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 김필도-202화 (202/225)

# 202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라헤나는 질겁한 얼굴로 속삭였다.

“궁금했거든요.”

“뭐가 궁금한데요?”

“수천 년 만에 깨어난 사람이잖아요. 피부 상태는 어떤지, 신체 활동은 정상인지 등등.”

김필도가 치한처럼 행동하는 것은 하라미로부터 들은 말 때문이었다.

라헤나는 같은 동굴을 사용하고 언니 동생 하는 사이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목욕하는 걸 꺼렸을 뿐 아니라, 푹푹 찌는 더운 날에도 목까지 올라오는 옷을 걸치고 잔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자 피부에 문제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퍼뜩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전부 정상…… 헉!”

라헤나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엉덩이로부터 강한 악력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탄력은 정상인 것 같네요. 이제 피부 상태를 확인할게요.”

“바, 바르…….”

라헤나는 혀가 굳어 버린 듯 말을 잇지 못했다. 말릴 사이도 없이 김필도의 손이 속옷을 헤치고 들이닥쳤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김필도를 바라보았다.

“역시 피부에는 문제가 좀 있네요.”

김필도는 손바닥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말했다. 가장 부드러운 부분 중의 한 곳인 엉덩이임에도 불구하고 나무껍질을 만지는 것처럼 거칠었다.

“정령전사의 수명은 5백 년가량이에요. 난 그 열 배를 넘게 살고 있고요.”

라헤나는 체념한 얼굴로 말했다.

“원래대로 할 방법이 없어요?”

김필도는 다시 라헤나의 몸 이곳저곳을 쓰다듬어 보았다. 허벅지나 등도 엉덩이와 다르지 않았다. 아니 더 심한 상태였다.

“피부에 좋다는 걸 사용해 보긴 했는데…….”

“안 됐어요?”

“이제 손 좀 빼 주세요.”

라헤나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애원했다.

그녀를 힘들게 하는 건 나무껍질 같은 피부를 김필도에게 들켰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김필도에게서 풍겨 나오는 사내 냄새였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녀는 20여 년간 결혼 생활을 했고,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김필도의 손이 엉덩이를 침범하자 완전하게 잊은 줄 알았던 느낌이 살아날 기미를 보였다.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알았어요.”

김필도는 손을 빼냈다.

그제야 라헤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도착했다. 그만 나와도 된다.”

라헤나는 모토의 목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곧바로 문을 열고 몸을 일으켰다.

모토는 이미 마차 밖으로 나가 있었다.

비밀 공간을 나온 두 사람은 마차에서 내렸다.

김필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중앙에는 커다란 호수가 있고, 호수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각 방향에 건물이 서 있는 구조였다.

“여긴 황실의 별궁으로 겨울의 궁전이라고 불린다. 너희 둘이 머물 곳은 여기다.”

모토는 바로 앞에 있는 1층 건물의 계단으로 올라가며 말했다.

김필도와 라헤나는 모토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과 중문을 지나자 비로소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궁전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내부 구조는 평범했다. 중문 안쪽은 널따란 거실이고, 좌우 측으로는 욕실과 화장실, 식당, 침실 등이 배치된 단순한 구조였다.

“오른편에는 욕실과 화장실이 있고, 왼편 앞은 식당, 중간은 서재, 그리고 맨 안쪽은 드레스 룸과 침실로 이루어져 있다.”

모토는 방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그리고 호수를 중심으로 왼편에 있는 건물은 하인들이 머무는 숙소, 오른편은 경비 숙소, 건너편에 있는 건물은 말과 마차를 보관하는 마구간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노반 경이 해 주실 게다.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면 옷이 있으니 갈아입고 기다려라.”

“제 부인은 어떻게 합니까?”

“함께 갈아입도록 해라.”

“알겠습니다요, 나리.”

“옷은 입을 줄 아느냐?”

황실에서 입는 옷은 평복과는 달리 절차가 복잡하기에 묻는 말이었다.

“전에 귀족분의 옷 입는 걸 도와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럼 문제없겠구나. 가발도 준비해 두었으니까 쓰도록 해라.”

고개를 숙인 김필도는 라헤나를 데리고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드레스 룸은 식당 바로 옆에 있었다.

“엄청나네.”

김필도는 휘파람을 불었다.

문이 있는 쪽을 제외한 삼면 전부가 옷으로 들어차 있었다.

“대단하네요.”

라헤나 또한 김필도와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한편에 걸려 있는 드레스들을 바라보았다.

“어떤 걸로 할래요?”

김필도는 라헤나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정말 옷 입을 줄 알아요?”

“부하가 디자이넌데 옷 입는 걸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믿어도 되죠?”

“믿으라니까요. 이거 어때요?”

김필도는 연녹색 드레스를 가리켰다. 그 드레스는 속옷과 한 세트로 걸려 있었다.

“괜찮아 보이네요.”

“라헤나는 이걸로 하고 나는…… 이걸로 할게요.”

안쪽을 둘러보던 김필도는 검은색 팬츠에 흰색의 드레스 셔츠와 회색 상의를 골랐다.

“괜찮네요.”

“먼저 입으세요.”

김필도는 드레스를 내렸다.

“순서가 어떻게 되죠?”

“먼저 옷부터 벗으세요.”

“옷을 벗으라고요?”

라헤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옷을 갈아입으려면 먼저 입고 있는 옷을 벗어야 하잖아요.”

“그 전에 남자가 나가 주는 게 먼저 아닌가요?”

“혼자서는 못 입는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시중을 들겠다고요?”

“나밖에 없잖아요.”

“필요하면 부를 테니까 나가세요.”

라헤나는 김필도를 밀어냈다.

“그럼 난 방이나 둘러보고 있을게요.”

밖으로 나간 김필도는 본격적으로 각 방의 탐험에 나섰다. 그가 먼저 들어간 곳은 침실이었다.

커다란 양탄자가 깔린 방 중앙에 킹사이즈 크기의 침대가 놓여 있었다. 침대 좌우 측에는 두 개의 서랍이 달린 협탁이 있었는데, 협탁 표면에 새겨진 조각은 인간의 솜씨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협탁 하나만 보아도 평범한 사람이 기거했던 장소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침대 왼편에 부부 장으로 보이는 서랍장과 커튼이 쳐진 창 아래쪽으로 티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창을 바라보며 놓인 의자는 누군가가 앉아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김필도는 창가로 가서 커튼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녹음이 우거진 뜰이 눈 안으로 밀려들었다. 잡초가 무성할 걸 보면 상당 기간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았다.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의자로 가 앉았다.

“좋네.”

절로 기분 좋은 미소가 번졌다. 창문을 열었을 뿐인데 숲 향기가 방 안 가득 밀려 들어왔다.

그는 폐부 깊이 숲의 향기를 들이마셨다.

“응?”

테이블로 시선을 내리던 김필도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테이블 면에 칼로 새긴 흔적이 남아 있었는데, 캐서린이라 적혀 있었다.

“설마…….”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황실에서 캐서린이란 이름을 사용했던 사람은 그의 어머니밖에 없었다.

김필도는 벌떡 일어났다.

“바르칸!”

그때 라헤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나 좀 도와주세요.”

“알았어요.”

김필도는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맨 안에 입는 속옷에서부터 장애에 부딪친 듯 라헤나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서 있었다. 그녀가 입다 실패한 옷은 원피스 비키니처럼 생겼는데, 묶는 데가 뒤쪽에 있어 그녀 혼자서는 입을 수 없었다.

가장 안쪽에 입는 옷을 걸치지도 못한 상태이고 보니 하체와 상체는 거의 벗은 거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그 옷은 겨우 엉덩이 절반 정도를 가려 줄 뿐이었다.

하지만 김필도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반라 상태의 몸이 아니라 온몸에 곰팡이처럼 피어 있는 세월의 꽃이었다.

“보기 흉하죠?”

“그래도 예뻐요.”

“이제 궁금증이 해결됐어요?”

라헤나는 김필도를 빤히 보았다.

그녀가 이런 차림으로 김필도를 불러들인 건 몸 상태를 확실하게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얼굴은 괜찮은 것 같은데 몸만 그런가 보네요?”

“그 이윤 나도 모르겠어요.”

라헤나는 김필도 앞으로 등을 댔다.

어깨 끈이 달려 있지 않은 옷은 등줄기를 따라 엉덩이까지 일자로 갈라져 있었는데 좌우 측에 작은 구멍이 있어 위에서부터 줄을 끼워 아래쪽에서 묶는 형태였다. 김필도는 운동화 끈을 끼우는 것처럼 줄을 끼워 당기면서 아래로 내려갔다.

“너무 조이면 말하세요.”

“조금만 더 느슨하게 해 주세요.”

“이 정도면 돼요?”

김필도는 3센티미터 남짓 줄을 풀었다.

“조금 더 풀어 주세요.”

“이렇게?”

김필도는 줄을 더 느슨하게 풀었다.

“됐어요.”

“원래 옷의 주인보다 6센티미터가 더 커요.”

“원래 내 몸이 상체와 엉덩이가 좀 큰 편이에요.”

“그런 것 같네요.”

끈을 묶어 준 김필도는 한 걸음 물러났다.

라헤나의 말대로였다. 그녀가 걸친 속옷은 허리는 맞고 상체와 엉덩이 부분은 작았다.

“이왕 들어온 거 이것까지 부탁해요.”

이번엔 치마를 가져왔다.

치마는 아래쪽으로 갈수록 풍성하게 퍼져 한복을 연상시켰다. 치마를 묶는 줄 또한 뒤편에 있었다. 김필도가 치마를 고정하는 사이에 라헤나는 상의를 걸쳤다. 상의는 팔과 목까지 가리는 디자인이었다.

라헤나가 옷을 다 갖춰 입자 이번에는 김필도가 옷을 입었다.

“안에 있습니까?”

옷을 다 입고 가발을 쓰고 있는데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필도와 라헤나는 드레스 룸을 나왔다.

밖에는 모토와 함께 처음 보는 사람이 서 있었다. 중키에 회색 머리카락을 지닌 이 사람은 황제의 최측근인 노반 크레디안 후작이었다.

“처음 뵙습니다, 대공 전하. 저는 노반 크레디안 후작입니다.”

노반은 김필도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이고, 나으리 그러시면 안 됩니다.”

김필도는 황급히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아니 된다!”

노반의 입에서 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김필도는 노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이 순간부터 넌 장사꾼 루시안이 아니라 발탄 제국 대공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니라. 그리고 네 아내는 라헤나 프리우스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아, 알겠습니다, 나리!”

‘허허!’

노반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김필도는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물었다.

“‘알겠습니다.’가 아니라 ‘알았네.’ 라고 해라.”

옆에 있던 모토가 잘못된 점을 일러 주었다.

“어찌 나리께 그럴 수가 있습니까. 전 못 합니다.”

김필도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와 네 마누라는 쥐도 새도 모르게 이렇게 될 수도 있다.”

노반은 제 목을 슥 그어 보였다.

“주, 죽는다고요?”

“지금부터 넌 대공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알았네.”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노반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표정을 근엄하게 바꾸고 일어섰을 뿐인데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뀐 듯했다.

‘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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