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
휴도니아 대륙과 문 대륙 사이에 뱃길이 열리면서 가장 먼저 생겨난 것은 양 대륙을 오가는 여객선이 접안할 항구였다.
그 항구를 통해 장차 다가올 전쟁을 피해 또는 새로운 꿈을 찾아 수많은 사람들이 여객선을 타고 문 대륙으로 떠났다. 대륙 북서쪽에 위치한 라하 항도 북해가 열리면서 생겨난 항구 중의 한 곳이었다.
대부분의 여객선이 그렇듯 문 대륙으로 떠났다가 돌아오는 배에서는 내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간혹 태우는 상인들이 전부였다.
막 라하 항으로 들어온 빅토리 호 또한 다르지 않았다. 배에서 내린 사람은 세 명에 불과했다.
세 명 전부 로브를 걸쳤는데, 두 명은 인간과 비슷하거나 약간 컸고, 나머지 한 명은 3미터에 육박했다.
생소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이들은 오디안과 알리토 그리고 시아나였다.
시아나가 오디안 일행과 친분을 쌓게 된 것은 영원의 호수에서였다. 호수에 서식하는 몬스터 때문에 꼼짝도 못하고 있던 이들을 시아나가 도와줌으로써 안면을 익혔고, 서로가 김필도를 알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친분을 쌓았다. 그리고 시아나는 알리토로부터 말도 배워, 제법 정착 생활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이들이 이곳으로 온 이유는 천족과 마족을 상대로 전쟁을 준비 중인 김필도를 돕기 위해서였다.
“53년 만인가?”
알리토의 입에서 감회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주를 따라 문 대륙으로 건너간 이후 처음이다. 그때만 해도 몇 년 만 고생하면 다시 돌아올 줄 알았는데 어느새 5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이 흘러 버린 것이다.
“멋진 곳이구먼.”
알리토는 붉게 물들어 있는 산에 시선을 묻으며 말했다.
“가을이라서 그렇습니다.”
“단풍이란 말이구먼.”
“그렇습니다. 시아나 님은 어떻습니까?”
“무, 문 대륙보다는 못하지만 나, 나쁘지 않아요.”
아직은 어눌했지만 맑고 투명한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나저나 이 넓은 곳에서 대공 전하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막막하네요.”
“저, 저기로 가요.”
시아나는 오른편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킨 곳은 할만 카판숍이란 간판이 걸린 가게였다.
“저곳으로 가면 대공 전하의 소식을 알 수 있습니까?”
“그가 돈과 아이디어, 카판 끓이는 기술을 투자하고 샤일록이 만든 가게예요. 각 카판숍과 연락이 된다면 루시안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녀가 카판숍에 대해 자세하게 알고 있는 건 김필도와 여행을 하면서 휴식을 취할 때마다 많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랬군요. 여기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오디안은 주머니에서 팔찌를 꺼내 알리토와 시아나에게 건넸다. 그 팔찌는 환영 마법이 걸려 있는 마법 아이템이었다.
팔찌를 차자 알리토와 시아나의 키가 오디안과 비슷하게 줄어들었다.
“가죠.”
세 명은 카판숍으로 향했다. 카판숍에서는 식사와 카판을 함께 팔고 있었다. 식사를 주문하고 카판을 마시면서 숍의 주인에게 샤일록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예상대로 모든 카판숍은 통신 마법구로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게 돼 있었다.
숍 주인은 일행을 통신실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통신 마법구를 활성화시킨 후 이리저리 연락을 하더니 샤일록이 나오자 자리를 비켜 주었다.
“나네, 샤일록!”
“오디안 님이십니까?”
“님은 무슨.”
“고객이신데 함부로 대할 수는 없지요. 그런데 휴도니아 대륙엔 웬일이십니까?”
“대공 전하를 만나러 왔네.”
“대공 전하요?”
“그러니까…….”
오디안은 자신들과 김필도와의 관계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러셨군요. 대공 전하는 카단 성으로 가고 있습니다.”
“카단 성이면?…….”
오디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너무 오랜만에 온 휴도니아 대륙이라 그런지 선뜻 생각이 나지 않았다.
“계신 곳에서 남서쪽으로 가면 나옵니다. 잭에게 지도를 달라고 하시면 될 겁니다.”
“알았소. 언제 한번 봅시다, 상단주.”
“대공 전하와 함께 계시면 언제든지 절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겠구려.”
오디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통신 마법구 앞에서 물러났다.
그로부터 2시간 후, 오디안 일행은 카판숍 주인 잭으로부터 지도와 약간의 돈을 받아 길을 나섰다.
* * *
조직을 세우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방법은 사람을 모아 하나씩 키워 나가는 거고, 두 번째 방법은 만들어진 조직의 수뇌를 부하로 만드는 것이다. 전자는 조직이 유지되는 근간이 신뢰라면 후자는 철저하게 공포로 유지된다.
동로군벌의 상황은 바로 후자였다.
디바스칸 후작은 힘없는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휴우!”
그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들이 처음 나타난 건 몇 달 전이었다. 인편을 통해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하루 정도 고민을 하다가 만나 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도대체 어떤 자들이기에 하다르만 백작과 이코스트 백작이 손을 잡았는지 궁금했다. 더불어 얻어 낼 게 있다면 손도 잡을 생각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본 결과 제법 마음이 통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무작정 자리를 내줄 수는 없었다.
좀 더 생각할 여유를 달라고 하고는 마족을 돌려보냈다. 그런데 놈들은 돌아간 게 아니었다. 일부만 돌아갔을 뿐 나머지는 이곳에 남아 각 영주들의 가족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황제를 만나러 간 사이에 가족들을 납치하여 인질로 잡고 자신들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으면 가족을 전부 죽이겠다고 협박을 하고 있다.
“아직도 마음을 잡지 못한 모양이구나.”
오른편 어둠 속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3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덩치 사내가 걸어 나왔다.
검은 옷을 걸치고 대검을 등에 멘 사내는 마계10군단 군단장인 데메우스였다.
“…….”
디바스칸 백작은 말없이 데메우스를 노려보았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구나.”
데메우스는 옆에 서 있는 자를 돌아보았다. 그는 제1부군단장인 데본이었다.
“알겠습니다, 군단장님!”
시선을 받은 데본은 디바스칸 백작을 향해 뭔가를 던졌다.
퍽!
날아온 물체는 창을 넘어와 디바스칸 백작 옆으로 떨어졌다.
“그걸 보면 결심을 하는 데 도움이 될 게다.”
데메우스의 말에 디바스칸 백작은 옆을 보았다. 바닥에 떨어진 물체는 보자기에 싸여 있었다.
“서, 설마!”
디바스칸 백작은 급하게 보자기를 풀었다.
“어, 어머니!”
디바스칸 백작은 오열했다. 보자기 안에서 나온 물체는 데메우스에게 인질로 잡혀 있던 그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5일 주마, 디바스칸. 만일 그때까지 병력을 출병시키지 않으면 네 마누라는 물론이고 자식들의 머리까지 보게 될 거다.”
말을 마친 데메우스는 몸을 돌렸다.
걸음을 옮기는 그의 얼굴엔 흡족한 기색이 역력했다. 인간을 가장 쉽게 다루는 방법은 바로 가족을 잡고 협박하는 것이었다. 부모는 물론이고 자식을 인질로 잡고 그들의 목숨을 위협하면 굳이 힘을 쓰지 않아도 원하는 걸 쉽게 얻어 낼 수 있다.
“본 대에서는 연락이 왔느냐?”
데메우스는 데본을 보며 물었다.
“5만 명이 추가로 들어왔고, 남은 5만 명만 들어오면 곧바로 공격을 시작할 거라고 합니다.”
“그럼 최소한 한 달은 기다려야 하겠구나.”
“그렇습니다, 군단장님!”
“천족 진영은 어떻다더냐?”
“그쪽도 마찬가집니다. 10만 명의 병력이 들어왔고, 남은 5만 명을 데려오기 위해 수송선이 떠났다고 합니다.”
“이스마디온 전사단의 행적은 찾았다고 하더냐?”
“라파로 들어갔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그런데…….”
“말해라.”
“제2원로도 제9군단을 데리고 라파로 향했다고 합니다.”
“홀딘을 잡으러 간 모양이구나.”
“그런 것 같습니다.”
“칼베리언은 뭐 하고 있느냐?”
“그 역시 블러드 데빌단을 데리고 은밀하게 진영을 벗어났다고 합니다.”
“어디로 갔을 거라고 보느냐?”
“그의 성격으로 볼 때 쿤할 제2원로를 쫓아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곳에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겠구나.”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데메우스와 데본은 어느새 거처에 도착했다.
“군단장님!”
안으로 들어서자 경비를 서고 있던 자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
데메우스의 얼굴이 슬쩍 굳어졌다. 경비의 얼굴이 심상치 않은 탓이었다.
“윰, 나틀, 슈반이 죽었습니다.”
경비는 굳은 얼굴로 보고했다.
“죽어?”
데메우스는 황당한 얼굴로 부하를 보았다.
“목이 잘렸습니다.”
“지금 어디 있느냐?”
“저곳에…….”
부하는 안쪽을 가리켰다.
데메우스는 빠르게 실내로 들어갔다. 실내에는 커다란 관 세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열어라!”
관 앞에 선 데메우스는 낮게 말했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부하 한 명이 관 뚜껑을 열었다.
“으음!”
데메우스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관 안에는 목이 잘려 나간 마족의 시체가 들어 있었다.
“일검에 잘려 나갔습니다, 군단장님!”
보고를 한 자는 1조 조장 케이번이었다.
“일검이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크아악!”
“아악!”
“으아악!”
느닷없이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잡아라! 암살자가 도망친다!”
“응?”
데메우스는 깜짝 놀랐다, 맨 마지막에 들려온 외침은 휴도니아 대륙 언어가 아니라 바로 마족들이 사용하는 언어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케이번을 보았다.
“대원들이 살해당한 장소를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안내해라!”
데메우스는 곧바로 밖으로 뛰쳐나가며 소리쳤다.
“알겠습니다, 군단장님!”
케이번은 앞장서서 달렸다. 그들이 비명이 들려왔던 장소에 도착한 것은 5분 후였다. 그곳은 마족들이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곤 하던 술집이었다.
죽임을 당한 마족은 세 명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
“기습을 당했습니다.”
“누구에게 기습을 당했단 말이냐?”
“전투기갑을 걸치고 대검을 든 인간이었습니다.”
“인간에게 기습을 당해서 세 명이 죽었단 말이냐?”
데메우스는 버럭 소리쳤다.
“너무 빨라 손을 쓸 겨를도 없이…….”
짝!
데메우스의 손이 보고하던 마족 사내의 뺨에 작렬했다.
“크윽!”
사내는 뺨을 감싸 쥐고 비틀거렸다. 하지만 금세 자세를 바로 잡았다.
“대마족이, 마계10군단 대원이 하찮은 인간에게 당했다는 걸 나보고 믿으란 말이냐!”
“아악!”
“으아악!”
데메우스의 말을 조롱이라도 하듯 비명이 또 들려왔다. 이번에 비명이 들려온 곳은 동쪽이었다.
“죽일!”
데메우스 신형이 술집을 박차고 나갔다. 그를 비롯한 마족들이 살해당한 동료를 발견한 것은 10분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