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198화 (198/225)

# 198

“카판은 내가 내릴게.”

주전자 주둥이에서 김이 흘러나오자 이카렌은 카판을 내리는 도구에 주전자를 올리더니 창가, 즉 커다란 구멍이 뚫린 곳 옆으로 갔다. 원래 주인도 그 자리를 자주 이용한 듯 마른 풀이 푹신하게 깔려 있었다.

그곳에 자리를 잡고 카판을 내렸다.

향긋한 카판 향이 금세 내부를 가득 채웠다.

그사이에 김필도는 한편에 쌓여 있는 암탄을 가져와 불을 피우고 삼각대 쇠사슬에 솥을 걸었다.

“카판 다 내려졌어!”

“알았어.”

김필도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카렌 옆으로 갔다.

“자!”

이카렌은 내린 카판을 김필도에게 내밀었다.

김필도는 카판 향을 음미하다가 한 모금 들이켰다. 카판의 맛은 아주 부드럽고 깊었다.

“잘 내렸네.”

“네게 배운 건데 잘할 수밖에.”

“오랜만에 느껴보는 여유네.”

김필도는 구멍 밖을 보았다. 전날보다는 조금 약해졌지만 여전히 강하게 내리치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이카렌은 카판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앞으로?”

김필도는 이카렌을 바라보았다.

“싫든 좋든 세상과 엮이고 말았잖아.”

김필도가 처한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 주변에 모여 있는 마족 전사는 1천 명이 넘고, 천족도 150여 명 있다. 게다가 드워프와 엘프의 대표부족의 후예도 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상은 그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숨고 싶다고 해서 숨어지진 않겠지?”

“그렇기엔 네가 지닌 힘이 너무 커졌어. 역사 또한 네게 사명을 부여했고.”

“역사가 사명을 부여했다는 건 무슨 소리래?”

김필도는 황당하다는 듯이 눈을 끔벅였다.

“역사가 네게 사명을 부여했다는 말이 너무 거창해서?”

“나는 역사적으로 놀 만한 사람이 절대 아니거든.”

“전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렇게 변했어. 하늘이 네게 실전 마법과 헬칸과 헤를리온을 준 것은, 그 힘이 아니면 해낼 수 없는 거대한 일이 일어날 거란 암시야. 어쩌면 그 일은 우리는 물론이고 다섯 종족의 운명을 결정짓는 일이 될지도 몰라.”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내 생각은 그래.”

“그럼 꿈을 수정해야 되는데?”

“지금까지는 어떤 꿈을 꾸었는데?”

“돈에 파묻혀 죽는 거.”

“풋! 너다운 생각이다.”

이카렌은 피식 웃었다. 그를 좋아하게 된 이유가 바로 저런 모습 때문일 테다. 다섯 종족을 통틀어도 그보다 강한 전사는 없다. 그 정도 실력이면 천하의 주인이 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니 많은 이들은 그런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런데 돈이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돈 버는 거야.”

“그래도 세속적인 꿈이지.”

“아무튼 내 꿈은 그거야.”

“널 귀찮게 하는 자들은 어떻게 할 건데?”

“그래서 날 방해하지 못하게 하려고, 이렇게 열심히 뛰고 있잖아. 어이쿠! 밥 탄내 난다.”

김필도는 벌떡 일어나서 솥이 있는 곳으로 갔다.

잠시 후 김필도와 이카렌은 막 지어진 쌀밥에 김치 그리고 다진 고기를 깻잎에 붙여 부친 깻잎 전으로 식사를 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이카렌은 처음 먹는 음식이었지만 꿀처럼 맛있게 먹었다.

“전엔 이렇게 먹었어?”

식사를 마치고 나자 이카렌이 물었다.

“간단하게 차린 거야. 어때?”

“이건 좀 맵고, 이건 아주 괜찮았어.”

이카렌은 김치와 깻잎 전을 가리켰다.

“이건 김치라는 음식인데 은근히 중독성이 있는 녀석이야.”

“너처럼?”

“내가 중독성이 있어?”

“약효가 너무 강해서 한번 빠지면 절대 헤어나지 못할 정도로 강해.”

“그거 칭찬이지?”

“당연하지.”

이카렌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가 심하게 고픈 듯 김필도와 이카렌은 두 그릇씩 해치웠다. 그리고 설거지를 끝내고 창가로 자리를 옮겨 이번에는 술을 한 잔씩 했다.

“오는 놈들만 정리할 참이야.”

김필도는 술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조금 전에 그랬잖아.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널 방해하거나 막는 자들만 처리하겠다고?”

“응! 그리고 난 이곳이 아닌 문 대륙에서 살고 싶어.”

“만일 천왕이나 마왕 또는 발탄 제국의 황제가 문 대륙을 못 주겠다고 하면?”

“그들은 줄 수밖에 없어.”

“왜?”

“안 주면 그나마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게 될 테니까.”

“피이! 말은 쉽다.”

“날 믿어.”

김필도는 빙그레 웃었다. 김필도와 이카렌은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술은 어느새 바닥을 보였다.

“술도 다 마셨고, 이제 뭐하지?”

마지막 술잔을 비우고 난 김필도가 물었다.

“할 일이 없을까 봐 걱정돼?”

“실제로 할 게 아무것도 없잖아.”

“청춘남녀 둘만 있는데 할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야.”

이카렌은 김필도를 빤히 바라보며 입술을 축였다.

“그런 거야?”

“더구나 우린 이제 하룻밤을 함께했을 뿐이잖아.”

이카렌은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그러자 상의가 스르르 흘러내렸다.

또다시 동굴 안쪽은 열기가 휘몰아쳤다.

김필도와 이카렌이 동굴로 돌아온 건 다음날 점심 무렵이었다.

김필도와 이카렌을 맞아준 이는 하라미였다.

“둘만 다녀와도 되는 거예요?”

하라미는 김필도와 이카렌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숨겨둔 보물을 찾아 헤매는 트레져 헌터처럼 예리했다.

“마법 배우느라 바쁘다며?”

“아무리 바빠도 정찰 나갈 시간은 있다고요. 너 나 좀 보자.”

하라미는 이카렌을 잡아끌어 그녀의 동굴로 향했다.

“왜 그러세요?”

“사실대로 말해.”

“뭘 사실대로 말하라고요?”

“정찰만 하고 온 거야?”

“정찰 말고 할 게 없잖아요.”

“혹시 그 사람 몸까지 정찰한 거 아냐?”

“서, 설마 그, 그럴 리가요. 저, 절대 그런 일은 없었어요.”

이카렌은 딱 잡아뗐다.

“아무 일도 없었다면서 말은 왜 더듬는데?”

“그, 그거야 언니가 자꾸 다, 다그치니까.”

“그럼 보여 줘도 되겠네?”

“보여 줘요?”

“아무 일도 없었다면 못 보여 줄 것도 없잖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보여 주긴 뭘 보여줘요.”

“며칠 전엔 함께 목욕도 했으면서 왜 그래.”

“그, 그거야…….”

“보자니까.”

“보긴 뭘 본다고 그래요!”

둘은 얼마간 옥신각신했다. 하지만 동생인 이카렌이 먼저 항복하고 말았다.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인데 굳이 숨길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쁜 년!”

“헹! 언니보다 훨씬 빨리 만났고, 문 대륙에서만 키스를 세 번이나 했네요.”

이카렌은 혀를 쑥 내밀었다.

“그래도 넌 과부잖아!”

“마족은 과부가 되는 순간 가주의 소유가 된다고요.”

“그래서 당당하다고?”

“언젠가는 그렇게 될 건데 그 시기가 조금 당겨진 것뿐이에요. 그리고 이제 6백 살도 안 됐는데 수천 년을 혼자서 어떻게 살아요?”

“그렇다고 남의 신랑을 채가냐?”

“아직 언니 아빠 허락을 받지도 못했으면서 신랑은 무슨.”

이카렌은 입을 삐죽였다.

“허락받을 거야!”

히라미는 콧김을 내뿜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수로 허락을 받을 건데요?”

“너 자꾸 염장 지를래?”

하라미는 이카렌을 흘겨보았다. 사실 그녀는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소식은 이미 들어갔을 테고, 아버지는 지금쯤 휴도니아 대륙으로 오는 배에 몸을 싣고 있을 것이다. 만나면 김필도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도와줄까요?”

“어떻게 도와줄 건데?”

“마계10군단 군단장도 그의 여자가 됐다고 하면 허락하지 않을까요?”

“그럼 아마 그를 더 죽이려들걸?”

“그렇겠죠?”

“열에 아홉은 그럴 거야.”

“그럼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네요.”

“뭔데?”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을 때 써먹는 아주 고전적인 방법이 있잖아요.”

“그게 뭔데?”

“임신이지 뭐겠어요.”

“그, 그러니까 나보고 아이를 가지라고?”

“가장 좋은 방법은 배가 불러 있는 건데, 그게 아니면 아이를 가졌다고 거짓말을 하면 돼요.”

“2백 년 전엔가 날 폭행하려는 녀석들이 있었거든?”

“어떻게 됐는데요?”

“아빠에게 맞아 죽었어.”

“그에게도 그럴 거라는 거예요?”

“우리 아빤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분이야.”

“그런 사람이 어떻게 총리대신을 해요?”

이카렌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총리대신은 국정 전반을 살피는 자리다. 그런 자리에 있는 자는 지극히 냉철하고 이성적이라야 한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세이아칸 그놈이 아빨 우습게보고 날 죽이려고 했겠지.”

“결국 언니 집안도 그분을 끝으로 이거란 말이네요?”

이카렌은 손으로 목을 스윽 그었다.

“어차피 아들도 없는데 뭐.”

“언니 아빠 입장에서는 가문을 이어받은 사내가 필요하겠네요.”

“그렇겠지.”

“그럼 그이와 결혼하는 건 틀렸네 뭐.”

이카렌은 임시로 만든 침대로 드러누우며 말했다.

“죽고 싶어?”

하라미는 주먹을 들어 때리는 시늉을 했다.

“상황이 그렇잖아, 상황이!”

“아무튼 아빠가 오기 전에 뭔가 수를 내야 해.”

“임신밖에 없다니까요.”

“정말 통할까?”

“날 믿어요, 언니.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니까. 물론 그가 좀 힘들긴 하겠지만 설마 아이 아빠를 죽이진 않을 거 아니에요.”

“끙!”

하라미는 얼굴을 찌푸리고는 이카렌 옆으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런데 어쩌다가 그를 덮치게 된 거야?”

이카렌은 은근한 얼굴로 물었다.

“그가 그래? 내가 덮쳤다고?”

“그 사람이 덮치기에는 언니 키가 너무 크잖아.”

“너는 네가 덮친 모양이지?”

“과부가 총각을 잡는 가장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방법이 덮치는 거라는 거 몰라요?”

“진짜 덮쳤다고?”

“누가 덮치든 결과만 같으면 되는 거잖아요.”

“지랄!”

하라미는 피식 웃었다.

이카렌을 그렇게 안 봤는데 대담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언니 때문이야.”

“내가 왜?”

“경쟁심 같은 거지 뭐.”

“풋! 나쁜 계집애.”

하라미는 피식 웃었다.

“어떻게 한 거냐고 물었잖아요.”

“여기 때문이었어.”

하라미는 자기 가슴 사이를 가리켰다.

“가슴으로 그를 사로잡았다고? 그가 가슴을 좋아해요?”

“가슴이 아니고 가슴 사이에 있는 러브 서클이야.”

“그건 누군가가 지어 낸 이야기라고 하던데요?”

“나도 그때까진 그렇게 알고 있었어.”

“그런데?”

“추워서 그를 가슴으로 끌어당겼어. 그런데 러브 서클이 사랑의 향을 뿜어내 버린 거야.”

“진짜?”

“나도 놀라서 기절하는 줄 알았어.”

“그를 덮치려고 일부러 그런 거 아니고요?”

“내가 뭐 남는 게 있다고 거짓말을 하니?”

“하긴. 그런데 정말로 사랑의 향기가 흘러나와요?”

“그와 단 이 있을 때만.”

“그러니까 결국은 언니도 그를 덮친 거 맞네 뭐.”

“내가 아니라 그가 덮친 거라니까?”

“언니가 유도한 거잖아요.”

“사랑의 향기는 저절로 흘러나오는 거야. 내뿜고 싶다고 해서 뿜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내가 알게 뭐람!”

이카렌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너 지금 질투하는 거지?”

“질투가 아니라 사랑의 향기라는 걸 믿을 수가 없어서 그러네요.”

“못 믿으면 나도 어쩔 수 없어. 하지만 분명히 나왔어. 나도 사랑의 향을 맡았어. 그래도 너보다 나은 건 한 가지 있네.”

이카렌보다 키도 크고 나이도 많아 여러 가지로 불리한 입장이지만 한 가지 나은 점이 있다. 그것은 김필도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사랑의 향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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