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195화 (195/225)

# 195

쿤할은 깜짝 놀랐다.

느닷없이 마왕의 목소리가 귓전으로 흘러들어온 것이었다. 그리고 ‘술 취하는 방’은 어린 시절 마왕과 친구로 지낼 때, 숨어서 어른 흉내를 내며 술을 마시곤 하던 곳으로 마왕과 자신 둘만 아는 장소였다.

그는 고개를 들어 마왕을 보았다.

-가족들에게도 숨겨야 하네.

다시 마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쿤할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발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엔 의아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내색할 수가 없었다.

이내 원래 표정을 회복한 그는 고개를 들었다.

“병력은 어떻게 구성할 생각이오?”

프리메우스는 쿤할을 보며 물었다.

-믿을 만한 자들로만 데리고 가게.

또다시 마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쿤할의 눈빛이 깊어졌다. 말투만으로 보면 믿을 만한 자들만 데리고 가라는 건, 천족과 전쟁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천족과의 전쟁보다 더 중요한 어떤 일이 일어난 게 분명했다.

“우선은 내가 거느린 군단만 데리고 가겠소.”

“그 정도로는 부족할 거요. 내가 1군단을 지원하도록 하겠소.”

“아니오, 1원로. 내가 거느린 군단만으로도 충분하오.”

“내 성의를 무시하지 마시오, 2원로. 아무런 사심이 개입되지 않는 순수한 지원이니까.”

“알았소.”

쿤할은 프리메우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지원해 준다는데 매몰차게 거절하는 것도 이상했다.

“6천 명이면 전함은 1백 척이면 되겠군요.”

“식량만 준비해 주시오. 무기를 비롯한 나머지 보급품은 내가 준비하도록 하겠소.”

“5일이면 준비가 끝날 거요.”

“알았소이다. 그럼 출병할 때 보도록 합시다.”

쿤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를 떴다.

“그럽시다.”

프리메우스는 회의실을 나가는 쿤할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온 그는 마차를 타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집은 궁에서 5킬로미터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안으로 들어서자 젊은 사내가 프리메우스는 맞았다. 2미터 키에 상당한 미남자인 이 사내는 홀리바인 가문의 총집사 크라반이었다.

프리메우스는 크라반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의 얼굴엔 분노한 기색이 역력했다.

“시선이 곱지 않군요. 황실에서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크라반은 웃으며 물었다.

“시키는 대로 했소.”

놀라운 일이었다.

마계의 제1원로이자 이인자인 그가 자기 집안의 총집사를 상전 대하듯 하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면 너무 범위가 넓지 않습니까? 가급적이면 내가 알아듣기 쉽게 요점을 짚어서 말해 주었으면 합니다.”

“쿤할이 그의 군단을 데리고 휴도니아 대륙으로 가기로 했소.”

“네 부하들은?”

“싫다는 걸 간신히 끼워 넣었소이다.”

“안타깝네요. 그걸 하지 못했으면 대부인이 죽여 달라고 몸부림치는 광경을 구경할 수 있었을 텐데.”

크라반은 빙그레 웃으며 혀를 내밀었다. 그러자 뱀처럼 양쪽으로 갈라진 혀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라반은 갈라진 혀를 이용해서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동시에 축였다.

부르르!

프리메우스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격렬하게 떨었다.

크라반. 무려 2천 년 동안 홀리바인 가문의 집사였다. 그랬던 그가 돌변한 것은 얼마 전, 문 대륙과 마계를 가로막고 있던 차원의 벽이 사라졌을 때였다.

차원의 벽이 사라진 건 당장 인간과 천족의 침입을 걱정해야 하는 엄청난 일이었다.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양측을 살폈다. 그러다 보니 집으로 들어가지를 못했다.

2주 정도를 황실에서 보내고 집으로 들어갔는데,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나 있었다.

부인과 두 아들, 며느리, 두 딸과 손자 손녀를 포함한 가족 전부가 크라반의 노예가 돼 있었다.

활동하는 건 평소와 전혀 다름없었다.

하지만 크라반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곧바로 자아를 잃고 크라반의 노예로 변한다. 하인들이 전부 보고 있는데서 옷을 벗으라면 벗고, 볼일을 보라고 명령하면 그 자리에 앉아 볼일을 본다. 심지어 동생은 벽을 향해 돌진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벽에 머리를 박고 자살을 하고 말았다.

홀리바인 가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크라반에게 장악된 상태였고, 가족을 구하기 위해서는 크라반을 따르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수고했어요. 식사를 준비해 두었으니까 들어가세요.”

크라반은 식당을 가리켰다.

“별로 생각이 없소이다.”

“식사가 준비됐으니까 들어가서 먹으라고 했지, 네 생각을 물은 게 아냐, 프리메우스.”

크라반의 목소리가 차갑게 돌변했다.

“아, 알았소.”

프리메우스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우뚝!

식당 문을 열었던 프리메우스는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식당에는 그의 가족이 모여 앉아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식탁은 한편으로 치워놓고 바닥에 앉아 있었는데 전부가 알몸이었다.

장성한 아들과 엄마와 딸과 며느리, 사위, 손자손녀 전부가 알몸으로 둘러앉아 있었다.

“호호호! 어서 오세요, 여보. 늦으셨네요.”

프리메우스의 부인이 환하게 웃으면서 일어났다.

“죽일…….”

프리메우스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디아칸!”

뒤따라 들어온 크라반이 프리메우스 둘째 아들을 불렀다.

“말씀하십시오, 마스터!”

건장한 체격의 청년이 벌떡 일어났다.

“네 아비가 디아칸 네 왼팔이 보기 싫다고 하는구나. 잘라서 버리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마스터.”

디아칸은 식도가 있는 곳으로 가더니 고기 자를 때 쓰는 칼을 집어 들고, 도마 위에 왼팔을 올렸다.

“자, 잘못했소, 크라반.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요. 한 번만 용서해 주시오.”

휙!

프리메우스가 애원하는 사이에 디아칸은 식도를 힘껏 내리찍었다.

퍼억!

왼팔의 팔꿈치가 잘려나가고 피가 튀었다.

하지만 디아칸은 고통을 느끼지 못한 듯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는 지혈할 생각은 하지 않고 떨어져 나간 팔을 들어 화덕 안으로 던져 넣었다.

“이걸 상처에 발라라.”

크라반은 품속에서 약통을 꺼내 던졌다.

“감사합니다, 마스터.”

디아칸은 통 안에서 약을 꺼내 잘려나간 부위에 발랐다. 그러고는 그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가주님도 자리로 가 앉으세요.”

다시 집사의 신분으로 돌아간 것처럼 크라반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프리메우스에게 자리를 가리켰다.

프리메우스는 좀비처럼 가족들 틈바구니에 끼어 앉았다.

“지금부터 즐겁게 식사하는 거예요. 아주 행복한 가족처럼 말이에요. 시작하세요.”

“호호호! 여보, 이것 좀 드셔 보세요. 아주 맛있어요.”

크라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프리메우스 부인은 음식을 덜어 내밀었다.

“어머니 말이 맞아요, 아버지. 드셔 보세요.”

둘째 아들 디아칸이 맞장구를 쳤다.

“그, 그렇구려. 아주 맛있소, 부인.”

프리메우스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주 행복한 가족의 모습이에요.”

그런 프리메우스 가족을 바라보는 크라반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어렸다.

* * *

칠흑 같은 어두운 밤.

검은색 로브를 걸친 자가 황실 미로의 정원을 걷고 있었다. 잘 아는 길을 가는 것처럼 로브 사내의 걸음걸이는 거침없었다. 앞이 가로막힐 때마다 이리저리 방향을 틀던 사내는 어느 순간 앞을 가로막은 벽을 향해 거침없이 걸었다. 벽은 손가락 굵기의 가시가 잔뜩 나 있는 가시나무로 뒤덮여 있었다.

사내가 가시나무 벽을 향해 오른발을 내밀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마치 거짓말처럼 사내의 몸이 가시나무 벽 안으로 사라진 것이었다.

놀랍게도 그곳은 가시나무 벽으로 위장한 마법의 문이었다. 잠시 후 사내가 도착한 곳은 가로 세로 10미터가량 되는 공간이었다.

그곳에는 이미 먼저 온 자가 있었다. 광장의 구석에 앉아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자는 다름 아닌 마왕이었다.

마왕을 발견한 사내는 로브 후드를 벗었다. 바로 제2원로 쿤할이었다.

“어서 오게.”

마왕은 웃으며 쿤할을 맞았다.

쿤할은 마왕 앞으로 걸어갔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마왕을 바라보는 쿤할의 얼굴이 굳어졌다. 전과 달라진 마왕의 모습 때문이었다. 굳이 힘을 뿜어내지 않아도 마왕 몸 주위엔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는 역장이 형성돼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건 곧 모든 힘을 잃었거나 원래의 경지를 뛰어넘었다는 걸 뜻한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현재의 경지를 뛰어넘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내가 이상하게 보이는가?”

“아픈 분처럼 보입니다.”

쿤할은 마왕 앞으로 정좌했다.

“여기 생각나는가?”

마왕은 술을 한 잔 따라 쿤할에게 내밀었다.

“잊을 수 없는 곳이지요.”

쿤할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린 시절 우연히 발견한 공간으로, 문 대륙을 탈출하여 이곳으로 건너왔던 이들이 만들어 놓은 비밀의 방이었다. 이곳에는 초기에 만들어진 전투기갑부터 고대 마족의 마법 그리고 많은 역사적 기록들이 남아 있었다.

더불어 상당한 수의 마나단과 검술 교본도 있었다. 이곳에서 얻은 마나단을 복용하고 검술을 익힌 덕분에 마왕은 다른 형제들을 물리치고 왕이 될 수 있었다.

쿤할과 마왕에게 이곳은 기연의 방이었다.

“자네뿐만 아니라 나를 만든 곳이지.”

“폐하는 원래부터 영민하셨습니다. 굳이 이곳이 아니더라도 마왕 자리에 올라섰을 겁니다.”

“내 얼굴에 금칠을 하는군.”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이곳에서 발견한 물건 중에 자네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게 있네.”

“그런 것도 있었습니까?”

“제목이 적혀 있지 않은 피루스 묶음이었는데 거기엔 아반 족과 드반 족이라는 생소한 종족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네.”

“그런 종족도 있습니까?”

“우리보다 앞서 대륙의 주인이었던 자들인데 태양의 신 아반을 모셨던 자들과 달의 신 드반을 모셨던 자들이네. 그들은 드래곤과 전쟁을 치렀던 자들이기도 하네.”

“드래곤은 다두 드래곤과 전쟁을 치른 걸로 알고 있는데 아닙니까?”

“그 다두 드래곤을 만들어 낸 자들이 바로 두 종족 중 아반 족이었네.”

“사실입니까?”

“그렇다네. 아반 족은 주로 마법사들로 구성돼 있고, 드반 족은 기사들로 구성돼 있었는데, 현재 우리가 익히고 있는 많은 마법과 마법 이론들을 만들어 낸 자들이 바로 아반 족이네.”

“하면 드반 족은?”

“그들은 아반 족이 창안한 마법과 검술을 익혀 대륙의 몬스터들과 전쟁을 벌이며 부족민을 보호했다네. 그러다가 힘이 강해지자 스스로 신의 아들이라 칭하며 드래고닉이라고 했다네.”

“오래전에 멸종했다는 전설의 종족이 바로 그들이었단 말입니까?”

쿤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드래고닉은 신화 속에 등장하는 전설의 종족이었다. 그런데 드반 족의 다른 이름이라니. 놀라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이 자신들을 신의 아들이라 칭한 것은 바로 아반 족이 만들어 준 마법과 검술을 익히고 강해졌기 때문이었네. 그러다가 지상 최강의 무기인 다두 드래곤을 아반 족이 만들어 내자, 그걸 차지하기 위해 반기를 들게 되네.”

“다두 드래곤이 키메라였단 말입니까?”

“그렇네.”

“세상에!”

쿤할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지금까지 존재했던 종족 중 가장 강한 종족이 바로 다두 드래곤이다. 그런데 그들이 키메라라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