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
쩌엉! 쩌엉! 쩌엉!
후두둑! 툭툭툭!
계곡의 입구도 화살 공격을 받는 쪽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단 한 명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전부 죽임을 당했다. 계곡 입구를 막고 있는 이들 중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고 있는 이는 하라미였다.
그녀의 검이 가리키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수십 개의 얼음 동상이 생겨나고 곧 조각조각 부서져 내렸다.
실버 드래곤의 힘이 빛의 검술에 접목돼 나타난 결과였다.
크로 대원들은 화살에 맞아 죽고, 계곡 입구를 지키고 있는 천족들의 검에 죽임을 당했다. 수백 구의 주검이 생겨나고, 또 죽었다.
일방적인 싸움은 점점 종반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1시간가량이 지났을 때 크로 대원들은 대부분 죽임을 당하고 서 있는 자들은 열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베칼리오 후작은 망연자실했다.
크로가 창설된 이래 단 한 번도 이렇듯 철저하게 당한 적은 없었다. 무려 2천 명이나 되는 크로 대원이 다 죽고 열 명 남짓만 남았을 뿐이다.
어이가 없이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누구냐?”
베칼리오 후작은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천족과 마족을 하나로 묶고 이곳을 세 개의 기운이 공존하는 장소로 만들어 전투기갑을 무력화시켜버린 자.
도대체 어떤 자가 그런 엄청난 일을 해냈는지 궁금했다. 아니 어떤 자에게 2천 명의 크로가 몰살을 당했는지 알고 싶었다.
“나야.”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인간 사내가 앞으로 나갔다. 그는 김필도였다.
베칼리오 후작 앞으로 걸어가는 김필도의 엉덩이에는 설향과 단도가 걸려 있었다.
“어떻게…….”
베칼리오 후작은 경악한 얼굴로 김필도를 보았다.
천족과 마족이 한 팀이 된 특이한 조직의 수장이 김필도란 사실을 선뜻 믿을 수가 없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그보다 궁금한 게 있어.”
김필도는 베칼리오 후작을 빤히 보며 입을 열었다.
“우린 안면이 없는 걸로 알고 있소.”
대답을 들을 생각을 말라는 의미였다.
“그래도 죽기 전에 한마디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누가 죽을지는 알 수 없소, 대공.”
“설사 날 이긴다고 해도 너는 저들에게 죽을 거야. 굳이 머릿속에 있는 걸 가지고 갈 필요는 없잖아.”
김필도는 주위를 가리켰다. 계곡 입구에 있던 천족은 벌써 안으로 들어와 일행을 포위하고 있고, 절벽 위에 있던 마족들은 아래로 내려오는 중이었다.
베칼리오 후작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저들을 살려주시오. 그럼 대공이 궁금한 걸 말해 주겠소.”
베칼리오 후작은 살아남은 크로 대원 열 명을 가리켰다.
“난 당분간 저들에 대해 비밀로 할 생각이야.”
김필도는 다시 천족과 마족을 가리켰다.
“전투기갑을 반납하고 포로가 되겠습니다.”
“그러다 토껴버리면 나만 병신 되잖아.”
“토껴요?”
“도망치는 걸 말하는 거야.”
“저는 명예를 최고의 선으로 여기는 기삽니다. 한번 약속한 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킵니다.”
“……!”
김필도는 베칼리오 후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동안 베칼리오 후작을 바라보던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 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대공.”
베칼리오 후작은 고개를 숙였다.
“한 명만 배신을 해도 전부 죽일 거니까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우선 전투기갑부터 반납하도록.”
“알겠습니다.”
베칼리오 후작은 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잠시 후 전투기갑 열한 개가 알마니의 아공간으로 들어갔다.
“디자이너는 전투기갑 수거하고 다란은 시체를 처리해주세요.”
“어떻게 처리할까요?”
“묻기에는 너무 많으니까 가루로 만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건 이카렌이 도와줄 거예요.”
“알겠습니다, 바르칸.”
다란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를 떴다.
“앉지.”
김필도는 자리를 가리키고는 앞으로 다가가 베칼리오 후작 건너편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감사합니다.”
베칼리오 후작은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자네가 단장을 맡기 전에는 크로 단장의 신분이 극비 사항이었다고 하던데 맞는가?”
“단장뿐만 아니라 대원들 또한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았습니다.”
황제 직속 기관이었던 크로는 황실 최후의 보루였던 터라 인원수는 물론이고 신분까지도 철저하게 비밀에 붙였다. 그랬기 때문에 크로 단장이 누구인지는 단장 본인과 황제만 알고 있었다.
“자네도 몰라?”
“현 단장은 전대 단장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누군데?”
“베쿠스 델리카슨입니다.”
“남로군벌의 그 델리카슨?”
베쿠스 델리카슨은 남로군벌, 즉 라팔 성의 성주인 리베우스 델리카슨 백작의 아버지였다.
“그렇습니다.”
베칼리오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는 외조부 친구라고 알고 있는데.”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크로에서 보관하고 있는 문서를 보면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어떤 점이 이상하다는 건데?”
“그 당시 크로에서는 황제 폐하의 암살 사건의 징후를 감지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왜 그랬다고 생각하지?”
“크로 대원들이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단장의 명령이란 말이군.”
“그렇습니다. 명령이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황제 폐하가 제거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움직이지 않았던 겁니다.”
“이유는 알아냈어?”
“조사를 하긴 했지만…….”
“베쿠스 델리카슨만 알고 있다는 뜻?”
“그렇습니다.”
“그는 지금 어디 있지?”
“그의 마지막 행선지가 이곳이라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베쿠스 델리카슨은 요주 인물이기 때문에 크로에서도 계속 감시하고 있었다.
“이곳에?”
“그렇습니다.”
“혼자 온 거야, 아니면 누군가를 데리고 온 거야?”
“그를 포함하여 다섯 명입니다.”
“나머지 네 명의 정체는 모르고?”
“그들에 대해서는 밝혀 낸 게 없습니다. 다만 그들 또한 전대 크로와 관련이 있지 않나 하는 짐작만 했을 뿐입니다.”
“모르면 어쩔 수 없고. 그보다 이 숲에 있는 자들에 대해 알고 싶어.”
“그들은…….”
베칼리오 후작은 말끝을 흐렸다.
크로는 적뿐만 아니라 아군의 비밀에 대해서도 조사를 하는데 황제라고 하여 예외는 아니다. 약 1년간의 조사 끝에 황제의 비밀 몇 가지를 엿볼 수 있었다.
이 숲 또한 황제가 지닌 비밀 중의 하나였다.
“명예와 관련된 일이야?”
“그건 아닙니다.”
“그럼?”
“노르카입니다.”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내가 알고 싶은 건 노르카의 소속과 규모야.”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모릅니다. 다만 황제 폐하의 숨겨둔 세력이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
“이곳에 있는 노르카가 황제의 비밀 세력이라고?”
“이곳은 대지의 기운이 강해서 노르카가 활동하기에 최적의 장소고 가장 강한 힘을 낼 수 있는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게 전부야?”
“방금 제가 말씀드린 사항은 크로 자체적으로 알아낸 겁니다.”
“황제의 비밀을 염탐했다는 말이구먼.”
“뭔가 한 가지는 잡고 있어야 장수할 수 있는 곳이니까요.”
“그렇겠지.”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리 끝났어요, 마스터.”
그때 알마니가 김필도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전투기갑은 전부 챙겼어?”
“아공간이 부족해서 이카렌님 아공간을 좀 빌렸어요.”
“좋아. 그만 자리를 옮기자고.”
“전에 있던 자리로?”
이카렌이 물었다.
“시체를 묻은 곳은 그렇고, 그 근처로 적당한 곳으로 하자.”
“알았어.”
이카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천족과 마족은 전날 머물렀던 장소로 향했다. 하지만 일행이 멈춘 곳은 원래 있던 곳에서 1킬로미터 북쪽에 위치한 계곡 앞이었다.
“이카렌과 록은 왼편, 하라미와 라이자칸은 오른편을 확인하고 와.”
“적이 접근할 수 있는지 알아보라는 거죠?”
이카렌이 물었다.
“크로처럼 화살 공격을 당하면 안 되잖아.”
“알았어요. 록은 날 따라와.”
“알겠습니다, 군단장님!”
이카렌과 록이 먼저 자리를 뜨고, 이어 하라미와 라이자칸이 몸을 날렸다.
“나머지는 날 따라와.”
김필도는 일행을 데리고 계곡 안으로 향했다.
“습지네.”
50미터가량 전진한 김필도는 걸음을 멈췄다. 갑자기 바닥이 질척해지면서 눅눅한 기운이 몸을 감싸고돌았다.
김필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계곡은, 입구는 좁고 안쪽은 넓은 항아리 형태였다. 안쪽에는 습지대에서만 자란다는 바오나무가 울창한 수림을 형성하고 있었다. 바오나무의 키는 40에서 50미터가량이었다.
“발카모는 오른편 절벽을 확인하고 우데스는 왼편 절벽을 확인해.”
“알겠습니다.”
발카모와 우데스는 좌우측으로 몸을 날려갔다.
“가장자리를 통해서 가면 이동할 수 있습니다.”
“이쪽도 마찬가집니다.”
발카모에 이어 우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절벽을 살피면서 이동해.”
김필도는 명령을 내리고 계곡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닥은 습기를 잔뜩 머금고 있기는 했지만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5백 미터쯤 들어가자 폭이 약 30미터 되는 호수가 나타났다.
김필도는 호수 물에 손을 담갔다. 물은 생각보다 차갑지 않았다. 그곳을 지나 다시 1백여 미터를 나아가자 또 다른 호수가 나타났다.
“호수 계곡이에요.”
주위를 둘러보고 온 라헤나가 말했다.
“호수가 많아요?”
“제가 헤아린 호수의 수만 해도 20개예요. 그런데 이상해요.”
“뭐가요?”
“호수의 원천이 없어요.”
라헤나가 의문을 갖는 부분이었다.
호수가 형성되려면 외부에서 물이 유입돼야 하는데 계곡의 어디에도 물이 흘러드는 흔적은 없었다.
“혹시 저것 때문이 아닐까요?”
김필도는 호수를 가리켰다.
라헤나는 호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호수 바닥은 바위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곳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고, 그 구멍으로부터 뭔가가 끊임없이 솟아 나오고 있었다.
“지하에서 용출되는 물인가요?”
라헤나는 물었다.
“그런 것 같아요. 물도 그리 차갑지 않아요.”
라헤나는 물에 손을 담가보았다.
“그렇네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은 차갑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약간 미지근했다.
그곳을 지나 5분 정도 걷자 계곡 끝자락에 도착했다. 그가 멈춘 곳에서 계곡까지는 20미터 정도였는데 바닥은 마른 땅이었다. 지금까지 지나온 곳보다 지대가 높아 호수에서 넘친 물이 미치지 못한 모양이었다.
김필도는 고개를 들었다. 높이가 3백 미터가량 되는 절벽에, 크고 작은 동굴이 뚫려 있었다.
“속삭이는 바람! 창공을 나는 바람이 된다! 플라이!”
마법 지팡이를 꺼내든 김필도는 플라이 마법을 펼쳐 날아올랐다.
천천히 날아오른 그는 20미터 지점에 있는 동굴로 들어갔다. 동굴은 천장이 상당히 높고,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괜찮네.”
김필도는 싱긋 웃으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절벽 가장자리를 따라갔던 발카모와 우데스가 다가왔다.
“어때?”
김필도는 물었다.
“절벽의 높이는 3백 미터 정도 되고 온통 동굴이 뚫려 있습니다.”
먼저 대답한 이는 발카모였다.
“제가 온 곳도 마찬가집니다. 그리고 절벽에서 10미터까지는 마른 땅입니다.”
“1조와 2조는 우측으로 가고, 3조는 좌측 절벽으로 가서 거처를 만들어.”
“여기서 머물 겁니까?”
발카모가 김필도를 향해 물었다.
“그럴 생각이야. 입구에 정찰 초소를 만들고 숙소는 중간 지점에 만들면 될 거야.”
“알겠습니다.”
천족과 마족은 일제히 몸을 돌려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디자이너.”
김필도는 알마니를 불렀다.
“말씀하세요.”
“아래쪽에 있는 동굴 중 하나를 골라서 짐 풀어 놔.”
김필도는 다시 플라이 마법을 펼쳐 위로 올라갔다. 잠시 후 그는 3백 미터를 날아올라 절벽 위에 내려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