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6
카판 특유의 향이 실내를 가득 채웠다.
김필도는 내려진 카판을 따라 케이샬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케이샬은 공손하게 카판 잔을 받았다.
“하인들 속에 있는 검사들은 케이샬 부하인가요?”
김필도가 그렇게 묻는 이유는 케이샬이 자기 위치에서 파악하기 힘든 고급 정보들을 알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황실에서 일한 지 60년이 됐습니다. 일꾼들은 전부 제 부하라고 보시면 됩니다.”
“일꾼들을 부하로 만든 이유가 뭐죠?”
“원래 배신자는 사방을 두루 살펴야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거든요.”
“신의 정원에서 정원사를 보낼까 봐 대비를 했다는 거군요.”
“실제 몇 번 보내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제 부하 손에 전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랬구려.”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내가 이곳으로 온 이유가 궁금하단 말이에요?”
“그렇습니다.”
케이샬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날 잡았다고 소문을 낸 이유가 궁금해서 왔어요.”
“단지 그 때문에 왔단 말입니까?”
“그가 나를 잡았다고 소문을 냈다는 건 상당히 중요한 일이에요, 케이샬.”
“전쟁이 확대될 거란 말입니까?”
“전쟁이 확대되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은 사람이 황제예요. 그런데 그는 날 잡았다는 소문을 내서 확전을 유도하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어요. 왜 그런 건지 이유를 알고 싶어요.”
“그건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무슨 뜻이죠?”
“겉보기와는 달리 황제의 권력은 아주 취약합니다. 귀족들은 황제의 명령을 듣는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본인의 방식대로 모든 일을 처리하고 있고요. 결과 보고 같은 건 아예 하지도 않습니다.”
“그럼 황제는…….”
“현 상황을 뒤집어엎고 싶어 합니다.”
“모든 걸 원점으로 돌려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 한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는 조만간 황실을 비울 겁니다.”
“황실을 비운다고요?”
“그러니까…….”
케이샬의 입에서 황제와 페르카가 세운 작전 내용이 술술 흘러나왔다.
“정말이에요?”
이야기를 다 듣고 난 김필도는 확인하듯 물었다.
“네.”
케이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양반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인 줄 알았는데 공통점이 있네요.”
“어떤 공통점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확전 말이에요.”
김필도 입가에 진한 미소가 어렸다.
제3장 태양의 인장 3개
“어이쿠! 벗은 몸이라고 말이라도 해 주시는…….”
카판을 가지고 욕실로 들어섰던 김필도는 얼른 몸을 돌렸다. 욕실 안에 있는 라헤나는 옷을 벗은 상태였던 것이다.
“전엔 더듬기까지 했으면서 새삼스럽게 왜 그러세요?”
“그땐 몸 상태를 보려고 그랬던 거죠.”
“아무튼 카판 마시고 싶으니까 들어오세요. 정 어색하면 벗고 목욕을 하면 되잖아요. 그리고 저 지금 얼어 죽기 직전이에요.”
“이런!”
김필도는 황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어느새 여름이 끝나고 카오스의 계절로 접어들었다. 아직은 여름의 여운이 남아 있어 한낮엔 덥지만 해가 떨어지면 겨울을 방불케 할 정도로 기온이 뚝 떨어진다.
수온 또한 차가워졌을 텐데 라헤나를 물속에 너무 오래 방치한 것 같았다.
쟁반을 한편에 내려놓고, 물속에 손을 집어넣어 불의 속성 마법을 펼쳤다. 그의 손에서 뜨거운 기운이 흘러나오고 물은 금세 데워졌다.
“이, 이제 좀 살겠네요.”
따뜻한 물이 온몸을 어루만져 주자 라헤나는 비로소 빙긋 미소를 머금었다.
“물이 차면 말을 해야죠. 멍청하게 그렇게 하고 있으면 어떡해요.”
물이 데워지자 이번에는 카판을 내밀었다.
“이,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을 어, 어떻게 불러요.”
물이 뜨거워졌음에도 불구하고 몸속은 얼음장인 듯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손이 떨려 카판 잔도 잡지 못했다.
김필도는 카판 잔을 라헤나의 입에 대 주며 말했다.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라헤나는 카판을 조금씩 마셨다.
김필도는 왼손으로 라헤나의 손을 잡고 세딕 마법을 펼쳤다. 뜨거운 기운이 라헤나의 몸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그렇게 1분가량 흐르자 라헤나의 얼굴이 조금씩 본래의 색을 되찾아 갔다.
“이제 내가 마실게요.”
라헤나는 카판 잔을 잡았다.
“정말 괜찮아요?”
“카판 마시는 거 보면 알잖아요.”
라헤나를 바라보던 김필도는 다시 손을 물속에 집어넣고 세딕 마법을 펼쳤다.
“옷도 버린 것 같은데 들어오세요. 그리고 우린 부부잖아요.”
“지금 나 유혹하는 거죠?”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라헤나는 빙그레 웃었다.
“후회할 거예요.”
김필도는 옷을 훌훌 벗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물속에 몸을 담그자마자 곧바로 불의 속성 마법을 펼쳐 물을 데웠다.
“자요.”
바로 그때 눈앞으로 카판 잔이 다가왔다. 한편에 놓아 둔 카판이었다.
“고마워요.”
김필도는 카판 잔을 받아 들었다. 카판 잔을 건네준 라헤나는 김필도 바로 옆 욕조 벽에 등을 기댔다.
김필도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물 밖으로 나가면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엉망으로 변하지만 물속에서 보는 그녀의 몸은 탄성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오해하지 마세요. 바르칸 바로 옆이 가장 따뜻해서 이곳에 있는 거니까.”
“이렇게 하면 더 따뜻하겠네요.”
김필도는 왼팔로 라헤나를 끌어안았다.
“좋은 방법이에요.”
라헤나는 김필도의 어께에 머리를 기댔다. 김필도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열기가 금세 그녀의 몸을 데웠다.
“역시 물보다는 사람 체온이 더 좋네요.”
라헤나는 흡족하게 웃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그녀의 입술 색은 본래의 붉은색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직 추위를 떨쳐 내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혹시 물에서는 한기를 느끼는 거예요?”
김필도는 의아한 얼굴로 라헤나를 보았다.
물의 온도는 거의 50도에 육박하고 이 정도 시간이 흐른 뒤라면 보통 사람은 땀을 흘린다. 그런데 라헤나는 여전히 추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바르칸 말이 맞아요. 물속에 있으면 피부는 정상으로 돌아오는데 추위가 문제예요.”
라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속으로 들어가면 피부의 고통이 사라진다는 걸 알면서도 물을 가까이 하지 못했던 이유였다.
“이리 와요.”
김필도는 카판 잔을 내려놓고 다시 라헤나를 껴안았다. 라헤나는 두 팔로 김필도 목을 두르고 다리는 허리에 감고 작은 틈도 없이 밀착했다.
“다른 사람은 라헤나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왜 그런 거죠?”
라헤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다란에게서는 특이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데 유독 라헤나만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는 듯했다.
“아반 족에게 내려진 저주예요.”
“드반 족이 아니고 아반 족이었어요?”
김필도는 깜짝 놀랐다.
“제 성이 드반드쉬라서 드반 족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네.”
“드반드쉬라고 쓴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어요.”
“누구로부터요?”
“드반 족.”
“아반 족임을 숨기기 위해 드반 족인 척했다는 건가요?”
“네.”
“정령 전사가 된 것도?”
“우리 아반 족은 뛰어난 머리를 지녔지만 전사로서는 자질이 부족했어요. 우리 힘으로는 전사로 거듭나는 건 불가능했어요.”
“정령의 힘을 이용하면 가능하다는 거군요.”
“대신 치명적인 부작용을 감수해야 해요.”
“한기 말인가요?”
“정령의 힘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이런 부작용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어요. 약할 때는 부작용도 거의 없었고요.”
“점점 강해질수록 부작용의 세기도 높아진다는 거군요.”
“그래요.”
라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칠 방법은 생각해 봤어요?”
“간단한 방법이 있기는 해요.”
“어떤 방법이요?”
“정령의 힘을 버리는 거예요.”
“그 힘을 버려도 상관없어요?”
“그걸 모르니까 버리지 못하는 거잖아요. 욕심인지 모르지만 아직은…… 살고 싶어요.”
라헤나가 얼굴을 깊이 묻자 김필도는 라헤나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수천 년의 세월을 건너뛰고 다시 부활한 그녀. 어쩌면 아반 족의 유일한 생존자일지도 모르는 그녀가 불쌍해졌다.
“……?”
문득 어깨가 축축해지자 김필도는 손을 뻗어 라헤나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라헤나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었다.
김필도는 라헤나의 입에 입술을 맞췄다. 물론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너무 측은하여 자기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라헤나 또한 김필도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울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바르칸이 된 후 단 한 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심지어 석화 마법으로 몸이 굳어 갈 때도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데 수천 살이나 어린 김필도의 어깨에 얼굴을 묻자 갑자기 설움이 북받치면서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처음엔 멈추려고도 해 보았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한번 터져 버린 눈물샘은 끊임없이 눈물을 토해 냈다. 그 상태에서 김필도의 얼굴이 다가오자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허용해 버린 것이었다.
처음엔 허용이었지만 일단 입맞춤을 하고 나자 달라졌다. 그녀는 목마른 사람처럼 김필도의 입을 헤집었다. 등을 쓰다듬던 김필도의 손이 가슴을 그러쥐었다.
그때 라헤나의 눈이 번쩍 떠졌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난 다른 세상 사람이에요.”
김필도가 말했다.
“차원을 건너왔어요?”
“라그나뢰크에 도달한 드래곤 다섯 존체가 차원 마법진을 설치하고 루시안의 도플갱어인 나를 소환한 거예요.”
“그럼 루시안은?”
“여기서만 살아요.”
김필도는 제 머리를 가리켰다.
“기억으로만 남았다는 거네요?”
“네.”
“그럼 본명은 어떻게 되죠?”
“내 이름은 김필도예요. 그리고 부모 없는 아이들을 키워 주는 곳에서 자랐어요.”
“그랬군요. 당신도 그런 사람이었군요.”
라헤나는 다시 입을 맞췄다.
뜨거운 열기가 욕실에 들어찼다. 두 사람은 소중한 물건을 다루듯 서로를 매만졌다. 아반 족의 유일한 생존자와 차원을 건너온 이방인, 둘의 사랑의 밀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울려 퍼졌다.
“결혼은 했어요?”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후 라헤나가 물었다.
“아뇨.”
“난 결혼 생활을 20년 동안 했어요.”
“결혼 생활은 좋았어요?”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어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던 사람은 금세 재혼을 한다고 하던데…….”
“그래서 당신과 잤나 보죠, 뭐.”
“그렇게 된 건가요?”
“그래요.”
“잠깐 일어나 보세요.”
김필도는 라헤나의 허리를 잡고 일으켜 세웠다.
“난 좀 더 함께 있고 싶은데…….”
라헤나는 자기 팔로 시선을 내렸다. 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급속하게 물기가 말라 갔다.
“좋은 방법이 떠올랐어요.”
“좋은 방법?”
“만약 성공하면 라헤나는 밖에서도 물속에서처럼 지낼 수 있을 거예요.”
“어떻게 하는 건데요?”
“손 줘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