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
엘빈 노틸리어스 공작은 제국군의 총사령관이었다.
“그가 수락할 걸로 보십니까?”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공작 작위를 준 건 지금과 같은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네.”
“그럼?”
“노틸리어스 공작은 야망이 큰 자네. 하지만 늘 헬모트 공작이나 노르탄, 이콰라 공작에게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었네. 그는 이번 기회를 이용해서 자격지심에서 벗어나고 싶어 할 거네.”
“수도를 방위하라고 명령을 내려 놓으면 절대 복종할 거란 말이군요.”
“그러네.”
“하지만 그들을 지휘할 누군가는 있어야 합니다.”
총사령관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자리를 비우면 스스로 황제가 되겠다고 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날 대신할 자는 겨울의 궁전에 있지 않은가.”
황제는 빙그레 웃었다.
“설마 그럴 목적으로 써먹기 위해 가짜를…….”
페르카는 놀란 눈으로 황제를 보았다.
황실에 억류하고 있는 대공이 가짜라는 사실은 신의 정원 위원장 아론은 물론이고 한창 전쟁 중인 귀족들에게조차도 말하지 않았다.
헤를리온에 대해 질문을 해 오면 여러 가지로 곤란한 일이 생길 게 분명한데도 극비 사항으로 다루라고 하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황실을 비울 때 써먹기 위해서였다.
“그 장사치 녀석에게 케이샬을 붙여 준 것도 같은 맥락에서네. 케이샬이 옆에 있으면 설사 귀족들을 만난다고 해도 발각될 염려는 없을 거네.”
“만약 10인 위원회 위원장이 헤를리온에 대해 물으시면 어떻게 하실 참입니까?”
“발몬 하이저 아이작이 만들던 전투기갑이 있는데 만일 완성됐더라면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았던 최강 성능의 전투기갑이 탄생했을 거라고 하더구먼.”
“그 정도면 충분히 속일 수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다네. 그리고 아론은 다른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신경 쓸 경황도 없네.”
“그래도 잠적하기 전에 귀족들을 한 번은 만나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만나서 헤를리온에 대해 설명도 해 주고 열심히 싸워 달라고 독려도 해 줘야지.”
황제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맺혔다.
“어디서 만날 생각이십니까?”
“전쟁터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들일 수는 없지 않겠는가?”
“모임 장소는 제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접니다, 폐하.”
바로 그때 페르카의 부관인 울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황제는 문을 바라보며 물었다.
“신의 정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누구냐?”
“10인 위원회 위원장입니다.”
“곧 올라갈 테니까 잠시만 기다리라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폐하.”
“가 보세.”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통신실로 향했다.
통신실에는 10인 위원회 위원장 아론 말고도 제국군 총사령관 노틸리어스 공작으로부터도 연락이 와 있었다.
통신 마법구들은 이미 활성화된 상태였다.
“총사령관은 잠시만 기다려 주겠는가?”
황제는 먼저 노틸리어스 공작에게 양해를 구했다.
“마침 차를 한 잔 끓여 놓았습니다.”
노틸리어스 공작은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럼 차 마시면서 잠깐만 기다려 주게.”
황제는 조금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있는 마법 통신구 표면에는 아론의 얼굴이 나타나 있었다.
“오랜만이오, 위원장.”
“오랜만이오. 그런데 그 소문이 사실이오?”
“루시안을 잡아 왔다는 소문을 묻는 거라면 사실이외다.”
“라파에서 그를 생포했단 말이오?”
“생포했을 뿐 아니라 헤를리온까지 회수했소.”
“헤를리온에 대한 연구는 함께하기로 했던 것 아니었소?”
“며칠 전에 황실에 도착해서 경황이 없었소. 그리고 헤를리온은 아직 분해하지 않았소.”
“루시안 그놈은 아직 살아 있는 거요?”
“이곳에 억류돼 있소.”
“그놈을 내게 넘겨 줄 수 있겠소?”
“그건 불가능하오, 위원장.”
황제는 고개를 흔들었다.
“불가능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아론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는 김필도를 고문해서 리시아 일행의 행방을 알아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한 것이다.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놈 또한 실험 대상이기 때문이오.”
“실험 대상이라고요?”
“복제한 헤를리온을 위원장에게 먼저 착용하라고 하면 입을 수 있겠소?”
“그건…….”
아론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헤를리온을 착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숨이 끊어져야 한다. 황제를 믿고 목숨을 맡길 수도 없을 뿐더러, 설령 부하들 앞이라고 해도 검증도 되지 않은 걸 무슨 수로 착용한단 말인가?
“놈은 이미 헤를리온을 착용한 경험이 있소. 일단 놈을 죽여 복제 헤를리온을 착용시켜 본 다음 성공하면 우리가 착용하면 되는 거요.”
“그래서 살려 둔 거구려.”
“물론이오, 위원장.”
“알았소이다. 놈의 신병 요구는 하지 않겠소. 그리고 연구원들을 황실로 보내도록 하겠소.”
“그렇게 하시오. 그럼 다음에 뵙겠소, 위원장.”
황제는 고개를 슬쩍 숙이고는 통신 마법구에서 물러났다. 그러자 울타가 다가와 통신 마법구에서 마나를 제거했다.
그사이에 황제는 총사령관 노틸리어스 공작이 기다리고 있는 통신 마법구 앞에 섰다.
“방금 내가 위원장과 한 이야기 들었는가?”
“들었습니다, 폐하.”
“공작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일부러 통신을 열어 두었네.”
“황공하옵니다, 폐하.”
최고의 충신답게 노틸리어스 공작은 통신 마법구 앞임에도 불구하고 허리를 90도로 꺾었다.
“요즘 바쁜가?”
“놈들이 성으로 틀어박히는 바람에 한가합니다.”
“그럼 나 좀 보러 오게.”
“지금 당장 출발하겠습니다, 폐하.”
“그렇게 해 주게.”
“알겠습니다.”
곧 통신 마법구에서 노틸리어스 공작의 얼굴이 사라졌다.
“대충 정리는 끝난 것 같고. 울타!”
“말씀하십시오, 폐하.”
“가서 노반을 불러와!”
“알겠습니다.”
울타는 고개를 숙이고는 통신실을 나갔다.
잠시 통신실을 둘러보던 황제는 밖으로 나왔다.
노반은 휴게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녀석의 근황을 알고 싶어서 불렀네.”
“케이샬이 교육을 잘 시키고 있는 모양입니다.”
“잘 적응하고 있다는 말인가?”
“어제 찾아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 정돈가?”
“이젠 그자를 시장에서 밀가루를 팔던 장사치라고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장사하던 녀석이라 그런지 눈치가 빠른 모양이구먼.”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튼 수고했네. 그리고 머잖아 황실을 비울 테니까 준비를 하도록 하게.”
“황실을 맡길 사람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노틸리어스 공작에게 황실 방어 임무를 줄 생각이네.”
“그가 있었군요.”
노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의 선택이란 생각이 들었다.
노틸리어스 공작은 찬란한 미래가 보장되고 목숨을 걸 정도만 아니라면 최선을 다해 명령을 수행할 사람이다. 황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참! 식사했는가?”
“아직 전입니다.”
“그럼 나와 식사나 하세.”
황제는 노반을 데리고 식당으로 향했다.
* * *
김필도는 라헤나와 함께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그와 라헤나가 식사를 하는 장소는 후원에 있는 작은 연못 옆이었다. 시중은 케이샬이 들고 있었다.
“전쟁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죠?”
김필도는 자른 스테이크 한 조각을 입으로 가져가며 물었다.
“그건…….”
케이샬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김필도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황실 예절에 대해 가르치긴 했지만, 대륙 정세에 관한 것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식사를 하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전쟁에 대해 묻고 있다. 마치 체계적으로 교육 받은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시장에서 장사나 했던 녀석이 묻기엔 너무 수준 높은 질문이라는 건가요?”
“아, 아닙니다.”
케이샬은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말해 보세요.”
“천족과 마족이 병력을 증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건 세이아칸과 데메우스 그놈들이 패한 척하고 물러날 때부터 이미 예견된 상황 아닌가요?”
“……!”
케이샬은 멍해졌다.
세이아칸과 데메우스.
천족의 대천신군과 마족의 마계10군단 수장으로 고위 귀족들이 아니면 그 이름을 아는 자가 거의 없다. 하물며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장사치가 안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더구나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을 그놈들이라고 하였고, 패한 척하며 물러났다고 말한 부분이다.
“난 장차 헐만 상단 같은 상단을 세우는 게 꿈이에요, 케이샬. 그런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세상 돌아가는 걸 알아야 함은 물론이고, 장차 어떻게 돌아갈지 예측도 할 줄 알아야 하는 거예요.”
“상단을 만들기 위해 배운 것들이란 말입니까?”
“당연히 그렇죠. 그런데 이건 무슨 고기죠?”
김필도는 썰고 있던 스테이크를 가리켰다.
“소고깁니다.”
“어떤 부위를 사용했는데요?”
“그건 저도 모릅니다.”
“마샤!”
김필도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30대 후반의 여자가 이편으로 걸어왔다.
그녀는 주방 담당 하인이었다.
“부르셨어요?”
김필도 곁으로 다가간 마샤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 스테이크는 어느 부위를 사용한 거지?”
“갈비뼈 안쪽 살인 안심이에요.”
“다음부터는 바깥쪽 살로 요리를 해 줘.”
“그 부분엔 지방이 많은데요?”
“난 지방이 많은 부분을 좋아해. 그리고 돼지 뱃살은 늘 준비해 두고.”
“훈제한 것 말고 생고기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응! 베이컨 말고 생고기를 말하는 거야.”
“알았어요.”
“가 봐.”
“필요한 거 있으시면 부르세요.”
마샤는 인사를 하고 건물로 돌아갔다.
“어디까지 이야기하다가 그만뒀죠?”
김필도는 케이샬을 보았다.
“세이아칸과 데메우스에 대한 이야기까지 했습니다.”
케이샬은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맞아, 그랬지.”
“천족과 마족이 일부러 패했다고 보십니까?”
사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황실에서도 말들이 많았다. 어떤 이들은 성안으로 침략해 들어온 자들을 막기 위해 패한 척하면서 물러났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정말로 패배하고 도망쳤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김필도가 일부러 패했다고 하자 왜 그런 관점이 나왔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황실에서는 의견이 분분한가 보죠?”
“승리 당사자들은 물리쳤다고 하고, 그들의 승리를 달가워하지 않은 자들은 천족과 마족이 패배를 가장하고 물러났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장사치 녀석이 무슨 근거로 패한 척하고 물러갔다고 하는지 궁금하다?”
“그건…….”
“그걸 알려면 먼저 세이아칸과 데메우스에 대해서 알아야 해요.”
“아십니까?”
“장사꾼은 세상을 살피는 눈을 가져야 한다고 했잖아요.”
“어떤 자들입니까?”
“데메우스는 원래 마계10군단 대원이었지만 실력이 형편없었어요. 오죽 못났으면 평군으로 좌천되기까지 했겠어요.”
“그런 자가 군단장이 됐단 말입니까?”
“아버지가 마계 이인자인 마계 제1원로거든요.”
“아버지 힘으로 군단장이 됐다는 말이군요.”
“맞아요. 문제는 그가 군단장이 되면서 전에 있던 대원들이 항명을 했다는 거예요. 1천 명에 달하는 대원과, 히데우스가 차기 군단장으로 지목한 이카렌 쿤타 카킬레우스 백작의 사병 8백여 명이 항명을 하게 되고 작은 전쟁이 일어나요. 결국 이카렌을 비롯한 마계10군단 대원들은 문 대륙으로 탈출을 감행해요.”
“그, 그래서 마계10군단은 어떻게 됐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