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
노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수십 년 동안 노르카와 크로의 단장을 역임한 경험이 위험한 자라는 신호를 보내왔다.
“이렇게 하면 되는 겁니까?”
하지만 위험 신호는 금세 사그라졌다.
“방금 그 느낌을 기억해서 하인을 다룰 때도 그렇게 하면 되느니라.”
“부하를 다룰 때처럼 하면 된다는 말이군요.”
“부하?”
“전에 건달의 언더 보스 생활을 한 5년 했습니다.”
김필도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싸움도 좀 하겠구나?”
“그 당시에 떠돌이 기사와 싸운 적이 있는데.”
“어떻게 됐느냐?”
“그분이 봐 주셔서…….”
“허허허!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추고 있다니 다행이구나. 아무튼 조금 전에 나에게 한 것처럼 하면 될 게다.”
“알겠습니다, 나리.”
“또!”
“알았네, 노반.”
“잘하셨습니다, 대공 전하. 그리고 잠시 후에 하인들이 올 겁니다. 남자 여섯 명과 여자 하인 다섯 명입니다. 케이샬 한 명을 제외하곤 나머지는 전부 신참이니까 다루는 데도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케이샬은 어떤 사람이오?”
“10살 때 황실로 들어와서 그 후로 60년 동안 이곳 겨울 궁전에서만 근무했습니다.”
“모르는 게 있으면 그에게 물으면 되겠군요.”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케이샬입니다, 후작님.”
밖에서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노반의 말이 떨어지자 노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앞으로 케이샬 네가 모실 분이다. 성에서 혼자 자라는 바람에 황실 생활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고 보면 된다. 이곳에서 나갈 일은 거의 없겠지만, 혹시 다른 자들을 만날 경우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흠 잡히지 않도록 잘 모셔라!”
“알겠습니다, 후작님.”
케이샬은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노반은 김필도와 라헤나에게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환대 고맙소, 후작. 언제 식사라도 함께합시다.”
김필도는 문 앞까지 따라가 노반과 모토를 배웅하고 돌아왔다.
“대공은 후작이나 남작을 배웅할 때 문 앞까지 따라가면 안 됩니다, 전하.”
“그건 나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여기서 60년을 근무했다고 하던데 맞아요?”
김필도는 케이샬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10살 때 황실로 들어와 60년 동안 이곳에서 근무를 했다면 나이가 최소한 70살이란 말이 된다. 그런데 얼굴은 생각보다 젊었다.
“드레스 룸을 정리한 사람이 접니다, 전하.”
“여자 옷은 어떻게 준비를 한 거죠?”
“전에 있던 옷들입니다.”
“전에 있던 옷이라면 40년 전?”
“그건…….”
케이샬은 김필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40년 전이라는 말은 곧 발몬 하이저 아이작 황제 시기 때냐는 질문이다. 그는 이미 김필도가 가짜라는 사실을 노반으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다. 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자라고 하였다. 시장에서 장사하던 자가 할 만한 질문은 결코 아니었다.
“아닌 모양이네?”
“아닙니다, 맞습니다.”
케이샬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 옷이죠?”
“모린느 님께서 입던 옷입니다.”
“모린느 님이면 외할머니?”
“그, 그렇습니다.”
김필도가 외할머니라고 하는 말에 케이샬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외할머니라고 하니까 어색해요?”
김필도는 케이샬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 아닙니다.”
“노반 경으로부터 나에 대해 들었겠죠?”
“들었습니다.”
“기분이 나쁘더라도 참으세요. 제대로 연기를 하려면 외할머니에 대해 알아야 하잖아요.”
“또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십시오.”
“그분의 따님인 캐서린 님도 여기서 살았어요?”
“모린느 님께서 돌아가신 후 이곳의 주인이셨습니다.”
“드레스 룸 안에 있는 작은 옷들이 그분 건가 보죠?”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저기가 엄마의 방이라는 거죠?”
김필도는 침실을 가리켰다.
“그렇습니다.”
“그랬군요.”
김필도는 내부를 둘러보았다. 예상은 했지만 그분이 살았다는 집이라고 생각하니 공연히 마음이 포근해졌다.
“엄마도 모셨어요?”
“물론입니다.”
“그분은 어땠죠?”
“그분은…….”
“이럴 게 아니라 저쪽으로 앉죠.”
김필도는 거실 중앙에 놓여 있는 소파를 가리켰다.
“밖에 하인들이 인사하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럼 인사부터 하죠.”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케이샬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열 명의 하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선 순서대로 자신들을 소개했다.
김필도는 하인들 앞으로 걸어가서는 일일이 악수를 했다. 악수를 끝내고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와서는 일행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이곳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편하게 지내도록 해. 모든 지시는 여기 케이샬이 하게 될 거야.”
“알겠습니다, 전하!”
하인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우선은 지시한 일을 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시종장님!”
하인들은 케이샬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라헤나.”
김필도는 밖으로 나가는 하인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라헤나를 불렀다.
“말씀하세요.”
“보폭이 일정하고, 걸을 때 상체가 전혀 흔들리지 않으며, 숨이 얕고, 오른쪽 허벅지가 왼쪽 허벅지보다 더 굵고, 오른손 손바닥에 굳은살이 많이 박여 있는 자의 전직은 뭘까요?”
“검사일 가능성이 높아요.”
“아니면 어쌔신이겠죠?”
“그걸 다 봤어요?”
라헤나는 놀란 눈으로 김필도를 보았다. 그는 인사를 받고 악수를 했을 뿐이다. 그런데 하인들 중에서 신분이 의심스러운 자들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사내 두 명, 여자 한 명이 그랬어요.”
“저, 전하!”
케이샬은 당황한 얼굴로 김필도를 불렀다. 60년 이상을 황실에서 굴러먹었던 그가 방금 김필도가 한 말의 의미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 말은 곧 하인들 속에 대공을 암살하기 위해 들어온 어쌔신이 있다는 말이었다.
“그냥 두도록 하세요.”
“어쌔신을 그냥 둔다는 거예요?”
이번에 질문을 한 사람은 라헤나였다.
“날 감시하러 온 건지, 죽이러 온 건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처리할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증거도 없고. 우선은 그냥 두세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김필도는 케이샬을 보았다.
“알겠습니다.”
케이샬은 고개를 숙였다.
“자, 인사는 대충 마무리 된 것 같으니까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세요.”
“그분은…….”
케이샬의 입에서 캐서린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김필도는 말없이 케이샬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활발하고 정이 깊었던 분이란 말이네요?”
이야기를 전부 듣고 난 김필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리고 아름다운 분이셨고요.”
“그렇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이셨죠.”
김필도는 빙그레 웃으며 창가로 향했다.
밖에서는 하인들이 정원 청소를 하고 있었다.
“이왕 청소하는 거 후원까지 정리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집사람 씻어야 하니까 목욕물도 준비해 주고요.”
“지금 바로 준비시키겠습니다.”
케이샬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제2장 김필도와 황제의 공통점
“현재 어떤가?”
황제는 안으로 들어온 페르카에게 차를 권하며 물었다.
노르카의 단장인 페르카에게 질문을 한 이유는 크로 정보원들이 보내온 정보를 노르카에서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원들은 라파 산맥에서 죽임을 당했지만 대륙은 물론이고 문 대륙에서 암약하고 있는 정보원들은 여전히 활동하면서 황실로 정보를 보내오고 있었다.
“펠콘 항을 통해 1천 명의 천족이 들어왔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페르카는 공손하게 찻잔을 받으며 대답했다.
“신분은 알아냈는가?”
“그게…….”
페르카는 말끝을 흐렸다.
“왜 그러는가?”
“믿어지지가 않아서 그렇습니다.”
“어떤 자가 건너왔는데 믿어지지 않는단 말인가?”
“천계의 이인자인 이스마디온 신좌라고 합니다.”
“천계의 총리대신이 왔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가 데려온 자들 또한 이스마디온 전사단이라고 합니다.”
“확실한가?”
이스마디온 신좌가 건너왔다는 말은 황제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총리대신이면 천계의 이인자이고, 한시도 자리를 비워서는 안 되는 중요한 직책이다. 게다가 자기 가문의 전사단만 이끌고 휴도니아 대륙으로 넘어왔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저도 믿어지지가 않아서 추가 조사를 지시해 두었습니다.”
“마족의 동향은 어떤가?”
“마족에서는 마계 제2원로 쿤할이 6천의 병력을 이끌고 휴도니아 대륙으로 향하고 있답니다.”
“제2원로 쿤할이란 말인가?”
“문 대륙에 있는 크로 정보원으로부터 들어온 보곱니다.”
“그렇다면 이스마디온이 건너온 게 맞구먼.”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쿤할이 늦게 출발했기 때문이네.”
“이스마디온 신좌가 휴도니아 대륙으로 향한 사실을 확인하고 출발했다는 말입니까?”
“그랬을 거네. 그리고 양측의 주력은 늦게 출발했을 가능성이 높네.”
“본격적인 전쟁의 시작이군요.”
“그러네, 페르카. 지금까지는 전초전에 불과했을 뿐이네. 진짜 전쟁은 지금부터네.”
황제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
진짜 전쟁의 시작. 아니 대륙의 종말이 시작될 것이다.
이 전쟁에서 누가 승리해도 상관없다. 완전하게 부서지고 무너진 후 다시 시작할 테니까.
똑똑똑!
바로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자 갑옷을 걸친 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노르카의 부단장 레드펀이었다.
“무슨 일인가?”
페르카가 레드펀을 보며 물었다.
“조금 전에 새로운 정보가 올라왔습니다.”
“말하게.”
“천족과 마족을 태운 대규모 선단이 휴도니아 대륙으로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마계2원로 쿤할은?”
“그는 며칠 전에 군단과 함께 휴도니아 대륙으로 떠났답니다.”
“그러니까 쿤할이 떠난 후의 상황이란 말이냐?”
이번에 질문을 한 사람은 황제였다.
“그렇습니다, 폐하.”
“규모는 어느 정도라고 하더냐?”
“지금까지 확인된 건 5만 명가량이라고 합니다.”
“5만이 전부는 아니겠지?”
“그것까지는…….”
레드펀은 말끝을 흐렸다.
“아무래도 천계와 마계에 대원을 보내야겠어.”
황제는 페르카를 바라보았다.
체격의 차이가 있어 쉽게 발각되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정보원을 보내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마계와 천계의 정보가 필요하다는 걸 절감하게 된다.
“제가 추진하겠습니다.”
“서둘러 주게.”
“부단장!”
페르카는 레드펀을 보았다.
“지금 당장 천계와 마계로 떠날 대원들을 선발하여 보고 올리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페르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레드펀은 황제와 페르카에게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전쟁이 격렬해지면 이곳도 안전한 장소가 아닙니다, 폐하.”
“내가 천계와 마계에 정보원을 보내려는 이유가 바로 잠적할 시기를 결정하기 위해서네.”
“귀족들에게는 폐하의 잠적을 설명하실 겁니까?”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보네. 전쟁이 확대되면 그들은 자기네들 영지를 지키느라 황실은 돌아볼 겨를도 없을 거네. 그리고 어떤 자들은 혼란의 와중에 내가 죽기를 바랄 테고.”
“그렇다고 해도 누군가는 황실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원래 그 일을 베칼리오 후작과 크로에게 맡길 참이었네.”
“그렇다면 우리가 황실을 지키겠습니다.”
“노르카는 내가 지닌 마지막 보룬데 그럴 수는 없지.”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수도 방위를 노틸리어스 공작에게 맡길 생각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