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
너무 놀라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 책에는 다두 드래곤을 만들어 낸 아반 족은 드래곤에 의해 멸종했다고 돼 있었네.”
“하면 드반 족은?”
“드반 족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네. 그러다가 문득 드반드쉬라는 인물이 떠올랐네.”
“차원의 벽을 세운 자 말입니까?”
“그렇네. 그리고 ‘드쉬’라는 말은 아반어인데 누구누구를 모시는 자라는 뜻이네.”
“그렇다면 드반드쉬는 ‘드반 신을 모시는 자’라는 뜻이군요.”
“그렇네.”
“그럼 드반 족은 우리들 속에 스며들어 와 있었다는 거군요.”
“날 이렇게 만든 자들이 바로 드반 족이네.”
“어느 정도입니까?”
“일반 검사의 검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네.”
“치료 방법은 없습니까?”
“날 이렇게 만든 게 어떤 건지도 모르네.”
“낌새도 채지 못한 겁니까?”
“하나하나 떨어져 있을 땐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하지만 두 개 내지 세 가지 물질이 합쳐지면 목숨을 앗아가는 특수한 합성독에 당했네.”
“폐하의 최측근에게 당했단 말이군요.”
“그런데 그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거네.”
“그들이 드반 족이란 말입니까?”
“합성독이란 말은 아반 족이 만들어낸 독 중의 하나였네.”
“만일 말입니다, 폐하 주위에 있는 자들을 전부 없애면 그땐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그렇게 되면 꼬리만 자르게 되겠지.”
“몸통은 여전히 살아 있을 거란 말이군요.”
“놈들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자네가 마계를 떠나야 하네.”
“그럼 폐하는…….”
“마계를 다스리려면 내가 있어야 하니까 당분간 목숨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네.”
“제게 뭘 바라십니까?”
“자네가 떠나면 우리 마계에서 암약하고 있던 드반 족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할 테고 마계는 그들의 차지가 될 거네. 우리 마계가 이 지경이면 천계 또한 다르지 않을 거고.”
“쿤할과 힘을 합쳐야 한다는 거군요.”
“그게 최선이네. 아니면 우린 드래고닉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 거네.”
“알았습니다, 폐하.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만 일어나세.”
마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품속에서 반지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그것은 마왕의 인장 ‘얀크라’였다.
“폐하!”
“만일에 대비해서 주는 거네. 받아 놓게.”
“알겠습니다, 폐하.”
쿤할은 고개를 숙이고는 정중하게 얀크라를 받았다.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자네가 마왕이 돼야 하네.”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폐하!”
“아무튼 이제 속이 후련하네.”
마왕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제가 돌아올 때까지 반드시 살아계셔야 합니다.”
“내 걱정은 말고 살아 돌아올 궁리나 하게. 악수나 한 번 하세.”
마왕은 손을 내밀었다.
쿤할이 마왕의 손을 잡았다.
둘은 손을 잡은 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수고하게.”
“폐하도 몸조심하십시오.”
“나 먼저 가겠네.”
마왕은 쿤할의 어깨를 툭 치고는 공간을 빠져나갔다.
쿤할이 그곳을 나온 것은 마왕이 나가고 10분 후였다. 마왕이 남기고 간 술병을 전부 비운 그는 로브로 얼굴을 가리고 비밀의 공간을 빠져나와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그로부터 닷새 후.
쿤할을 비롯한 6천 명의 마족 전사를 태운 전함 1백여 척이 휴도니아 대륙으로 향했다. 그리고 추가 병력 15만 명이 마계 서쪽 항구로 집결했다.
* * *
천계와 마계가 드래고닉으로 열병을 앓는 그 시각.
인간들이 사는 휴도니아 대륙에서는 전쟁으로 인해 열병을 앓았다.
북로군벌과 서로군벌 그리고 발탄 제국 영지군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는 발탄 제국 영지군이 승리를 거뒀지만 펠콘 성과 고칸 성으로 진격했던 후작들이 참패를 당하는 바람에 어느 쪽도 승리했다고 자신할 수 없는 애매한 상황이 벌어졌다.
아무튼 승리를 주고받게 되자 양측의 전쟁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디자이너, 자넨 라파에 다녀와.”
“정찰을 하고 오라고요?”
“할먼 상단 지부를 찾아가서 술병 주인이 상단주를 보고 싶어 하더라는 말을 전해.”
“그 말만 전하면 됩니까?”
“라헤나와 다란과 함께 가.”
“알겠습니다, 마스터.”
알마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라헤나와 다란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세 사람이 나가고 나자 김필도도 자리에서 일어나 동굴을 나섰다. 비가 오려는 듯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어 별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가려고?”
더위를 피해 밖으로 나온 듯 바람을 쐬고 있던 이카렌이 말을 걸어왔다.
“정찰.”
“이 밤에?”
“정찰은 밤에 해야 하는 거잖아.”
“맞아. 그렇지.”
이카렌은 피식 웃었다.
“요샌 많이 풀어진 것 같네?”
“할 일이 없으니까 감각마저 무뎌지나 봐. 아무래도 새롭게 무장을 해야 할 것 같아.”
이카렌은 김필도를 보았다.
“함께 가자고?”
“방해가 안 된다면.”
“그렇게 하지 뭐.”
김필도는 다시 동굴로 들어갔다.
“라이자칸!”
“네.”
수련에 열중하고 있던 라이자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그런데 그의 키가 전보다 50센티미터나 더 커져 있었다. 맹약의 구슬과 잊힌 전설의 검으로 인해 각성을 한 덕분이었다. 각성을 한 후에도 라이자칸은 쉬지 않고 연공을 하여 각성하면서 얻은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정찰 다녀올게요.”
“혼자 가실 겁니까?”
“이카렌이 허리에 붙은 살을 빼고 싶대요.”
“허허허! 그동안 편안하기는 했죠. 다녀오십시오.”
“하라미는 뭐해요?”
“요새 마법에 재미를 붙여서 정신이 없습니다.”
“간혹 얼굴도 좀 보자고 하세요.”
“알았습니다, 마스터.”
“다녀올게요.”
김필도는 이카렌의 옆구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마법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속삭이는 바람! 창공을 나는 바람이 된다! 플라이!”
그의 입에서 나직한 주문이 흘러나오고 이카렌과 김필도의 신형이 절벽 위로 날아 올라갔다.
잠시 후 김필도와 이카렌은 절벽 위에 내려섰다.
김필도는 나침반을 살폈다. 이곳 위치를 알아두어야 헤매지 않고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저쪽이 북쪽이야.”
김필도는 왼편을 가리켰다.
“가 볼까?”
“응!”
둘은 바로 몸을 날렸다. 절벽 뒤쪽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었지만 둘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그재그로 방향을 틀면서 아래로 내려갔다. 바닥에 내려서서는 다시 한 번 나침반을 살피고 몸을 날렸다.
툭! 툭툭!
5분여를 달렸을 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올 것 같은데 돌아갈까?”
김필도는 이카렌을 돌아보며 물었다.
“나는 좋은데?”
“계속 가자고?”
“응!”
“나중에 딴소리하지 않기다?”
“가기나 해.”
“알았어!”
파앗! 파앗!
김필도와 이카렌은 전방으로 질주했다.
우르릉!
번쩍!
쏴아아아!
채 2분도 달리지 않았는데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김필도와 이카렌은 금세 속옷까지 푹 젖었다.
“말로만 듣던 스콜인가?”
김필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의 손가락 두께의 빗방울이 나뭇잎을 후려쳤다.
“무슨 비가 손가락 두께나 되냐.”
이카렌은 놀란 얼굴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빗줄기가 얼마나 굵은지 마치 누군가 나무 위에서 아래로 붓는 것 같았다.
“그러게. 이 정도면 폭포다.”
김필도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태어나 이렇게 두꺼운 비는 처음 보았다. 한 대 맞을 때마다 고통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도 더운 것보다는 훨씬 낫네 뭐.”
“그렇긴 하다.”
둘은 다시 비를 뚫고 내달렸다.
그렇게 봉우리를 넘고 몇 개의 계곡을 지나자 눈앞에 느닷없이 정적이 흐르는 장소가 나타났다.
김필도와 이카렌이 느끼는 정적은 일상적인 고요한 상태를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빗소리와 바람소리는 요란하게 나뭇잎과 지면을 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요함이 주위를 잠식하고 있었다.
그들이 느끼는 정적은 오감이 아닌 육감이 느끼는 고요함이기 때문이다. 그건 곧 지금 있는 이곳이 노르카의 영역이란 뜻이기도 했다.
김필도와 이카렌은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이동했다. 빗소리가 워낙 거세 소리가 들릴 상황은 아니지만, 노르카 정도 되면 걸음을 옮길 때의 진동으로 상대를 파악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다닐 수밖에 없었다.
툭!
감각을 최대한 열고 주위를 살피고 있는데, 어깨를 툭 치는 손길이 있었다. 김필도는 고개를 돌렸다.
이카렌이 오른편을 가리키고 있었다.
‘응?’
김필도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이카렌이 가리킨 곳에는 엄청나다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로 거대한 나무가 서 있었다. 얼마나 큰지 신화 속에 등장한다는 세계수가 있다면 저런 크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둘은 주위를 살피며 나무로 접근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놀라움은 더욱 커졌다. 키는 말할 것도 없고 나무 밑동의 지름만 해도 20미터는 돼 보였다.
지상과 맞닿아 있는 부분에는 동굴처럼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감각을 집중하여 안쪽을 살핀 김필도는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는 발을 들여놓았다.
“밝음, 그 아름다움. 세상을 밝힌다, 라이트!”
라이트 마법을 펼치자 안쪽이 환하게 밝아졌다.
나무속은 웬만한 가정의 거실만큼 컸다.
중앙에 빛을 고정시키고 안쪽을 살폈다. 그곳은 나무가 썩어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각 방향에는 창처럼 작은 구멍이 나 있어 밖을 살피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인공의 흔적이야.”
안을 살피던 이카렌이 한 곳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평상 형태로 다듬어진 물체가 있었다. 그런데 그건 외부에 들여온 물건이 아니라 지면으로 튀어나온 뿌리를 다듬어 평상처럼 만든 것이었다.
인공이 가미된 흔적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한쪽 구석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도 있었다.
라이트 마법을 해제하고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쪽은 위쪽보다 더 넓고 아늑했다. 몇 개의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공간을 나누는 벽은 나무 뿌리였다.
김필도는 다시 라이트 마법을 펼쳤다.
불이 밝혀지자 안쪽 전경을 좀 더 자세하게 볼 수 있었다.
“이 정도면 가정집이네.”
김필도는 전방으로 걸어갔다. 서재인 듯 그곳에는 책장과 책상이 놓여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책장과 책상에서는 세월이 느껴졌다.
책상 앞으로 다가간 그는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는 둥글게 말린 종이가 마치 쿠바 담배 시거처럼 놓여 있었다. 그것들 중 하나를 꺼내 펼쳤다.
제9장 아주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방법
-이제 그의 죽음만 기다리면 되네. 그럼 우리 노르카는 발탄 제국의 주인이 되네.
“이것 봐라?”
김필도는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안쪽에 있는 종이를 전부 꺼내 책상 위에 늘어놓고 하나씩 읽어나갔다.
종이에 적힌 내용은 현 황제의 아버지 디칸 가이우스로부터 온 것들이었다. 그것들 중에는 김필도의 외할아버지인 발몬 하이저 황제 암살 사건 때 크로가 움직이지 않았던 이유도 적혀 있었다.
-베쿠스 델리카슨으로부터 맹세를 얻어냈네. 발탄 제국과 신의 정원 사이에서 이중첩자 노릇을 하고 있는 걸 크로 대원들에게 밝히겠다고 했더니 조용히 물러나겠다고 하였네. 좀 더 확실한 신뢰를 얻기 위해 빠른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가족을 없애겠다는 협박도 곁들였다네. 그는 절대 반항하지 못하네.
“별것 아니었네.”
김필도는 피식 웃었다.
크로가 외조부의 암살 사건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침묵을 택했던 이면에는 제국의 운명과 관련된 엄청난 뭔가가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없었다. 베쿠스 델리카슨이 발탄 제국과 신의 정원 사이의 이중 첩자였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배신을 한 아주 개인적이고 소소한 사건에 불과했다.
김필도는 다시 몇 개를 더 읽어보았다. 대부분의 내용이 황실에 있던 디칸 가이우스가 보낸 것들이었다.
-크로는 발몬 하이저의 심복인 노반이 맡기로 했네. 발몬 하이저는 노반이 우리 노르카의 단장이란 사실을 꿈에도 알지 못하네. 아니 어쩌면 죽기 전에는 알는지 모르겠네. 그리고 며칠 전부터 황제에게 보클라를 먹이기 시작했네. 그리고 차차 드라파세와 소다수를 먹일 참이네. 그럼 그는 영원히 일어나지 못할 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