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191화 (191/225)

# 191

휘유!

김필도는 휘파람을 불었다. 눈앞에는 계곡과 계곡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절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번엔 몸을 돌려 계곡을 바라보았다. 6백여 명이 넘는 천족과 마족이 숙소를 만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자리는 잘 잡은 것 같네.”

휙! 휙!

다시 몸을 돌려 숲을 바라보고 있을 때 이카렌과 록이 합류했다.

“어때?”

김필도는 이카렌을 보며 물었다.

“절벽 위에서 공격하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아. 우리가 출발한 곳 말고는 이곳까지 오는 것도 쉽지가 않아.”

“그럼 잘 정한 거네.”

“천둥의 성으로 안 돌아갈 거야?”

“우린 거의 6백 명이나 되잖아. 아무리 은밀하게 움직인다고 해도 들킬 수밖에 없어.”

“그건 이곳에 있어도 마찬가지 아닐까?”

“처음엔 우리를 찾기 위해 숲을 헤매고 다니겠지.”

“그러다가 아무도 없으면 우리와 싸웠던 크로나 죽음의 상단 다르와 상잔한 걸로 결론을 내릴 거란 말?”

“그렇게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럼 최적의 장소를 고른 셈이네?”

“하라미 말도 들어봐야지.”

김필도는 고개를 돌렸다. 마침 하라미와 라이자칸이 그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중간 지점에서 이 위로 올라오려면 암벽을 타야 해요. 이 절벽은 성벽과 비슷한 형태로 만들어져 있어서 마법사가 아니면 접근이 쉽지 않아요.”

“그만 내려갈까?”

김필도는 아래로 훌쩍 몸을 날렸다.

팟! 팟! 팟팟!

김필도는 절벽의 튀어나온 부분을 발로 차 속도를 줄이면서 아래로 내려갔다.

“저런 방법이 있었네.”

이어 이카렌과 하라미가 김필도와 같은 방법으로 내려가고, 마지막으로 록과 라이자칸이 내려갔다.

아래로 내려온 이카렌 일행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20여 미터 떨어진 곳부터 온통 바오나무 숲이었다. 아래쪽은 축축한 습지고 호수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특이한 곳이네?”

이카렌은 중얼거렸다.

“이쪽으로 들어와.”

5미터 위쪽에서 김필도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거기가 네 집?”

이카렌은 물었다.

“응! 2층 집이야.”

“2층 집?”

“일단 들어와.”

“알았어.”

이카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행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2층 집이란 의미는 안으로 들어가자 알 수 있었다.

동굴의 형태가 2층 집과 비슷했다.

그리 깊지 않은 곳에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돌을 깎아내 계단 모습으로 다듬은 듯 주위에 잘라낸 돌 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계단 위쪽은 한 변의 길이가 15미터가량 되는 정방형의 공간이었다. 계곡 쪽으로는 가로 1미터, 세로 50센티미터가량 되는 구멍이 나 있어, 마치 창처럼 보인다.

그 아래쪽으로는 기다란 바위가 평상 형태로 놓여 있다. 테이블로 이용하면 아주 좋을 듯했다.

김필도 또한 그럴 셈인 듯 데푸시, 이프리스, 베칼리오, 발카모, 우데스 다섯 명과 둘러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앉아.”

김필도는 자리를 가리켰다.

이카렌 일행이 자리하자 알마니가 차를 가져와 놓았다.

“이렇게 하고 있으니까 다섯 종족의 대표가 모인 것 같네.”

김필도는 빙긋 웃었다.

“장차 그렇게 될 거요. 그보다 가까운 곳에 라파가 있는데 이곳에 거처를 정한 이유가 뭐요?”

먼저 질문을 던진 이는 데푸시였다.

베칼리오 후작이 투항해왔으니 마음만 먹으면 라파로 돌아갈 수 있기에 하는 말이었다.

“라파로 들어가면 며칠 안에 황제, 아론, 세이아칸, 데메우스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아울러 마족, 천족, 드워프, 엘프, 인간 다섯 종족으로 이루어진 연합 세력이 탄생했다는 사실도 알게 될 거고. 그렇게 되면 그들은 가장 먼저 우리를 제거하려고 할 거야.”

“그럼 이곳에서 당분간 숨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데푸시는 다시 물었다.

“숨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증발해야 해.”

“증발이라고요?”

“맞아. 그래야 놈들은 우리를 잊고 열심히 쌈질을 하게 돼.”

“전쟁이 확대될 거라고 보시오?”

이번엔 질문을 한 이는 록이었다.

“세이아칸은 물론이고 데메우스는 단지 헤를리온을 회수하기 위해 대륙으로 건너온 게 아니오. 그들이 바라는 건 천계와 마계의 영웅이 되는 거요.”

“영웅이 되기 위한 가장 좋은 무대는 전쟁터란 말이군요.”

“맞소, 록. 세이아칸이나 데메우스는 확전을 원하고 있소.”

“하지만 확전은 쉽지 않을 거요.”

“천왕과 마왕이 확전을 원하지 않을 거란 말이오?”

“천왕이나 마왕을 설득해야 하는데 그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거요, 가주.”

“확전의 명분은 충분하오.”

“설명해 보시오.”

“하라미와 천족 전사 5백 명과 마계10군단 소속 4백 명이 인간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추가 병력을 요구할 근거가 되오. 천왕과 마왕은 병력을 파견할 수밖에 없고, 크로를 잃은 발탄 제국 황제는 이곳에 있는 노르카를 불러들이게 될 거요.”

“아군의 희생 없이 숲을 나갈 방법을 두고 굳이 싸울 필요가 없다는 말이군요.”

“그렇소. 조용히 쉬는 게 남는 장사요.”

김필도의 시선이 이카렌에게로 향했다.

“왜?”

“잠수타고 있으려면 가장 중요한 게 식량인데, 식량 사정이 어떤지 궁금해서.”

“두 달은 버틸 수 있어.”

“1조는 됐고.”

이번엔 하라미를 보았다.

“우린 4달 정도 먹을 분량의 식량을 가지고 있어요.”

“식량이 상당히 많네?”

“죽은 대원들의 식량이 고스란히 남아서 그런 거예요.”

“맞아, 그랬지. 3조는 어때?”

마지막으로 발카모를 보았다.

“저희도 한 달 이상은 버틸 수 있습니다.”

“그럼 굳이 식량을 구하겠다고 라파로 들어갈 일은 없겠네. 아무튼 언제까지 머물게 될지 모르니까 식량은 최대한 아끼도록 해.”

“알겠습니다.”

“알았어요.”

“알았어.”

발카모와 이카렌 하라미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동굴은 널렸으니까 아무거나 골라잡으면 될 거야.”

김필도의 말이 끝나자 이카렌 일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이자칸은 나 좀 보고 가세요.”

김필도는 일어나는 라이자칸을 불렀다. 몸을 일으키던 라이자칸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일행이 전부 나가고 난 후 김필도는 테이블 위에 그린 드래곤 키울라가 남긴 맹약의 구슬과 잊힌 전설의 신검 노콴을 놓았다.

“뭔가?”

라이자칸은 김필도를 보며 물었다.

“이건 그린 드래곤이 남긴 맹약의 구슬이고 이 녀석은 리모스에서 얻은 노콴이에요.”

“내게 주는 거란 말인가?”

“누군가 늙어서 필요한 건 많은 자식이 아니라 혼자 살아갈 수 있는 건강과 돈이라고 하더군요. 다행히 내겐 돈이 많으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고, 건강만 챙기면 될 것 같아서요.”

“나는 지금도 충분히 건강하네.”

“나는 우리 집안의 총집사가 어디서 맞고 들어오는 꼴을 보지 못해요.”

“내가 맞을 걸로 보이는가?”

“록과 맞장 뜨면 많이 맞을 것 같던데 내가 잘못 본 거예요?”

“끄응!”

라이자칸은 얼굴을 찌푸렸다. 김필도의 말이 틀리지 않다. 록이 각성하지 않은 상태라면 모를까 최상급 마족으로 각성한 지금은 그의 상대가 아니었다.

“아무튼 이곳에서 쉬면서 완전하게 라이자칸 걸로 만들도록 하세요.”

“원래 성격이 그렇습니까?”

라이자칸은 말을 올렸다.

“제 성격이 어때서요?”

김필도 또한 ‘나’가 아닌 ‘저’라고 했다. 라이자칸이 공대를 하자 김필도 또한 자신을 낮춰 라이자칸을 대우한 것이었다.

“감동으로 상대방을 사로잡느냐고요.”

“그래야 배신하지 않잖아요.”

김필도는 빙그레 웃었다.

“제가 죽기 전엔 배신할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마스터!”

라이자칸은 몸을 일으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는 진심으로 김필도를 따를 결심을 했다. 결코 잊힌 전설의 신검이나 드래곤이 남긴 맹약의 구슬 때문이 아니었다. 나이 먹은 사람에게 필요한 건 자식이 아니라 건강과 돈이라는 말 때문이다.

설령 부하로 만들기 위해 한 말이라고 해도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은 절대 아니었다. 저런 사람이라면 마지막까지 함께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를 마스터라고 부르면 하라미가 불편해 할 거예요.”

“상관없습니다, 마스터. 지금부터는 마스터라고 부르겠습니다.”

“라이자칸.”

“호칭만큼은 제 마음대로 하게 해 주십시오, 마스터. 하라미에게는 제가 말 하겠습니다.”

“늙으면 주름살하고 고집만 는다더니.”

“허허허! 명언입니다, 마스터.”

라이자칸은 호탕하게 웃었다.

“알았으니까 그만 나가 보세요.”

“총집사가 가긴 어딜 갑니까. 오늘부터 아래층은 제가 쓰도록 하겠습니다.”

라이자칸은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몸부터 만드는 거 잊지 마세요.”

“물론입니다, 마스터.”

라이자칸은 웃으며 아래로 향했다.

“이것도 가져가요!”

휙!

계단을 내려가는데 위에서 희끄무레한 물체가 날아왔다.

척!

라이자칸은 물체를 잡아채고 김필도를 보았다.

“드래곤 피시래요. 하라미가 맹약의 구슬을 완벽하게 녹일 수 있었던 게 그 녀석 때문이었대요.”

“감사합니다, 마스터.”

라이자칸은 고개를 숙이고는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쪽에는 위쪽과 마찬가지로 몇 개의 동굴이 이어져 있었다. 그 중 한곳을 택해 들어간 라이자칸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먼저 검을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손잡이를 뺐다. 그런 다음 김필도로부터 받은 노콴을 밀어 넣었다.

딸깍!

웅웅웅! 웅웅웅! 웅웅웅!

손잡이를 조립하자 검은 검명을 토해냈다. 수만 년 동안 참았던 검의 숨소리였다.

라이자칸은 눈을 지그시 감고 들려오는 검명에 귀를 기울였다. 잃었던 세월을 채우려는 듯 검은 계속 울음을 토해냈다. 라이자칸은 숨조차 내쉬지 않고 검명에 집중했다. 그렇게 5분가량이 흘렀다.

검명이 멈추자 라이자칸은 맹약의 구슬과 드래곤 피시를 차례로 복용했다. 그리고 검의 손잡이를 아랫배 근처에 대고 세웠다.

그는 검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이젠 황금색이라고 하기도 힘든 빛바랜 머리카락을 한 얼굴이 이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4천 년의 세월을 견뎌온 얼굴이었다.

“다시 시작하는 거야!”

웅웅웅! 웅웅웅!

대지의 기운을 간직한 노콴과 드래곤 피시 그리고 맹약의 구슬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공명하면서 라이자칸의 몸에서 대지의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라이자칸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하라미에 이어 또 한 명의 최강의 전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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