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
제1장 엄마의 방
많은 이들은, 전쟁이 인간의 존엄과 문명을 파괴하는 아주 야만적인 행위라고 여기며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반면에 또 어떤 자들은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 주며, 창조를 위한 파괴라고 주장하면서, 전쟁은 때로는 국가 발전이나 인류 발전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모토 남작은 후자에 속한다.
그리고 특히 그가 전쟁론에서 신봉하는 건 국가 발전이나 인류 발전의 원동력이란 말보다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는 구절이다. 아마도 실제의 경험이 근간을 만들었을 것이다.
비록 황실 식당의 재료 구입을 담당하는 직책이지만 그가 남작 작위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전쟁 때문이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영지전이었다. 하지만 그 영지전에서 공을 세워 헬모트 공작의 눈에 들었고, 남작 작위를 받았다. 그리고 남작이 된 지 5년 만에 황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지금은 영지전이나 국가 간의 전쟁을 뛰어넘은 종족 전쟁이니까 더 큰 기회를 잡을 수 있지.”
주위를 둘러보는 그의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맺혔다.
이곳은 수도 테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레바토 시장이었다. 전쟁 소식 때문인 듯 물건을 사러 나온 사람들로 시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너무 비싸서 살 게 없어. 이러다 굶어 죽게 될 것 같아.”
“그러게 말이야. 돈도 떨어져 가는데.”
오가는 행인들의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전쟁이라는 건 그런 거다, 이 무식한 것들아. 물건을 쌓아 놓고 대비한 놈들은 떼돈을 벌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황실만 바라보고 있던 놈들은 쫄딱 망하는 것이 전쟁이라고.”
모토 남작은 경멸 어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자! 오세요. 전쟁이 시작되면 가장 중요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식량입니다. 그래도 오늘은 특별히 밀가루를 반값에 모시겠습니다! 20킬로그램짜리 한 포대를 사시면 한 포대를 더 얹어 드립니다! 자, 오십시오!”
느닷없이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우르르 몰려갔다.
“얼마요!”
“얼맙니까?”
“오늘 아침 밀가루 한 포대 값은 30골드인데 그 값에 두 포대를 드리겠습니다.”
“어제는 10골드에 샀소!”
누군가 불만 어린 얼굴로 소리쳤다.
“다른 건 몰라도 식량은 미리미리 준비를 해 두어야 합니다. 내일은 또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자 한 포대 값으로 두 포대를 드립니다. 1 플러스 1 세일입니다. 골라 가십시오!”
“재미있게 장사하는 녀석이네.”
모토 남작은 피식 웃었다.
원래 밀가루 20킬로그램 한 포대 값은 1골드가 채 되지 않는다. 그랬던 게 며칠 전에 다섯 배까지 뛰었고, 요즘은 10골드에 가격이 형성돼 있다.
비록 1 플러스 1이라고 하지만 한 포대 값은 15골드. 전날보다 50퍼센트나 비싸다. 그런데 하나를 더 얹어 준다는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다.
“주시오!”
“여기 돈 있소.”
“여기요!”
느닷없이 몇몇이 돈을 내밀고 밀가루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다른 이들이 벌 떼처럼 달려들었다.
“줄을 서세요! 줄을 서지 않으면 팔 수가 없습니다!”
밀가루는 엄청난 속도로 팔려 나갔다. 커다란 짐마차 3대 분량이 순식간에 동이 났다.
“끝났습니다! 전부 팔렸습니다!”
“언제 또 올 거요?”
“밀가루를 구하는 대로 와야지요. 아무튼 고맙습니다. 다음에 또 우리 루시안 상회를 이용해 주십시오.”
“루시안이라고……?”
모토는 빙그레 웃으며 상인을 보았다.
루시안은 황실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이름 중의 하나였다.
문득 이곳으로 나오기 전에 노반 클레디안 후작이 은밀하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자와 비슷하게 생긴 녀석을 찾아보게.
그 말과 함께 초상화 한 장을 건네주었다.
검은 머리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그는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였다.
모토는 의아했다.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는 이미 황실 모처에 감금돼 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를 찾아보라고 하니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세한 건 알려 하지 말고 녀석의 행방을 알아보기나 하게.
그 말을 듣는 순간 황실에서 속임수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불어 또 한 번의 기회가 왔음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기회를 잡았지.”
모토는 장사꾼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굴을 좀 더 살펴보려는 심산이었다.
“옵니다, 마스터.”
바로 그때 마부 석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커다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는 이 사람은 할먼 상단의 상단주 샤일록이었다.
“모토 저놈을 불러들이려고 이곳에서 장사를 한 건데 당연히 와야지.”
짧은 머리 사내는 다름 아닌 김필도였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떻게 하는 건 내가 아니고 모토 저자야, 샤일록. 지켜보기만 해.”
김필도는 5미터 앞으로 다가온 모토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쌍둥이라고 해도 믿겠네.”
모토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어렸다.
짧은 머리를 길게 기르고, 괜찮은 옷을 입힌다면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본인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이름이 뭐냐?”
시선이 마주치자 모토는 물었다.
“루시안입니다요, 나리.”
“성은 있느냐?”
“없습니다.”
“오늘 판 밀가루는 네 것이더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밀가루를 팔아 주고 네가 받는 돈은 얼마냐?”
“원래는 하루 종일 일하는 삯이 2골드인데 1시간 만에 다 팔려 버렸으니까…….”
“2골드도 받지 못할 거란 말이구나.”
“1골드는 받을 수 있습니다요, 나리.”
“오늘 네가 벌어들인 돈이 얼마인지 아느냐?”
“전부 4백 포대를 가지고 나왔으니까 6천 골드를 벌었습니다. 그중 원가와 운송비를 제하고 나면 5천5백 골드의 순수익이 났습니다요.”
“제법 똑똑하구나.”
평민은 천 단위가 넘어가면 계산 속도가 느려지거나 아예 하지를 못한다. 그런데 녀석은 순식간에 원금을 제외한 순수익을 계산해 냈다. 그건 곧 머리가 좋다는 뜻이고, 머리가 좋다는 건 가짜 루시안 역할을 잘 해낼 수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장차 할먼 상단 같은 거대 상단을 세우는 게 꿈입니다요.”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공부를 한다는 말이렷다?”
“익숙해진다는 건 곧 강해진다는 게 제 신좁니다.”
“하하하! 좋은 자세다. 그럼 장사를 하려면 밑천이 있어야겠구나.”
“그래서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요.”
“만일 네게 목돈을 만질 기회가 온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목돈이 얼마냐에 달렸습죠.”
“오늘 네가 번 돈의 2천5백 배는 될 게다.”
“오늘 2골드를 벌었으니까 5천 골드란 말이군요.”
“최소한 그렇다.”
“그 이상도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할 맘 있느냐?”
“먼저 나리가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하는 거 아닌지요.”
“난 황실에서 나왔느니라.”
“아이고 죄송합니다, 나리.”
김필도는 얼른 자세를 바로 했다.
“너를 강제로 데려갈 수도 있지만 나는 그런 야만적인 방법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어떠냐?”
“오래 걸리는 일입니까?”
“1년 정도는 걸릴 게다.”
“그럼 제 마누라에게 설명을 해 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 찾는다고 여기저기 헤매고 다닐 겁니다.”
“결혼을 했느냐?”
“6개월 됐습니다.”
“6개월밖에 안 됐는데 장사를 하러 떠난다는 것도 이상하겠구나. 더구나 전쟁 중이니까…….”
모토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전 제 마누라가 해 주는 밥 아니면 잘 먹지를 못합니다.”
‘가만!’
느닷없이 그의 얼굴이 환해졌다.
녀석을 데리고 들어가게 되면 시중 들 시녀를 최소한 한 명을 배치해야 하는데, 황실에서 닳고 닳은 시녀들은 눈치가 빨라 가짜라는 사실이 금세 들통 나고 만다.
들키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참을 붙여 주거나 녀석을 잘 아는 여자를 신참 시녀로 받아들이면 된다.
“오늘 저녁 8시까지 네 아내와 함께 톰슨 뒷문으로 와라.”
“안전은…….”
“안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이건 선금이다.”
모토는 품속에서 1백 골드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꺼내 던졌다.
“알겠습니다, 나리.”
돈을 확인한 김필도는 헤벌쭉 웃었다. 그러고는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엘빈!”
모토는 뒤편을 향해 낮게 소리쳤다.
“말씀하십시오, 남작님!”
회색 로브를 걸친 사내 한 명이 모토 뒤편으로 다가왔다.
“감시해.”
“알겠습니다.”
회색 로브를 걸친 사내는 고개를 숙이고 김필도가 사라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부터 시장을 봐 볼까?”
모토는 비로소 본래의 목적에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황실로 들어가서 몇 가지 일을 처리하고, 저녁 7시에 마차를 타고 톰슨 여관으로 향했다.
톰슨 여관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마차를 몰고 후문으로 갔다.
후문 옆에는 젊은 남녀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김필도와 은발을 갈색으로 염색하고, 환영 마법을 이용해서 눈동자 색을 파랗게 바꾼 라헤나였다.
벌컥!
앞으로 다가온 마차 문이 열리자 두 사람은 벌떡 일어났다.
“타라.”
모토는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김필도와 라헤나는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식재료를 운반하는 짐마차였다.
“응?”
라헤나를 바라보던 모토의 눈이 커졌다. 라헤나가 생각보다 훨씬 미녀였던 것이다.
“왜 그러십니까?”
김필도는 모토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 아니다.”
“제 아내 라헤납니다. 인사해.”
김필도는 라헤나를 소개했다.
“처음 뵙습니다, 라헤납니다.”
“반갑구나. 난 모토 남작이다. 미인이구나.”
“감사합니다, 나리.”
라헤나는 고개를 숙였다.
“출발해라!”
인사가 끝나자 모토는 앞쪽에 나 있는 창에 대고 소리쳤다. 곧 마차는 여관 후문을 떠나 황실로 향했다.
“여기서 황실까지는 30분 걸린다. 그리고 너희가 황실로 들어가는 건 극비 사항이다.”
“그러면 지금처럼 앉아서 들어갈 수는 없겠군요.”
“잘 아는구나. 너 뒤쪽에 보면 고리가 두 개 있다.”
김필도는 고개를 돌렸다. 모토의 말처럼 둥근 고리 두 개가 1미터 간격을 두고 장식처럼 달려 있었다.
그 고리를 잡아당기면 두 사람이 누울 정도의 공간이 나온다.
“그 속에 들어가 있으면 된다는 거군요.”
“황실까지는 총 다섯 개의 검문소가 있는데 잠시 후면 첫 번째 검문소가 나온다.”
“검문이 삼엄하군요.”
김필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면 검문소가 나온다는 말은 비밀 공간으로 들어가라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고리를 잡고 들어 올리자 공간이 나왔다. 그런데 깊이는 꽤 되는데 폭은 한 사람이 들어가면 딱 맞을 정도로 좁았다.
“물건을 집어넣는 곳이라 좁다.”
‘도둑질하는 공간이겠지.’
김필도는 피식 웃었다.
황실에는 이런저런 값비싼 물건이 많을 테고, 외부로 가지고 나올 수만 있다면 상당한 금액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복잡한 검열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가지고 나온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럴 경우에 이런 공간을 사용하면 아주 유용할 것이다.
김필도는 안으로 들어가 몸을 뉘었다.
예상대로 어깨가 양쪽 벽에 닿을 정도로 좁았다.
“들어와!”
김필도는 위에 서 있는 라헤나에게 손짓을 했다.
라헤나는 김필도 다리가 있는 곳에 발을 디디고는 조심스럽게 엎드렸다. 얼굴이 거의 닿을 것처럼 가까워지자 라헤나의 얼굴이 슬쩍 붉어졌다.
“문은 내가 닫아 주마.”
두 사람이 밀착하자 모토는 문을 닫았다.
“20분 정도만 그렇게 하고 있으면 될 게다.”
“힘들지 않아요?”
라헤나는 몸을 밀착하지 않으려고 양손으로 버티고 있었다.
“겨, 견딜 만해요.”
“그러지 말고 힘 빼요.”
“괘, 괜찮아…… 헉!”
라헤나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갑작스럽게 김필도가 그녀의 허리를 잡아당겨 버린 것이었다.
“예의도 상황을 봐 가면서 지키는 거라고요.”
김필도는 라헤나의 등을 슬슬 쓸었다. 등과 허리를 오가던 그의 손길이 아래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