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193화 (193/225)

# 193

라팔은 깜작 놀란 얼굴로 물었다.

홀딘은 천계의 대소사를 책임지고 있는 총리대신이고, 몇 시간도 자리를 비워서는 안 되는 막중한 자리다.

심지어 딸인 하라미의 성인식에도 참석하지 못했고, 바로 옆에서 생일을 챙겨준 적도 없다. 그가 하라미를 위해 한 일이라고는 성폭행을 시도했던 자들을 없앤 게 유일하다. 그랬던 그가 느닷없이 휴도니아 대륙으로 넘어가겠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라미가 실종됐네.”

홀딘은 지금껏 들고 있던 보고서를 라팔에게 건넸다. 그러고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이런 빌어먹을!”

보고서를 읽어보던 라팔은 욕설을 내뱉었다.

그는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비상종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이스마디온 전사단의 1천 대원이 집합하는 시간은 단 5분에 불과했다. 이스마디온 전사단이 집합해 있는 곳은 저택 왼편의 연병장이었다. 그들은 전투기갑을 걸치고, 이야크를 탄 채였다. 그런데 그들의 전투기갑은 보통 천족의 전투기갑과 달랐다.

보통 천족의 전투기갑은 황금색인데 이스마디온 전사단의 전투기갑은 온통 붉은색이었다.

“쿨러!”

일행의 선두에 선 라팔이 왼편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네!”

한 사내가 이야크를 몰아 앞으로 나왔다. 그는 이스마디온 전사단의 식량을 담당하는 자였다.

“식량 상황을 말하라!”

“6개월 치가 확보돼 있습니다.”

“6개월 치를 더 보충하라!”

“알겠습니다, 단장!”

쿨러는 곧바로 이야크를 몰아 앞으로 나오더니 저택으로 달려갔다.

“빌라드!”

라팔이 두 번째로 부른 자는 이스마디온 전사단의 예산 담당관이었다.

“말씀하십시오, 단장!”

“넌 지금 당장 남해로 가서 우리가 타고 갈 배를 구해라. 목적지는 휴도니아 대륙이다.”

“아, 알겠습니다!”

휴도니아 대륙이란 말에 약간 당황한 듯했던 빌라드는 곧바로 대열을 이탈하여 내달렸다.

“메이션!”

라팔이 이번에 부른 자는 정보를 담당하는 자였다.

“하명하십시오, 단장!”

“너는 휴도니아까지 가는 뱃길을 아는 자를 수배해라. 누구라도 좋다. 길을 아는 자는 전부 데리고 남항으로 와라!”

“알겠습니다.”

정보담당관 메이션 역시 앞선 둘처럼 대열에서 빠져나갔다. 메이션의 이야크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라팔은 단상으로 올라갔다.

“갑작스런 출병에 의아할 줄 안다. 하지만 출병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이스마디온 전사단 대원들은 말없이 라팔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것은 그동안 우리가 가장 우려하던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공녀님의 신상에 무슨 일이라고 생긴 겁니까?”

맨 오른편 선두에 있던 자가 물었다. 그는 이스마디온 전사단 1조 조장 헤케르였다.

헤케르가 대번에 하라미를 언급한 것은 지금 상황을 어느 정도 예측했기 때문이었다.

대천신군이 휴도니아 대륙으로 출정 나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국무대신인 베칼이 그의 아들을 이용해서 하라미에게 해코지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천계의 이인자인 총리대신의 따님이라 아무 일 없을 거라며 위안을 삼았다. 그런데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고 만 모양이었다.

“방금 실종됐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실종이란 말입니까?”

질문을 했던 헤케르의 몸 주변에서 차가운 기운이 넘실댔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의 몸에서도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그렇다. 그래서 가주님께서 직접 휴도니아 대륙으로 가기로 하셨다.”

그때 안쪽에서 홀딘이 이야크를 몰고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가주님!”

단상에서 내려온 라팔은 얼른 내려와 고개를 숙였다.

“준비는?”

홀딘은 물었다.

“끝났습니다.”

홀딘은 이야크를 몰아 대원들 앞으로 갔다. 잠시 그들을 바라보던 홀딘은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우리 천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내 개인적인 일이고, 어쩌면 다시는 이곳을 밟지 못할 수도 있다. 아니 누군가가 나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하라미를 이용했다면 돌아오지 못할 확률이 90퍼센트 이상이다. 그래서 나는 제군들에게 나와 동행을 강요하지 않을 참이다. 전사의 맹세는 잊어버려도 좋다. 지금부터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나와 함께 휴도니아 대륙으로 갈 대원은 열흘 후 남항 북쪽의 히야스 평원으로 집결하라. 해산하라!”

“1조는 해산하라!”

“2조는 해산하라!”

“3조는 해산하라!”

“4조는…….”

“5조는…….”

곧이어 각 조장의 외침이 들려오고 이스마디온 전사단 대원들은 자리를 떴다.

하지만 전부가 다 떠난 것은 아니었다. 절반가량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저들은 뭐냐?”

홀딘은 오른편에 있는 사내를 보며 물었다. 3미터 키를 가진 그는 1조 조장 헤케르였다.

“이곳이 집인 녀석들입니다.”

“가족이 없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럼 나가서 술이라도 마셔라!”

홀딘은 손을 휘 저었다.

“해산하라!”

헤케르는 대원들을 보며 고함을 내질렀다.

“갈 곳이 없습니다, 조장님! 그리고 저흰 휴도니아 대륙이 어떤지 알고 싶습니다.”

“잔말 말고 해산해!”

헤케르는 다시 소리쳤다.

“끙! 갈 곳도 없구만.”

대원들은 투덜대며 이야크를 돌렸다.

잠시 후 연병장에는 홀딘과 라팔 둘만 남았다.

홀딘은 몸을 돌려 그의 집을 바라보았다. 5천2백여 년 전 자신이 태어날 때 지어진 집이다. 그 당시 조부는 국방대신이었고, 아버지는 총리대신이었다.

조부가 돌아가시고 국방대신 자리를 천왕의 외척인 에바르본 가문에게 넘기긴 했지만 이스마디온 가문은 여전히 천계 최강 가문이었다.

“드디어 몰락이네.”

그는 피식 웃었다.

“가주님!”

“내가 너무 서두른다고는 생각지 않는가?”

홀딘은 저택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하라미 공녀님은 가주님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생명을 구하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좀 더 이성적으로 처리할 수도 있었지. 천왕을 찾아가서 상황을 말씀드리고 자네와 이스마디온 전사단만 보내는 방법도 있고, 천왕의 명령서를 가진 조사단을 파견하는 방법도 있었네. 하지만 난 베칼에게 총리대신 신분증을 던져 주고는 황실을 나와 버렸네.”

“돌아오신다고 해도 황실로 들어가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들어가지 않는 게 아니라 하라미를 구해 돌아온다고 해도 들어갈 자리가 없을 거네.”

“검술은 물론이고 머리에서도 국방대신은 가주님의 상대가 아닙니다. 설사 국방대신이 많은 걸 차지했다고 해도 금세 되찾아올 수 있을 겁니다.”

“내가 경계하는 자는 베칼 같은 얼치기가 아니네.”

“그럼?”

“우리 역사 속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자들이네. 그들은 이미 천계 깊숙이 침투해 있네. 얼마나 광범위한지 왜 아직도 신분을 숨기고 사는지 의아할 정도네.”

“그런 자들이 있습니까?”

“있네. 이곳으로 오기 전에 나는 그들의 수뇌로 보이는 자를 향해 마나 폭풍을 쏟아 부었네. 내가 가진 힘의 80퍼센트 이상이었네.”

“어, 어떻게 됐습니까?”

“기절만 했을 뿐 부상은 당하지 않았더구먼.”

“저, 정말입니까?”

라팔은 경악했다.

홀딘의 실력은 누구보다 그가 더 잘 알고 있다. 많은 이들이 천계 최강 검사로 라이자칸을 꼽았지만 라팔의 의견은 달랐다. 총리대신이란 직책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 그가 아는 천계 최강 검사는 홀딘이었다. 그런 그가 80퍼센트의 힘을 사용했다면 그 대상은 가루로 변하고 만다. 그런데 부상조차 당하지 않았단다.

그건 곧 그자 또한 엄청난 강자라는 뜻이다.

“나오기 전에 확인했네.”

“그자들이 누굽니까?”

“드반 족이라는 사실만 알아냈네.”

“드반 족이라고요?”

“신마전쟁 이전에 대륙의 주인이었다네.”

“놀랍군요.”

라팔은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다섯 종족 말고는 다른 종족이 존재할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있고,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고 한다. 홀딘이 아닌 다른 사람의 말이었다면 미쳤다고 비웃었을 것이다. 그만큼 충격적인 말이었다.

“나도 놀랐네.”

“그럼 그들 때문에 떠나는 겁니까?”

“그건 아니네. 하라미가 시집갈 때까지만 총리대신을 할 생각이었는데, 그 시기가 앞당겨진 것뿐이네.”

홀딘은 이야크 머리를 돌렸다.

“하라미 공녀님이 시집갈 때까지 계시려고 했다고요?”

“권력을 쥐고 있어야 좋은 자리로 시집을 갈 거 아닌가.”

“풋, 그렇군요.”

라팔은 피식 웃었다.

둘은 곧 연병장을 벗어났다.

“어서 오십시오, 가주님!”

연병장 밖에는 5백여 명의 대원들이 모여서 홀딘과 라팔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사를 한 자는 1조 조장 헤케르였다.

“술이라도 한잔하러 가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직 점심때도 되지 않았습니다, 가주님. 대낮부터 문을 여는 술집은 없습니다.”

“참! 내가 그걸 깜빡했구먼. 일단 가 보세.”

홀딘은 멋쩍은 듯 웃으며 이야크의 고삐를 휘둘렀다.

두두두두!

“가자!”

“타앗!”

“하아!”

두두두두! 두두두두! 두두두두!

5백여 기의 이야크들이 무서운 속도로 전방으로 질주해 나갔다. 그들은 반나절 만에 수도를 벗어나 남쪽으로 쉬지 않고 내달렸다. 수도에서 남항까지는 이야크로 닷새 거리였다.

홀딘 일행은 히야스 평원에 진영을 구축하고 대원들을 기다렸다. 가장 먼저 히야스 평원으로 들어온 자는 배와 선원을 구하기 위해 먼저 남항으로 향했던 빌라드와 메이션이었다.

“어떻게 됐느냐?”

인사가 끝나자 라팔이 물었다.

“대형 선박 20척을 구해 놓았습니다.”

“선원은?”

이번엔 메이션을 보았다.

“노련한 선장 20명을 구했습니다.”

“가겠다고 해?”

“우리를 휴도니아 대륙까지 데려다주면 배를 주겠다고 했더니 흔쾌히 수락하더군요. 선원은 선장이 구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선원들의 비용은 우리가 대는 걸로 하고요.”

“잘했다. 들어가서 쉬어라.”

“알겠습니다.”

빌라드와 메이션은 인사를 하고 천막을 쳐 놓은 곳으로 갔다.

“배는 구했는데 대원이 얼마나 올는지 모르겠구먼.”

홀딘은 바다를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전부 올 겁니다, 가주님.”

“그럴 거라고 보는가?”

“그럴 겁니다.”

라팔은 확신 어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예상대로였다. 다음날부터 대원들이 하나둘 히야스 평원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9일째 되던 날에는 이스마디온 전사단 대원 1천 명이 히야스 평원에 정렬했다.

“너희는 바보 같은 선택을 했다!”

홀딘은 이스마디온 전사단 대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닙니다,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이스마디온 전사단 선두에 있던 열 명이 고개를 숙이며 소리쳤다. 그들은 이스마디온 전사단의 조장들이었다.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가주님!”

그리고 1천 명에 달하는 전사들이 고개를 숙이며 소리쳤다.

“나는 두 번 권하는 사람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오늘은 두 번을 말하겠다. 이곳에 남고 싶은 이는 남아라!”

“데려가 주십시오, 가주님!”

이스마디온 전사들은 다시 고함을 내질렀다.

“데려가 주십시오!”

“데려가 주십시오!”

“데려가 주십시오!”

전사들은 고개를 숙이며 고함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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