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2
마족들의 협박으로 인해 대부분의 병력을 카단 성 근처로 이동시켜 놓은 상태이기 때문에 집결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먼동이 터 올 무렵 동로군벌 30만 대군이 카단 산 산자락에 진형을 구축했다.
진형의 선두에는 전투기갑을 걸친 영주들과 기갑기사 2천 명 그 뒤에는 기사 3만 그리고 맨 후미에는 병사 27만 명이 좌우로 늘어섰다.
“크아악!”
정렬을 마치고 산을 바라보고 있는데 처절한 비명이 산중에서 들려왔다. 일행은 시선을 들어 카단 산을 바라보았다.
비명이 들려온 곳은 카단 산의 3부 능선 지점이었다.
“20마리다, 데메우스!”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죽여 주겠다! 벌레!”
“헐!”
디바스칸 백작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마리’는 짐승을 세는 단위다. 스무 마리. 그 말은 곧 마족은 지성체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과연 인간 중에 마족 면전에 대고 ‘넌 지성체가 아니고 몬스터야.’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배짱을 가진 자가 있을지.
아마도 발탄 제국 황제라고 해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그는 마족을 향해 짐승이라고 비아냥대고 있다.
“대단한 사람이군요.”
제1영주 패릴 백작은 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말이네.”
디바스칸 백작은 고개를 돌렸다. 패릴 백작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카단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악!”
“으악!”
“22마리다!”
“총 영주, 우리도 올라갑시다.”
패릴 백작은 디바스칸 백작에게 말했다.
“마족과 전쟁을 치르잔 말이오?”
“총 영주도 기사고 나도 기사고 저 뒤편에 서 있는 이들도 기삽니다. 대공 한 분에게 전부 맡긴다는 건 우리 동로군벌의 수칩니다.”
“제1영주 말이 맞습니다, 총 영주님! 출정을 허락해 주십시오.”
기갑 기사단 단장 보일 램버트 자작이 맞장구를 쳤다.
“자네들은 대공 전하와 다르네. 어쩌면 마족 놈들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네. 그래도 괜찮은가?”
“상관없습니다, 총 영주님!”
기사들은 우렁차게 소리쳤다.
“좋네. 올라가게. 올라가서 우리 동로군벌이 허수아비가 아니라는 걸 마족 놈들에게 확실하게 인식시켜 주게.”
“감사합니다, 총 영주님!”
램버트 자작은 디바스칸 백작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기갑기사들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올라가서 놈들의 목을 잘라라!”
“존!”
기갑기사들은 우렁차게 소리치고는 산으로 올라갔다.
“나도 다녀오겠습니다, 총 영주님!”
패릴 백작은 전투기갑을 착용하고는 기사들과 함께 산으로 들어갔다.
“나도 함께 가세.”
두 번째로 나선 자는 제2영주 리스콘 백작이었다.
“같이 갑시다.”
“나도 가겠소.”
이어 챌린지 백작, 후버 백작, 곤 백작이 전투기갑을 착용하고는 리스콘 백작을 따라나섰다.
“다 가면 난 어쩌란 말이오?”
디바스칸 백작은 산을 향해 달려가는 다섯 영주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총 영주께서는 도망치는 놈들을 없애야 할 거 아닙니까.”
맨 마지막에 출발했던 곤 백작이 이편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크아악!”
또다시 산중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이젠 비명만 들어도 마족임을 알 수가 있다.
“대단하네.”
디바스칸 백작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디바스칸 후작은 얼굴을 찌푸렸다. 문득 대공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대공이라고 하자 아무런 의심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해 버렸던 것이다.
“허허허!”
디바스칸 후작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러십니까? 총 영주!”
영주 한 명이 의아한 얼굴로 디바스칸 백작을 보며 물었다.
“아, 아니오.”
디바스칸 백작은 손을 저었다.
‘물건이네.’
그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맺혔다.
한편.
산속에서 마족과 싸우고 있는 김필도는 이름 모를 계곡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아침이 밝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무가 워낙 울창하여 사위는 어두컴컴했다.
“이동!”
커다란 나무가 나오자 김필도는 곧바로 이동 마법을 펼쳐 위로 올라갔다. 계곡의 형태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나무의 높이는 40미터 정도였다. 가장 큰 나무를 고른 듯 주위가 한눈에 들어왔다.
계곡의 폭은 5백 미터, 깊이는 1킬로미터로 상당히 컸다. 그리고 입구를 제외한 삼면은 높이가 7백에서 8백 미터가량 되는 수직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놈이 이곳으로 들어갔습니다.”
바로 그때 계곡 입구에서 마족의 외침이 들려왔다.
“쫓아라!”
“역시 개코가 맞네.”
김필도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어렸다.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놈들은 귀신처럼 알아차리고 쫓아오고 있다.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았다.
“들어오면 끝인데.”
김필도는 빙그레 웃으며 몸을 날렸다.
쿠쿠쿠! 쿠쿠쿠쿠! 쿠쿠쿠!
물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김필도가 이곳을 찾아온 이유가 바로 저 소리 때문이었다.
멀리서 들어도 폭포 물이 떨어지면서 나는 소리라는 걸 금세 알 수 있었다.
폭포 소리 때문에 어지간한 소리는 들리지 않고, 들어온 입구를 제외하면 나갈 방법이 없는 고립된 장소.
김필도가 원하는 장소였다.
어느새 김필도는 계곡 끝에 도착했다.
폭포는 절벽 위쪽이 아니라 40여 미터 높이에 뚫려 있는 세 개의 구멍에서 흘러나와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물이 떨어지는 아래쪽은 지름이 50미터가량 되는 호수였다.
김필도는 오른손을 들어 올린 후 고스트 킹을 소환했다.
-오랜만이다, 권능의 주인.
“오랜만이야.”
-오늘은 무슨 일인가?
“계곡 입구를 틀어막아 달라고 불렀어.”
-싸우는 중인가?
“쥐새끼 2백 마리 정도가 날 잡으러 오는 중이야.”
-그럼 나도 함께 싸워야 하는 거 아닌가?
“너까지 나서면 놈들이 도망치잖아.”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고 입구를 막는단 말인가?
“응!”
-적의 규모는 어느 정돈가?
“마족 2백 명.”
-……!
고스트 킹은 김필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왜?”
-마왕이란 놈이 눈앞에 있으면 턱을 부셔 버렸을 거다.
“헬칸과 카라는 다섯 종족의 최강자로 이루어진 결사대 1천 명을 없앴어. 2백 명은 밥 먹은 뒤 소화제도 안 되는 수야.”
-아무튼 난 입구를 틀어막겠다, 권능의 주인.
고스트 킹은 고개를 흔들고는 몸을 돌렸다.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다른 자들에게는 마족 2백 명이 엄청난 수일 수도 있지만 그는 헬칸의 후계자. 놀랄 것도, 걱정할 이유도 없다.
“놈들이 안으로 들어왔으니까 조용히 움직여.”
-알았다, 권능의 주인.
암흑 마법을 펼친 듯 고스트 킹의 모습이 허공으로 녹아들어 갔다.
“나도 시작해야겠지.”
김필도는 오른손을 가슴에 얹고 헤를리온을 소환했다. 곧 그의 전신이 액체 금속 해르마나움으로 둘러싸이고 갑옷을 착용한 모습으로 변했다.
그는 왼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지잉!
나직한 소성과 함께 커다란 방패가 생겨났다.
그런데 방패는 지금까지 모습과 달랐다. 전엔 육각형이나 마름모꼴에 창날이 달려 있는 듯한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원반 형태였다.
“광속의 바람! 죽음의 칼날! 로테이트!”
스아악!
마법 주문이 끝나자마자 왼손 등에 생성된 방패가 가공할 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약간의 소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돌아가는 소리조차 완전하게 사라지고 차가운 광채만 흘러나왔다.
김필도는 방패를 바라보며 정신을 집중했다. 방패의 크기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그의 의지에 따라 방패의 크기가 줄어들더니 지름이 10센티미터 크기에서 멈췄다. 여전히 방패는 가공할 속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얼마나 빨리 돌고 있는지 정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김필도는 왼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10센티미터 크기의 원반이 빠르게 쏘아져 나갔다.
스악! 삭! 스악! 삭!
원반이 지나가는 경로에 있던 나무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커다랗게 원을 그린 원반은 주인의 팔로 돌아온 사냥매처럼 김필도 왼팔에 안착했다.
그 후로도 김필도는 몇 번 더 원반 던지는 연습을 했다. 그러다가 원반의 의지에 따라 목표물을 찾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부터 넌 암흑마반이다.”
김필도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준비는 끝났으니까 이제부터는…….”
김필도의 신형이 계곡 오른편으로 쏘아져 갔다.
“사냥이다!”
진득한 살기를 담은 목소리가 여운처럼 허공에 남았다.
“크아악!”
그리고 5분 후, 첫 번째 비명이 울려 퍼졌다.
“여기가 맞습니까?”
오디안은 옆에 서 있는 시아나를 보며 물었다.
오디안 일행이 카단 산으로 들어온 건 1시간 전이었다. 이틀 전에 카단 성에 도착하긴 했지만 김필도를 찾는 건 막막했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수소문을 하고 다니다가 우연히 마족이 누군가를 쫓아 카단 산으로 들어갔다는 말을 들었다.
그 누군가가 김필도일 거라는 생각이 왜 들었는지는 모른다. 김필도가 마족과 전쟁을 시작했다는 확신을 갖고 바로 산으로 향했다.
산에서 일행을 리드한 이는 시아나였다.
“마, 맞아요.”
시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헤를리온을 소환했다. 뼈가 맞춰지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그녀는 네 발로 걷는 오드의 모습이 됐다.
“그건…….”
오디안과 알리토는 깜짝 놀랐다. 시아나가 전투기갑을 걸친 모습을 처음 보았던 것이다.
“엄마 갑옷이에요. 그아우!”
휙!
시아나는 곧바로 낭떠러지 아래로 몸을 던졌다.
“어!”
“여긴!”
알리토와 오디안은 급하게 낭떠러지 가장자리로 갔다. 그들이 내려다보는 사이에 추락하듯 아래로 뛰어내리던 시아나는 커다란 나무 위로 내려섰다.
“비밀이 많은 분이구먼.”
알리토는 나무 아래로 빠르게 모습을 감추는 시아나를 어이없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자신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7백여 미터나 되는 낭떠러지를 한 번에 뛰어내리진 못한다.
그런데 시아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아래로 뛰어내린 것이었다.
“그러게요.”
오디안도 다르지 않았다.
리모스로 들어갈 때 절대적인 도움을 준 이가 시아나였고, 그 도움으로 인해 친분을 쌓기는 했지만 아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하이오드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마스터와 친한 것 같으니까 차차 알게 되겠지. 우리도 그만 내려가세.”
“제 손을 잡으세요.”
오디안은 손을 내밀었다. 알리토는 오디안의 손을 잡았다.
“마나, 세상 창조의 힘. 공간을 초월한다! 텔레포트!”
나직한 외침이 흘러나오고 오디안과 알리토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낭떠러지 바닥이었다.
“아악!”
“크아악!”
그아아우우우!
“벌써 시작한 모양이구먼. 우리도 가 보세.”
“그렇게 하시지요.”