설령 탈출하다가 절반이 죽는다고 해도 절반이 살아남는다면 그렇게 해야만 하는 다급한 상황이었다.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단장님!”
안드레이 백작은 재차 소리쳤다.
“좋네, 부단장. 당장 철수하도록 하시오. 단 철수는 각 조별로…….”
“탈출 명령이 떨어졌다!”
“철수하라!”
“계곡 입구에는 20명밖에 없다. 철수하라!”
베칼리오 후작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근처에서 철수하라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퇴각하라!”
“철수하라!”
“탈출하라!”
철수 명령은 들불처럼 계곡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사방은 불타고, 섀도 기능도 되지 않고, 위에서 날아온 1미터 크기의 화살에 잔뜩 얼어 있던 대원들에게 철수 명령은 그야말로 구세주의 외침이었다.
크로의 대원들은 ‘퇴각하라!’라는 말을 외치며 계곡 입구를 향해 쏘아져 갔다.
“빌어먹을!”
베칼리오 후작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젠 먼저 간 자들이 계곡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적을 없애 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을 듯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단장님.”
부단장 안드레이 백작이 앞서 나갔다.
“섀도 기능을 극대화하고 최대한 불길이 없는 곳으로 이동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단장님!”
안드레이 백작이 왼편으로 향했다.
두 사람의 신형은 곧 어둠 속으로 묻혔다.
“클클클!”
방금 베칼리오 후작과 안드레이 백작이 서 있던 곳 후미에서 나직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다란이었다.
그는 김필도의 지시로 결정적인 순간에 철수하라는 소리를 지르기 위해 계곡 안으로 잠입해 들어왔다.
그리고 조금 전 퇴각하라고 외쳤다.
“이러니 마족이 무릎을 꿇을 수밖에.”
김필도의 책략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가 크로 대원들을 죽음의 함정으로 끌어들인 것은 철수하라는 말 한마디였다.
다란은 계곡의 입구를 향해 몸을 날려갔다.
계곡 입구는 극도의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계곡을 빠져나가려는 크로 대원 수백 명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창! 창창창!
“아악!”
“으악!”
“크아악!”
처절한 비명이 들려오고, 잘려나간 머리들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다란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이카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란, 여기예요.”
그는 이카렌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이카렌은 절벽의 움푹 들어간 장소에서 땅속에 검을 박아 넣은 채 불의 기운을 쏟아 넣고 있었다. 그녀가 있는 곳은 탈출에 여념이 없는 크로 대원들이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으슥했다.
레드 드래곤 이나함의 맹약의 구슬과 잊힌 고대의 신검 세딕의 힘은 엄청났다. 그녀를 중심으로 3백여 미터 전면이 전부 열탕으로 변해 버린 것이었다.
그녀 옆으로 다가간 다란은 바닥에 검을 꽂아 넣고 불의 기운을 쏟아냈다.
바로 그 순간 허공에서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퍽! 퍽퍽퍽! 퍽퍽!
“크악!”
“아악!”
“으악!”
“악!”
크로 대원들이 걸친 전투기갑은 두꺼운 옷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마족들이 쏜 화살은 무자비하게 크로 대원들의 몸속으로 박혀 들어갔다.
거의 동시에 수십 명씩 죽어나갔다. 하지만 크로의 탈출 행렬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이미 패닉 상태에 빠져 멈출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