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
“결국엔 독살이네.”
김필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발몬 하이저 아이작 황제는 가장 고전적인 방법에 의해 숨을 거둔 것 같았다. 종이 뭉치를 다시 종이를 다시 원래대로 해 놓고 다른 곳을 뒤졌다.
노르카들이 어떻게 해서 이곳에 정착해 살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였다. 김필도가 원하는 정보는 책장 아래쪽에서 나왔다.
기름을 먹인 가죽으로 만든 아주 오래된 책이었다.
그 책에는 땅의 정령전사 노르카들이 행칼에서 탈출하여 대륙을 떠돌다가 이곳에 정착한 기록이 연대순으로 적혀 있었다.
“카이우스 가문이었구먼.”
맨 마지막 장을 보던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 황제의 가문은 신의 정원에서 퇴출된 카이우스 가문이었다. 김필도는 양피지로 만든 책을 원래 위치로 집어넣고 서랍을 닫았다.
그때 이카렌이 다가왔다.
“뭐 좀 찾았어?”
김필도는 그녀를 보며 물었다.
“한가운데 욕실이 있다는 것과 상당히 고위급 인사가 머물던 장소라는 것 정도가 내가 알아낸 전부야.”
“일단 이곳을 베이스캠프로 하고 주위를 둘러보는 게 낫겠네.”
“그렇게 하자.”
둘은 다시 밖으로 나왔다. 비는 여전히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폭포처럼 쏟아졌다.
김필도와 이카렌은 비를 뚫고 주위를 헤매고 다녔다. 그 후로도 커다란 고목이나 동굴 또는 바위 아래쪽에서 숙소로 보이는 장소를 발견하긴 했지만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노르카는 보이지 않았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장소를 옮겼을까?”
처음 발견한 나무 아래쪽 공간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카렌이 물었다.
“그건 아닌 것 같아.”
“그럼 그 많던 자들이 다 어디로 간 거니?”
“어쩌면 황실로 갔을지도 몰라.”
“황실?”
“이곳에서 크로가 몰살을 당했잖아.”
“그러니까 전쟁은 점점 치열해지고 있는데, 어둠 속에서 황제를 지켜야 할 자들이 한 명도 없다는 뜻?”
“일단은 추측이야. 내일이면 좀 더 정확한 걸 알 수 있겠지.”
어느새 둘은 커다란 고목 앞에 도착해 있었다. 대충 빗물을 털어내고는 고목 아래로 들어갔다.
“모처럼 긴장 좀 하는가 했더니 또 살만 찌게 생겼네.”
이카렌은 피식 웃더니 오른편 공간으로 김필도를 잡아끌었다. 그녀가 김필도를 데리고 들어간 곳은 욕실이었다. 다른 곳과 달리 공을 많이 들인 듯 물이 차 있는 곳 바닥에는 반짝이는 돌이 깔려 있었다. 불을 밝히지 않고 목욕을 하기 위해서인 듯했다.
“씻게?”
“이 상태로 잘 순 없잖아.”
이카렌은 바로 옆에 김필도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듯 옷을 훌훌 벗어던졌다. 상의와 하의를 물론이고 속옷까지 벗고 물 안으로 들어갔다.
김필도는 황당한 얼굴로 이카렌을 바라보았다.
욕조 바닥에 깔린 빛나는 광석으로 인해 이카렌의 알몸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안 들어올 거야?”
이카렌은 김필도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몬스터처럼 보여?”
몬스터 취급하는 게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런데 그 행동은 뭔데?”
“어떤 행동?”
“내가 보는 앞에서 옷을 훌훌 벗어던졌잖아.”
“처음도 아니면서 뭘 그래?”
“처음도 아니라고?”
“이야크 평원에서 처음 만났을 때 함께 목욕했던 기억 안 나?”
“참 그것 좀 물어보자. 그땐 왜 그랬는데?”
김필도는 옷을 벗었다. 계속 서 있으면 분위기만 어색해질 것 같았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옷을 벗으려고 했지만 어색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나만의 시험 방법이었어.”
“함께 여행해도 괜찮은 남자인지 알아보기 위해 옷을 벗고 들어왔다는 거야?”
“몸의 반응과 입에서 나오는 말을 종합하면 성격을 대충 파악할 수 있거든.”
“그래서 어떤 결론을 내렸는데?”
김필도는 속옷을 벗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젊음은 활화산처럼 타올랐지만 그도 어쩔 수 없었다.
“본능에 충실한 신체 건강한 사내.”
이카렌은 김필도를 빤히 바라보며 대답했다.
“제 주제도 모르는 놈이라고 속으로 많이 비웃었겠네.”
“아니 처음엔 그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어떻게 됐는데?”
“멋진 사내로 변해 가던데?”
이카렌은 김필도 옆으로 다가앉았다.
“눈 감을까?”
김필도는 얼굴을 찌푸렸다. 바닥에 깔린 빛나는 돌이 조명처럼 물속을 환하게 밝히는 바람에 이카렌의 몸이 속속들이 전부 보였다. 눈을 어디로 둬야 할지 난감했다.
“그럼 이렇게 할까?”
이카렌은 뿔 옆에 묶어 두었던 머리를 풀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머리가 가슴을 살짝 가렸다.
“더 선정적이야.”
김필도는 피식 웃으며 뒤쪽으로 고개를 기댔다. 그리고 불의 속성 마법을 펼쳐 물을 데웠다. 물이 따뜻해지자 몸이 노곤하게 풀렸다.
“팔 빌려 줄까?”
김필도는 말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이카렌의 팔이 목에 와 닿았다. 강인해 보이는 것과는 달리 그녀의 피부는 기름을 칠해놓은 것처럼 매끄럽고 부드러웠다.
김필도는 눈을 떴다. 매끈하고 공처럼 탄탄하고 풍만한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얼른 눈을 감아버렸다.
“옛날엔 내가 여자에게 팔을 빌려 줬는데.”
“여자의 팔을 베고 있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지?”
“상대방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왠지 모르게 초라해지는 그런 느낌 있잖아.”
“자격지심?”
“그런 걸 자격지심이라고 하는 거야?”
“응!”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사실 난 가진 거 아무것도 없는 고아였거든. 성도 없었고.”
“성도 없었다고……?”
이카렌은 의아한 얼굴로 김필도를 보았다. 그에게는 분명 프리우스라는 성이 있다. 그런데 성이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는 질문이 입안에서 맴돌았지만 꿀꺽 삼켜버렸다.
“나와 필녀가 성을 갖게 된 건 고아원에서 탈출한 후였어. 고아원은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들을 한곳에 수용해서 길러주는 곳이야.”
“좋은 곳이네.”
“맞아. 길거리에서 얼어 죽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좋은 곳이지. 아무튼 필녀와 내가 그곳을 나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이름을 짓는 거였어. 고아원 원장이 지어 준 이름이 있긴 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 나는 필히 돈을 많이 벌자는 의미로 필도라고 했고, 그녀는 필도의 여자라는 뜻으로 필녀라고 했어. 성은 가장 흔한 성인 김 씨로 했고. 그래서 김필도, 김필녀가 된 거야. 모든 게 좋았어. 비록 음지 생활이었지만 꿈도 꿀 수 있었고. 필녀가 죽기 전까지는…….”
마치 일기를 읽는 것처럼 입에서 지난 사연이 흘러나왔다.
이카렌은 처음엔 무슨 말인지 알지를 못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김필도가 이곳 사람이 아닌,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이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이곳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이방인이야.”
“그랬구나.”
이카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 울어?”
“울어야 해?”
“난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죽었어, 이카렌. 차원을 넘을 때 한 번 죽었고, 세이아칸 그놈에게 두 번째 죽임을 당했단 말이야.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심장이 멈춘 그런 죽음 말이야. 그런 죽음을 견뎌내며 치열하게 살고 있는 사내의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슬프지 않다는 거야?”
“내가 슬퍼하기를 바라는 거야?”
“그래야 기회가 생기니까.”
“무슨 기회?”
“서로 슬픔을 공유하다 보면 상대방에 대한 경계심이 느슨해지는데, 늑대의 본성을 숨기고 있는 사내가 가장 기다리는 순간이거든.”
“그러니까 내가 슬픔에 못 이겨 이렇게 해 주기를 바랐다는 거지?”
이카렌은 몸을 돌려 김필도 허벅지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그러고는 그를 껴안았다. 그의 얼굴이 그녀의 가슴에 묻히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이것도 너무 선정적인데?”
김필도는 손을 돌려 이카렌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슬픔이 북받치는 상황을 선정적이라고 표현하면 안 되는 거야.”
“그럼 북받친 슬픔이 진정될 때까지 가만히 있어야겠네.”
“그래야지.”
둘은 그 상태로 가만히 있었다.
“지금도 그래?”
한동안 꼼짝 없이 있던 이카렌이 입을 열었다.
“뭐가?”
“아직도 영혼의 일부가 찢겨나간 것처럼 아프냐고. 맛있는 걸 먹어도,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자도, 다른 세상으로 와도. 늘 가슴 한편에서는 겨울바람보다 더 차가운 바람이 드나든다고 했잖아.”
“아! 그거?”
“그래.”
“그건 네게 멋있게 보이려고 한 말일 뿐이야.”
“진짜?”
“그렇다니까. 그런데 그 말에 감동 먹은 거야?”
“응! 진짜로 감동 먹었어. 시간만 충분했다면 널 가졌을 거야.”
이카렌은 가슴에 파묻어 있는 김필도의 얼굴을 떼어내고는 고개를 숙였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울었어?”
이카렌의 얼굴엔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안 울었어.”
“그럼 이건 뭔데?”
김필도는 이카렌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이카렌은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이번엔 가볍게 입술을 스치는 키스가 아닌, 긴긴 입맞춤이었다. 둘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서로에게 몰두했다.
입을 뗀 이카렌은 그윽한 눈길로 김필도를 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입을 맞췄다.
두 번째 입맞춤은 좀 더 격정적이었다. 숨결이 거칠어지고, 열정적으로 서로를 보듬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이카렌은 입을 뗐다. 그녀는 여전히 김필도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세 번째야.”
이카렌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세 번째?”
“딥키스를 세 번 하면 연인이 된다고 했잖아.”
“그것도 속임…….”
김필도는 말을 맺지 못했다.
이카렌의 입술과 몸이 동시에 김필도를 장악해 버린 탓이었다.
김필도는 저도 모르게 이카렌의 엉덩이를 그러쥐었다. 물이 싸늘하게 식었지만 김필도와 이카렌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서로의 눈을 응시하면서 거칠게 몸을 움직였다.
둘의 마음속에는 김필녀도 히데우스도 없었다. 오직 서로를 향한 열정과 갈망뿐이었다.
어쩌면 김필녀와 히데우스가 없기에 더 안타까웠는지도 몰랐다. 아니 상대방을 김필녀로 또는 히데우스로 생각했는지도…….
둘의 열정은 식을 줄을 몰랐다. 마치 며칠을 굶은 짐승이 음식을 탐하듯 상대방을 끌어당겼다. 물속에서 시작했던 탐험은 밖으로 나와서까지 이어졌다.
정렬을 불태우던 김필도와 이카렌은 아침이 돼서야 잠이 들었다. 그리고 저녁 무렵에 깼다.
“어색할 줄 알았는데.”
이카렌은 엷게 웃었다.
“나는 조금 어색해.”
친구 정도로 생각했는데 갑작스럽게 너무 진도가 나간 것 같아 공연히 머쓱했다.
“진짜?”
이카렌은 김필도 위로 올라가며 물었다.
“언젠가는 자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긴 했어.”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응.”
“후회하는 건 아니고?”
“그럴 리 없다는 걸 알잖아.”
“정말이지?”
“그렇다니까.”
“고마워.”
이카렌은 가볍게 키스했다. 그리고 둘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위로 올라왔다.
비는 여전히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다.
“아예 비 그치면 갈까?”
김필도는 이카렌을 보며 물었다.
“난 좋아.”
이카렌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이곳에서 쉴까?”
“근데 배고프다.”
“식사야 늘 준비돼 있지.”
김필도는 아공간을 열고 음식과 카판 그리고 평상에 깔 것들을 꺼내 놓았다.
이카렌이 평상을 정리하는 사이에 김필도는 카판을 내렸다. 그가 물을 데우는 데 쓰는 열원은 파이어 볼로 만들어낸 불길이었다. 먼저 카판을 한잔하고 싶어서 급하게 데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