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9
제4장 결전을 위한 준비
휴전은 생각보다 오래갔다.
프라넬 대평원을 사이에 두고 헬모트 공작과 노르탄 공작이 이끄는 영지 연합군 측과 천족 그리고 마족은 서로를 지켜보기만 할 뿐 어느 쪽도 공격을 하지 않았다.
양측으로선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마족과 천족은 본국에서 보내온 병력이 충원될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고, 영지 연합군 또한 전력 증강을 하느라 진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전력 증강을 마치지 않은 상황에서 선봉이 무너지면 후발대 또한 바로 무너질 수 있기 때문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차에 영지 연합군 진영이 발칵 뒤집어지는 엄청난 소식이 전해졌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전선을 시찰하고 돌아가던 황제의 실종 소식이었다.
황제의 실종 소식에 가장 먼저 움직인 사람은 프라넬 평원 북쪽에 진영을 구축하고 있는 헬모트 공작이었다.
그는 황제가 실종된 장소인 라파 산맥으로 사람을 급파했다. 그리고 조사단이 돌아오자마자 노르탄 공작과 황실에 있는 노틸리어스 공작에게 연락을 취해 약속을 잡았다. 만날 장소는 전선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아비라의 모처로 정했다.
헬모트 공작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노틸리어스 공작은 바로 김필도를 찾아와 상황을 보고했다.
“황제 폐하께서 실종된 장소가 어디요?”
“라파 산맥 부근이랍니다. 주변에서 싸움을 한 흔적과 함께 천족이나 마족이 사용하는 대검이 발견됐다고 합니다.”
“천족이나 마족이 흉수란 말이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그렇습니다.”
“선장을 잃은 셈이구려.”
“공작들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 제국은 상당히 위험한 상황입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헬모트 공작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가서 만나 보시오.”
“전하께서는 가지 않으실 겁니까?”
“공작을 불렀지 날 부른 게 아니지 않소.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다녀오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전하.”
노틸리어스 공작은 고개를 숙였다.
“그건 그렇고 제국군은 어떻게 하기로 했소?”
“제국군은 수도 방위에 치중하기로 했습니다.”
“공작들이 인정할 거라고 보시오?”
“제국군을 제외한다고 해도 총 병력은 2백만 명 가까이 됩니다. 문제없을 겁니다.”
“내가 결정할 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내줄 생각은 해야 할 거요.”
“정 안 되면 절반 정도는 지원할 생각입니다.”
“아무튼 그 일은 공작이 알아서 하시오. 언제 떠날 거요?”
“지금 당장 가야 합니다. 그리고 제국군을 좀 둘러보고 와야겠습니다.”
당분간 황실로 들어오기 힘들다는 말이었다.
“굳이 결과를 보고하려고 하지 않아도 되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하시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노틸리어스 공작은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김필도는 찻잔을 든 채로 정원을 가로지르는 노틸리어스 공작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필도는 한쪽 구석에 놓인 밀가루 포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 밀가루는 노틸리어스 공작이 선물이라며 가져온 것이었다.
“정확하게 묻고 싶은 게 뭐죠?”
허공에서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김필도의 목을 감쌌다. 손의 주인은 라헤나였다.
“그는 황제가 실종을 가장하고 사라지자마자 저 밀가루 포대를 선물이라며 가져왔어요. 그 이유가 뭘까요?”
“바르칸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의사 표현 아닐까요?”
“내 생각도 그래요.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닌 것 같아요.”
“다른 의도가 숨어 있다는 건가요?”
“의도가 숨어 있는 것 같지는 않고 노틸리어스 공작의 마음을 약간은 알 것 같다는 거예요.”
“어떤 마음을 말인가요?”
“그는 황제를 완전하게 잠적시킬 결심을 한 것 같아요.”
“승부수를 띄웠단 말이네요?”
“내 생각은 그런데……, 케이샬 생각은 어때요?”
김필도의 시선이 책장 옆 책상으로 향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전하. 그는 황제를 제거할 결심을 한 것 같습니다.”
책상 앞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더니 케이샬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 역시 인비지빌리티 마법으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자가 알아서 다 해 주니까 난 할 일이 없네요.”
“대공께서는 황실에서 쉬면서 구경만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마법이나 열심히 익혀야겠어요.”
“요새도 마법에 몰두하고 있는 것 같던데, 아닙니까?”
“심심하잖아요.”
“온 나라 안이 전쟁에 휩싸여 있는데 심심하다고 하는 분은 전하밖에 없을 겁니다.”
“케이샬은 심심하지 않은가 보죠?”
“저야 심심할 틈이 없지요.”
“뭘 하고 지내는데요?”
“오픈(Open)!”
케이샬은 대답 대신 아공간을 열었다. 그러고는 은색의 전투기갑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전투기갑이네요?”
김필도는 전투기갑을 바라보았다. 겉모습은 지금까지 보았던 어떤 전투기갑보다 정교했다. 하지만 전투기갑에서 흘러나오는 마나는 일반 전투기갑과 다를 바 없었다.
“35년 동안 주무르고 있는 녀석입니다.”
“성능은 어느 정도죠?”
“아직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완성된다는 가정 하에 헤를리온을 제외하면 이 녀석을 따라올 전투기갑은 없을 겁니다.”
“뭐가 문젠데요?”
“녀석을 작동시켜 줄 연료가 없습니다.”
“연료라면 하만티움?”
“일반 하만티움으로는 작동이 불가능하거든요.”
“그거라면 내가 해결해 줄 수 있겠네요.”
김필도는 아공간을 열었다. 그리고 리모스에서 얻은 하만티움을 꺼내 내려놓았다.
“이, 이게 다 뭡니까?”
케이샬은 깜짝 놀란 얼굴로 하만티움을 바라보았다. 김필도가 내려놓은 하만티움은 마나 스캔 마법으로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척 보기에도 최상급임을 알 수 있었다.
“리모스에서 얻은 하만티움이에요.”
“리, 리모스라고요?”
“네.”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리모스가 존재한단 말입니까?”
“지금은 사람도 살고 있어요.”
“세상에…….”
케이샬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신의 땅으로 불렸던 전설의 장소. 그는 그곳이 존재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이 정도면 될 것 같아요?”
김필도는 하만티움을 가리키며 물었다.
“추, 충분합니다.”
“그럼 이것까지 있으면 되겠네요.”
김필도는 하만티움 덩어리 3개를 더 꺼냈다.
“너무 많습니다, 전하.”
“이쪽에 있는 3개는 전투기갑에 사용할 게 아니에요.”
“그럼?”
“일단 이것부터 보고 나서 이야기할게요.”
김필도는 다시 아공간에 손을 집어넣어 뭔가를 꺼냈다. 그가 꺼낸 것은 투명한 물고기인 드래곤 피시 세 마리였다.
“이 물고기는…….”
케이샬은 재빨리 마나 스캔 마법을 펼쳐 김필도가 꺼내 놓은 물고기를 살폈다. 물고기는 옆에 꺼내 놓은 하만티움보다 더 높은 순도를 지녔고, 마나의 움직임 또한 안정적이다. 저런 종류의 마나를 가지고 있는 건 케이샬이 알기론 드래곤 하트밖에 없다.
“드래곤 피시예요.”
“부, 불사의 마나라는 그 드래곤 피시란 말입니까?”
케이샬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순도 높은 하만티움에 이어 드래곤 하트와 쌍벽을 이룬다는 드래곤 피시까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거면 라헤나의 병을 고칠 수 있을까 해서요.”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태생적으로 물의 마나를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는 드래곤 피시는 물의 정령 전사 쿠딕인 라헤나에게 최고의 포션이라고 할 수 있었다.
“드래곤 피시로 힘들면 이 하만티움으로 영구 마법을 걸 수 있는 마법 아이템을 만들어 주세요.”
김필도는 꺼내 놓은 하만티움을 가리켰다.
지금처럼 상태 지속 마법에 의존하는 것보다, 영구 마법이 걸린 마법 아이템을 지니고 있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아이템은 어떤 형태가 좋겠습니까?”
케이샬은 라헤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몸에서 떼어 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해야겠죠?”
“그렇습니다, 라헤나 님!”
“모양은 제가 생각해 볼게요.”
“그림을 그려 주시면 그대로 제작해 드리겠습니다.”
“알았어요.”
“그만 일어납시다.”
김필도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고마워요.”
김필도를 따라 나온 라헤나가 감사의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래도 고마운 걸 어떡해요.”
“아무튼!”
김필도는 졌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산책이나 할래요?”
“좋죠.”
두 사람은 걸음을 옮겨 후원으로 나갔다.
나오자마자 라헤나는 김필도의 팔짱을 끼었다.
“이번 일 마치면 문 대륙으로 갈 거예요?”
“그렇게 될 것 같아요. 라헤나도 갈래요?”
“가도 돼요?”
“당연히 가도 되죠.”
“그럼 갈게요.”
“이제 한 사람 구했네요.”
“함께 갈 사람을 구하고 있는 거예요?”
“네.”
“갈 사람이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가정이나 가문이 있는 사람들은 문 대륙으로 간다는 게 쉽지 않잖아요. 제국 내에서 이사 가는 것도 아니고 대륙을 건너가는 건데. 그리고 환경이 좋은 것도 아니고요.”
“그렇긴 하겠네요. 아무튼 난 무조건 따라갈게요.”
“고마워요.”
“고마운 건 나죠.”
라헤나는 팔짱 낀 손에 힘을 주며 활짝 웃었다.
황실의 일상은 단조로웠다.
국정을 돌본다고 하지만 전쟁에 관한 것은 헬모트 공작과 노르탄 공작이 알아서 하고 있고 전군 동원령 또한 황제가 내려 놓은 상태라 현재 황실에서 특별히 해 줄 것은 없었다. 다만 황제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는지 살피는 게 전부였다.
“나갔다 와야겠어요.”
아침 식사 중에 김필도는 케이샬과 라헤나를 보며 말했다.
“노틸리어스 공작이 찾아오면 어떻게 하려고요?”
라헤나가 물었다.
“라헤나가 있잖아요.”
“환영 마법으로 얼굴과 목소리를 바꾸고 바르칸 역할을 하라는 거예요?”
“그건 케이샬이 해 줄 거예요.”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갈 생각인데요?”
“동로군벌에 가 보려고요.”
“그곳에 문제가 생겼을 거라고 보세요?”
“다른 귀족은 전부 아비라로 이동했는데 동로군벌 수장인 디바스칸 백작만 움직이지 않았어요.”
“움직이지 않은 게 아니라 움직이지 못하는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군요.”
“황제에게는 협조를 약속했던 사람이거든요.”
“그랬던 사람이 황실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는 건 누군가에게 제압당했다는 말이 되는 건가요?”
“문제는 사람들 중에는 디바스칸 백작을 제압할 만한 자들이 없다는 가죠.”
“마족이나 천족 둘 중 하나란 말이군요.”
“그럴 가능성이 높아요.”
“알았어요.”
라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들어갈까요?”
“네.”
두 사람은 후원을 벗어나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간 김필도는 케이샬에게 그의 계획을 말했다.
그리고 다음 날, 김필도는 로브 후드를 눌러쓰고 그로 변장한 라헤나와 케이샬과 함께 황궁 후문 앞에 섰다.
“곧 리시아 양이 찾아올 거예요.”
김필도는 라헤나를 보며 말했다.
“그녀가 오면 함께 지내도록 할게요.”
라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헤나를 부탁할게요.”
이번에는 케이샬에게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전하. 전하께서 돌아오실 때면 라헤나 님의 병은 완치돼 있을 겁니다.”
“고마워요. 그럼 갈게요.”
그의 신형은 빠르게 두 사람에게서 멀어졌다.
“고마운 사람은 접니다, 전하. 전 죽기 전에 죗값을 치를 수 있게 해 준 하늘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케이샬은 멀어지는 김필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