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
“어서 오게, 엘빈!”
황제는 웃으며 안으로 들어온 자를 맞았다.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이자는 제국군의 총사령관인 엘빈 노틸리어스 공작이었다.
“찾으신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왔습니다, 폐하.”
“이렇게 일찍 와 주어서 고맙네.”
“황송하옵니다, 폐하.”
노틸리어스 공작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앉게.”
황제는 자리를 권했다.
“아닙니다, 폐하. 서 있겠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그러는 거니까 앉도록 하게.”
황제는 다시 자리를 권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노틸리어스 공작은 못 이긴 척 자리에 앉았다.
“상황은 어떤가?”
“마족과 천족의 병력이 증강되면서 서서히 전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누가 이길 것 같은가?”
“당연히 우리 발탄 제국이 승리할 겁니다, 폐하.”
“헬모트 공작이나 노르탄 공작 연합군이 그렇게 강하단 말인가?”
“네?”
노틸리어스 공작은 의아하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하면 당연히 그래야지 하면서 맞장구를 쳐야 옳다. 그런데 황제의 얼굴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하다.
“나는 더 이상 그들의 눈치를 보고 싶지 않네, 엘빈.”
‘응?’
노틸리어스 공작의 눈에 잠깐 이채가 서렸다가 사라졌다. 곧이어 그의 입에서 충정이 담긴 외침이 터져 나왔다.
“감히 그자들이 폐하를 능멸했단 말입니까?”
“능멸했다는 게 아니고, 지금도 쟁쟁한 자들인데 전쟁에서까지 승리하면 나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네. 더구나 적은 인간도 아니고 마족과 천족 아닌가?”
“저는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폐하.”
두 공작을 제거하고 싶다는 말이라는 걸 노틸리어스 공작이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모른 척했다.
“발탄 제국에 필요한 공작은 한 명이란 말이네, 엘빈.”
황제는 은근하게 말했다.
“……폐, 페하!”
황제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아차린 노틸리어스 공작은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황제가 말한 한 명의 공작이란 바로 노틸리어스 공작 자신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아니 황제가 어떤 뜻으로 말을 했든 간에 노틸리어스 공작은 그렇게 받아들였다.
황제는 빙그레 웃으며 노틸리어스 공작을 바라보기만 했다.
노틸리어스 공작은 고개를 들었다.
“폐하의 의도대로 되기 위해서는 두 공작과 후작들이 이끄는 영지 연합군과 천족과 마족이 상잔을 해야만 하는데 그건 쉽지가 않습니다.”
“그건 이게 해결해 줄 거네.”
황제는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손톱 크기의 루비가 박힌 그것은 발탄 제국의 황제를 나타내는 ‘태양의 인장’이었다.
“태, 태양의 인장?”
노틸리어스 공작은 깜짝 놀랐다.
황제가 품속에서 꺼낸 반지 두 개는 손가락에 끼고 있는 것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았다.
“이 두 개는 복제품이지만 모든 면에서 진짜와 똑같다네. 가짜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네.”
“자칫 잘못하면 그들이 폐하를 암살하려고 할 수 있습니다.”
노틸리어스 공작은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
복제품이라고 하지만 황제의 육안으로는 판별이 어렵다. 그럼 태양의 인장을 가진 사람은 세 명이 되는 거고, 누가 됐든 두 명이 죽으면 나머지 한 명은 자동적으로 황제가 된다. 즉 태양의 인장을 두 공작에게 건네준다는 건 황제 자신을 암살해 달라고 청부를 넣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절대로 날 암살할 수 없네.”
“그들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폐하.”
“나는 절대 그들을 무시하지 않네.”
“그런데 왜…….”
“회의가 끝난 다음에 난 황실로 돌아오지 않을 거네.”
“잠적하실 거란 말입니까?”
“그러네.”
“그럼 황실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래서 자네를 부른 거 아닌가? 내가 돌아올 때까지 황실을 지켜 주었으면 하네.”
“그게 가능할 거라고 보십니까?”
“공작이나 귀족들에게 내릴 명령은 거의 없을 거네만, 정히 명령을 내릴 일이 있으면 겨울의 궁전에 있는 대공과 상의하게.”
“프리우스 대공 전하와 상의하란 말씀이십니까?”
“이 반지는 그에게 주고 갈 참이네.”
황제는 자신의 손가락에 끼고 있는 태양의 인장을 가리켰다.
“알겠습니다, 폐하. 대공 전하를 모시고 황실을 지켜 내도록 하겠습니다.”
노틸리어스 공작은 고개를 숙였다.
“제국군의 운용 또한 대공과 상의해서 결정하도록 하게. 난 지금 떠날 생각이네.”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노틸리어스 공작은 황급히 따라나섰다.
궁궐 앞에는 평범해 보이는 마차가 대기 중이었다. 일부러 튀지 않는 마차를 고른 모양이었다.
마부 석 옆에는 노르카의 수장인 페르카가 앉았고, 마차 문 옆에는 노반과 케이샬이 서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폐하.”
세 사람은 동시에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건 대공에게 주게.”
황제는 태양의 인장을 빼서 케이샬에게 건넸다.
“알겠습니다, 폐하.”
케이샬은 공손하게 태양의 인장을 받았다.
“황실을 부탁하네, 케이샬.”
황제는 곧바로 마차에 올랐다. 이어 노반이 따라 타고 페르카는 마부 석에 앉았다.
“걱정 마십시오, 폐하.”
“목숨을 다해 지켜 내겠습니다, 폐하!”
케이샬과 노틸리어스 공작은 깊게 고개를 숙였다.
“이럇!”
페르카의 나직한 외침에 이어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차는 금세 나무로 우거진 정원으로 들어섰다.
“차 드십시오.”
노반은 찻잔을 황제 앞으로 내밀었다.
“이번 작전이 성공할 거라고 보는가?”
황제는 찻잔을 받아 들며 물었다.
“이번 작전의 성패는 헬모트, 노르탄, 노틸리어스 공작이 폐하의 죽음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그들이 믿게 되면 성공한단 말인가?”
“태양의 인장을 가졌다는 건 곧 황제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셈이 됩니다. 하지만 여건은 그렇게 녹록치가 않습니다. 현 상황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천족과 마족이지요.”
“우선은 황제 자리보다는 마족과 천족을 없애는 데 전력을 다할 거란 말이군.”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천족과 마족이 있는 한 황제가 될 수는 없을 테니까요.”
노반의 얼굴에 자신감이 어렸다.
사실 이번 작전을 입안한 사람은 그였다. 노반이 이번 작전을 세운 이유는 신의 정원, 아니 정확하게는 10인 위원회 위원장인 아론 때문이었다.
만일 그를 몰랐다면 설령 멸망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귀족들과 힘을 합쳐 천족, 마족과 전쟁을 치렀을 것이다. 하지만 신의 정원의 실체를 안 순간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천족과 마족을 물리친다고 해도 신의 정원이 있는 한 대륙의 주인이 될 수는 없었다. 대륙의 완전한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신의 정원을 없앨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입안된 계획이 바로 가짜 태양의 인장을 이용한 공멸 계였다.
“그들은 천족, 마족과 전쟁을 하면서 전력을 거의 소모하게 될 테고 그들의 힘이 빠질 무렵 노틸리어스 공작과 세 사령관이 나서게 되겠지.”
“그리고 정리가 돼 가는 순간에 10인 위원회 위원장이 나서게 될 겁니다.”
“우리 계획대로 됐을 때 이야기 아닌가?”
“반드시 그렇게 될 겁니다, 폐하.”
“그래야지.”
황제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마차는 어느새 빛의 궁을 벗어나 대로를 내달렸다. 그리고 잠시 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한편.
노틸리어스 공작은 커다란 건물로 들어서고 있었다.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건물은 명예의 궁전으로, 본궁인 빛의 궁과 별궁인 겨울의 궁전 사이에 위치해 있는데, 황궁을 경비하는 기사들의 쉼터였다.
노틸리어스 공작 옆에는 건장한 체격의 중년인 세 사람이 좌우로 나뉘어 걸어가고 있었다.
오른편에 있는 갈색 머리 중년인은 스켈레톤 나이트란 닉네임을 가진 샬 블레어 후작이고, 왼편에 있는 두 명은 폭스 나이트라고 불리는 로그 고르딘 후작과 울프 나이트라고 불리는 베르토니 엘파소 후작이었다.
네 사람이 향하는 곳은 겨울의 궁전이었다.
“굳이 그자를 찾아갈 필요가 있습니까?”
오른편의 블레어 후작이 입을 열었다.
“태양의 인장 주인이라는 건 곧 황제 폐하의 대리인 아닌가. 당연히 찾아뵈어야지.”
“그자가 가짜라는 걸 아시고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왼편에 있던 로그 고르딘 후작이 노틸리어스 공작을 보며 말했다.
놀라운 말이었다. 황제는 김필도가 가짜라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알고 있었다. 그건 곧 이들 또한 단순한 제국군의 수장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로그!”
“말씀하십시오, 총사령관님!”
“그는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 대공이네. 우리가 목표를 이룰 때까지, 아니 땅속에 묻힐 때까지는 그는 발탄 제국의 유일한 대공이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제가 실수했습니다, 총사령관님!”
블레어 후작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절대 그를 의심하는 눈빛을 보내선 안 되네.”
“알겠습니다.”
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노틸리어스 공작 일행은 어느새 겨울의 궁전 정원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잠시 후 겨울의 궁전 집사인 케이샬이 노틸리어스 공작 일행을 맞았다.
“대공 전하는 계십니까?”
노틸리어스 공작은 케이샬을 보며 물었다.
“접견실에서 네 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쿡!”
베르토니 엘파소 후작의 입에서 비웃는 듯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장사치에 불과한 자가 제국군의 수장을 접견실에서 기다린다고 하자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만 것이었다.
“베르토니!”
노틸리어스 공작은 엄한 눈으로 엘파소 후작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당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엘파소 후작이 경멸의 표정을 지은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총사령관님.”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엘파소 후작은 바로 고개를 숙였다.
“그분은 발탄 제국의 유일한 대공임을 명심하게.”
“알겠습니다, 총사령관님.”
“여깁니다.”
“고맙소, 케이샬!”
케이샬이 문을 열어 주자 네 사람은 안으로 들어갔다.
“하하하! 어서 오시오, 공작.”
김필도는 활짝 웃으며 네 사람을 맞았다.
‘응?’
노틸리어스 공작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눈앞에 있는 자는 발탄 제국 대공이 아니고 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장사꾼이다. 아무리 케이샬로부터 교육을 받았다고 해도 장사꾼 기질은 숨겨지지 않는다. 그런데 아무리 뜯어보아도 장사치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왜 그러시오?”
김필도는 노틸리어스 공작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아, 아닙니다, 대공 전하. 저는 제국군 총사령관 엘빈 노틸리어스입니다. 처음 뵙습니다.”
“저는 제국군 기갑기사단을 담당하고 있는 샬 블레어 후작입니다, 전하.”
“전 발탄 기사단을 담당하고 있는 로그 고르딘 후작입니다, 전하.”
“저는 제국군 병사를 담당하고 있는 베르토니 엘파소 후작입니다, 전하.”
노틸리어스 공작 일행은 차례로 자신을 소개했다.
“반갑소, 네 분. 난 발탄 제국의 대공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요. 앉으시오.”
김필도는 빙그레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감사합니다.”
노틸리어스 공작 일행은 자리에 앉았다.
그들이 자리하자 케이샬이 가져온 차를 내려놓았다.
“황제 폐하께서 공작께 뭐라고 하셨는지 듣고 싶은데 말해 줄 수 있겠소?”
‘이놈 봐라?’
노틸리어스 공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황제가 명령을 내릴 때 케이샬도 있었으니까 이미 전해 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문을 한다는 건 떠보는 게 아니고 뭐겠는가.
맹랑한 놈이 아닐 수 없었다.
“말하기 곤란합니까?”
“아닙니다, 전하. 폐하께서는 전하를 대리인으로 임명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황제 폐하께서 돌아오시기 전까지는 내가 제국군의 통수권자란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럼 공작과는 어떻게 되오?”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공작도 제국군에 속하느냐는 질문이오.”
“그건…….”
노틸리어스 공작은 말끝을 흐렸다. 제국군에 속한다는 말이 떨어진 순간 김필도의 수하로 전락하기 때문이었다.
“아닌 모양이군요. 그럼 이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거군요.”
김필도는 왼손 엄지손가락에 끼고 있는 태양의 인장을 가리켰다.
“아닙니다, 전하. 전 제국군입니다.”
노틸리어스 공작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가 이렇듯 고개를 숙인 이유는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는 일들 때문이었다. 만일 그 일들이 제대로 된다면 문제될 게 없겠지만 실패했을 경우에는 누군가 책임질 자가 필요했다. 그 책임을 질 사람이 바로 김필도였다.
“그럼 내 명령을 듣겠군요.”
“그렇습니다, 전하.”
“그럼 명령을 내리겠소, 공작.”
“하명하십시오, 전하.”
“천족, 마족과 각 영지 연합군의 전쟁으로부터 제국군을 지킬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서 문서로 보고하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전하.”
“만나서 반가웠소, 공작.”
“저도 반가웠습니다.”
노틸리어스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특이한 일도 있으면 보고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노틸리어스 공작은 다시 인사를 하고 사령관들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창가로 자리를 옮긴 김필도는 정원을 빠져나가는 네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어때요?”
김필도는 뒤에 서 있는 케이샬을 보며 물었다.
“노틸리어스 공작 말입니까?”
“네.”
“제가 잘못 봤다는 생각이 듭니다.”
“케이샬 말이 맞아요. 보통 귀족들은 그림자 대공을 보면 우선 경멸의 표정을 짓는 것부터 시작해요. 그런데 그는 전혀 그런 표정을 짓지 않았을 뿐 아니라 대공으로 대우를 해 줬어요. 그건 곧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세간의 평가가 잘못됐다는 말씀이시군요.”
“맞아요. 그가 제국군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는 이유는 세 명의 사령관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가 제국군 27만 명을 다스릴 능력이 있기 때문이에요. 문제는…….”
김필도는 골몰한 얼굴로 턱을 쓰다듬었다.
“뭐가 문제란 말입니까?”
“황제가 알고 있느냐 하는 거예요.”
“황제가 알고 있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노틸리어스 공작 또한 황제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꼭두각시의 하나라는 뜻이 되겠죠.”
“그렇군요.”
케이샬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상관없어요. 아직은 황제와 내가 원하는 게 같으니까요.”
“확전 말입니까?”
“맞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